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2. 유대의 매개물, 여성의 몸
  • 공납물로서의 몸
  • 2. 영광의 길, 독로화와 환관
권순형

이 시기 남성도 원에 끌려갔다. 인질[독로화(禿魯花), 질자(質子)]과 환관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공녀와 달리 눈물과 한숨의 출국길이 아니었고, 오히려 자발적으로 가거나 심지어는 원에 가기를 열망하기까지 하였다. 예컨대 충렬왕의 소군 서(湑)는 원에 가고자 부원배에게 뇌물을 주고 청하기까지 하였다. 당시 원 조정이 고려를 지배하고 있어, 원에 간다는 것은 곧 원의 지배층과 교류하고 권력에 다가갈 기회를 얻게 됨을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독로화는 왕족이나 귀족층에서 선발되었고, 갈 때 벼슬을 올려주었으며, 원에 들어가 크게 출세하기도 하였다. 아래의 사료를 보자.

(상주 판관으로) 3년을 지나는 동안에 안렴사가 안향의 정치가 청렴함을 칭찬하였으므로 드디어 소환을 받아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 임명되었고 이윽고 전중시사(殿中侍史)로 옮겼다. 또 독로화로 선발되니 관례에 따라서 국자사업(國子司業)으로 승진하였고 그 후 우사의를 지나 좌부승지로 임명되었다. 황제는 그를 정동행성원 외랑으로 임명하였고 좀 있다가 낭중으로 승진시켜 본국(고려)의 유학제거(儒學提擧)로 삼았다.112) 『고려사』 권105, 열전18, 안향.

한사기(韓謝奇)는 관직이 간의대부에까지 이르렀고 아들은 한영(韓永)과 한악(韓渥)이다. 처음에 한사기가 독로화로 되어 가족들을 데리고 원나라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들 한영은 황제의 측근에서 자라나고 인종(仁宗) 황제를 섬겨서 관직이 하남부(河南府) 총관에까지 이르렀다. 한영이 높은 지위에 올랐기 때문에 한사기에게는 한림 직학사 고양현후(高陽縣候)의 관작을 증여하였고 (할아버지인) 한강(康)에게는 첨태상예의원사(僉太常禮儀院事) 고양현백(縣伯)의 관작을 증여하였다.113) 『고려사』 권107, 열전20, 한강.

안향(安珦, 1243∼1306)은 능력있는 관리로서 원에 독로화로 가게 되자 승진하였고, 다시 원에서 벼슬을 받고 유학제거가 되어 이후 고려 성리학의 시조로 추앙받게 된다. 한사기는 독로화로 원에 들어감으로써 그 아들이 황제 곁에서 자라 크게 출세하였다. 이처럼 왕족이나 귀족에게 독로화가 영광의 길이었다면, 서민이 대부분이었던 환관 역시 이에 못지 않은 승진의 길이었다. 환관은 서민이나 천민 출신이다. 처음에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가 아버지인 세조에게 몇 명을 바쳤는데, 이들은 황제 곁에 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고려에 사신으로 와서는 자기 가족의 요역을 면제시키고 친족을 벼슬시켰다. 이에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모방하게 되어 아비는 자식을 고자로 만들고 형은 아우를 고자로 만들었으며, 스스로 거세해 불과 수십 년 동안 그 숫자가 매우 많아졌다 한다.

원의 정치가 문란해짐에 따라 이들의 권력은 더욱 강해져 재상의 직위에 이르고, 그 인아척당(姻啞戚黨)과 제질(弟姪)이 모두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들의 저택과 수레, 의복도 모두 재상의 격식으로 차렸다.114)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고려에서는 원과의 관계에서 이들을 통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들에게 군(君)을 봉하고 작(爵)을 주었다. 이들 중에는 고려의 이익을 위해 애쓴 경우도 있지만, 황제에게 참소해 나라를 모해한 경우가 더 많았다.

방신우(方臣祐, ?∼1343) 망고대(忙古台)는 상주 아전의 아들로 제국공주를 따라 원에 가서 일곱 명의 황제와 두 명의 황태후를 모셨다.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 홍중희(洪重喜)가 충렬왕을 원나라에 무고하자, 그는 수원황태후에게 이것이 무고임을 밝혀 도리어 홍중희를 귀양가게 하였다. 또 원나라가 번왕(藩王) 팔로미사(八驢迷思) 무리를 압록강 동쪽에 이주시키려 하자 고려는 땅이 좁고 산이 많아 농사와 목축할 곳이 없어 북쪽 사람들이 살만한 곳이 못된다며 그가 황제에게 고하여 중지시켰다. 또 고려를 원의 성(省)으로 편입시키려는 논의 역시 그가 수원황태후에게 아뢰어 막았다. 그는 원에서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며 고려에서는 그를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으로 봉하고 추성돈신양절공신(推誠敦信亮節功臣) 칭호를 주었다. 그의 부친은 본래 중모현 아전인데 아들로 인해 상주 목사를 하였다. 그의 매부 박려는 농부로서 벼락출세 해 첨의평리가 되고 그 아들도 벼슬하였다.115)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방신우.

방신우와 같은 환관이 있는가 하면 고려에 해악만 끼친 이들도 있었다. 태백산 무당의 아들이었던 이숙(李淑)은 충선왕을 폐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왕으로 맞아들이려는 음모를 꾸몄다.116)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이숙.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1323)는 상서(尙書) 주면(朱冕)의 노비 출신으로 스스로 거세해 환관이 되었다. 그는 원나라 인종을 동궁 때 섬긴 인연으로 권력을 잡게 되자 많은 불법을 자행하였다. 이에 충선왕이 원나라 태후에게 청하여 매를 치고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주인 에게 돌려주게 하자, 그는 충선왕에 대해 원한을 가졌다. 영종이 즉위한 뒤 그는 갖은 방법으로 참소해, 충선왕을 토번(吐蕃)에 귀양가게 하였다.117) 『고려사』 권122, 열전35, 환자 임백안독고사.

공녀와 독로화, 환관 등은 모두 원에 끌려간 존재였다. 그러나 이처럼 여성인가 남성인가에 따라 그 삶과 위상, 존재 형태가 달라졌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것이 남성에게는 스스로의 선택이며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여성에게는 단지 강요이며 유린일 뿐이었다. 간혹 기황후 같은 예외적인 여성도 있었지만 그녀 역시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차이가 없다. 원 간섭기 여성의 몸은 공납물로서 한층 많은 피해를 당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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