•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2. 유대의 매개물, 여성의 몸
  • 여성으로 일군 가문의 영광
  • 3. 사위의 성공 시대
권순형

처가와의 밀접성은 간혹 지방의 한미한 가문 출신자가 과거에 합격한 뒤 귀족의 사위가 되어 사회의 최상층에 진입하는 경우도 생겨나게 하였다. 귀족은 능력 있는 인재를 사위로 삼아 가문의 성세를 더하려 하였고, 가난한 천재들은 처가의 배경이 자신과 자식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딸과 그 후손을 아들과 다름없이 여기는 당시의 친족 관념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목(鄭穆, 1040∼1105)과 문공인(文公仁, ?∼1137)이다.

숙종 때의 관리였던 정목은 동래군의 향리 집안 출신으로, 18세에 개경에 홀로 올라와 유학하였다. 과거에 급제하고 그가 빼어나게 총명하다는 말이 들리자 당시 고위 관료였던 고익공(高益恭)이 사위로 삼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후 정목은 3품직까지 승진하였고, 아들 4명 가운데 3명이 과거에 급제해 개경의 중앙 관료 집안으로 자리 잡았다. 그의 손자 대에 이르러 이 집안은 당대의 명문이던 강릉 왕씨·정안 임씨·철원 최씨 집안과의 혼사를 통해 귀족 가문으로 발돋움한다. 그는 관직 생활을 하면서 다른 이들을 대할 때에 한결같이 온화함과 신실함을 견지하였고 틈이 나거나 모진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늘 “벌레도 성명(性命)을 온전히 하려면 독이 없어야 하고, 나무가 천 년의 수명을 누리려면 제목이 되어서는 안 되느니라”고 가르쳤다. 그가 출세하고 가문을 일구는 데는 자신의 능력과 신중한 처세술이 일차적 요인이었겠지만, 그가 명문가의 사위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고려시대에 과거에 합격한다는 것은 단지 그가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공표함에 불과하였다. 이후 관직의 배치와 승진은 가문 관계가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문공인에 대해서는 아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문공인의 처음 이름은 문공미(文公美)며 남평현 사람이다. 그 부친 문익(文翼)은 벼슬이 산기상시에 이르렀다. 문공인은 단아하고 곱게 생겼으므로 시중 최사추(崔思諏)가 그에게 딸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과거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이 되었는바 그 문벌은 한미하였으나 귀족과 인척 관계를 맺어서 마음대로 호사하였다. 일찍이 호부 원외랑으로서 요나라로 사신이 되어 갔을 때 접대원에게 개인적으로 백동나전기(白銅螺鈿器), 서화, 병풍, 부채 등 진귀한 물품을 주었는데 그 후 요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신이 지나갈 때마다 반드시 문공인의 예를 들면서 물건을 끝없이 강요하여 마침내 커다란 폐단이 되었다. 문공인이 추밀원 우부승선으로 전임되었을 때 왕자지(王字之)의 부사가 되어 송나라로 사신으로 갔는데 왕자지도 부자며 사치하는 자여서 둘이 서로 몸치장을 자랑하면서 힘써 번잡 화려하게 꾸몄다.99) 『고려사』 권125, 열전38, 간신1 문공인.

즉, 문공인은 집안이 한미하였지만 단아하고 곱게 생겨 시중(侍中) 최사추의 사위가 되고 이로써 호사를 마음대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집안은 아버지가 정3품직인 산기상시(散騎常侍)였다는 것을 볼 때 앞서의 정목에 비해서는 훨씬 좋은 집안이었다 하겠다. 그러나 인주 이씨나 해주 최씨 같은 대문벌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아마도 친족 중에 고위 관료가 별로 없었다는 점에서 한미하다는 표현을 한 것 같다. 고려시대 관료들은 설사 관직에 있어도 넉넉지 않은 녹봉과 많은 일가친척, 집안에 드나드는 손님 등으로 늘 쪼들렸다. 그러나 그는 귀족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거칠 것 없이 호사할 수 있었다.

사위 이야기를 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송유인(宋有仁, ?∼1179)이다. 그는 처음에 아버지의 음서로 벼슬자리에 나가 산원(散員)이 되었다. 그의 처는 송나라 상인 서덕언(徐德彦)의 처였는데, 천인이었지만 재물은 많았다. 즉, 송유인은 돈 많은 과부와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송유인은 백금 40근을 환관에게 뇌물로 주어 3품 관직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문신들과만 교제해 무신들의 미움을 샀다.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자 화가 미칠까 두려웠던 그는 처를 섬으로 내쫓고 정중부(鄭仲夫, 1106∼1179)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후 그는 재상이 되었으며 왕 못지않은 호화 생활을 하였다. 즉, 송유인은 애초에 처가의 돈으로 벼슬을 샀다가 시세가 불리해지자 그녀와 이혼하고 쿠데타 주역의 딸과 재혼해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이다. 그는 장인인 정중부가 경대승에 의해 제거될 때 함께 죽임을 당한다.100) 『고려사』 권128, 열전41, 반역2 정중부 부 송유인. 사위와 장인은 공동 운명체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의 여성은 친족의 힘으로 남편을 출세시킬 수 있는 존재였으며, 또한 친족 때문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을 수도 있는 존재였다. 이것이 처가와 밀접한 고려시대 여성의 빛과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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