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Ⅰ. 신성에서 세속으로-2 친족 일부로서의 몸
  • 03. 성·신체·재생산
  • 출산은 경쟁력!
  • 2. 귀족
권순형

귀족 여성들에게도 출산은 중요하였다. 가족의 입장에서 여성의 출산은 가문의 혈통을 잇는 행위이며, 특히 왕실이나 귀족들에게는 왕권 및 특권의 유지와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여성 개인에게 있어 출산은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었다. 전근대 시대에 사회 활동을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남편이나 자식을 통해 자신의 성취를 대리 충족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남편이 무능력해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어도 아들이 똑똑해 고위직에 있거나 국가에 공을 세웠으면 그녀는 어머니로서 봉작을 받을 수 있었다. 또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한다면 그녀는 국가로부터 매 년 곡식을 상으로 받을 수도 있었다. 예컨대 설신(薛愼)의 어머니 조씨는 젖꼭지가 네 개 있고 아들 여덟 명을 낳았는데, 그 중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해 국대부인의 벼슬을 받았다.

자손이 많고 복이 많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여성으로 꼽는 것이 권부(權溥) 처 유씨(?∼1344)이다. 그녀는 5남 4녀를 낳아 자손이 모두 잘 되었다. 사위 이제현은 그녀의 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찬미하고 있다.

내외손자와 증손이 백여 명이나 되어 매 년 명절 때 모이면 고위 관리가 타는 수레와 수레를 덮는 양산이 문을 메우고 붉은 빛과 자줏빛의 높은 관복을 입은 사람들이 뜰에 가득 찼다. 때때옷을 입고 앞에서 재롱부 리는 현손까지 있으니 아 성대하도다. 어찌 착한 일을 쌓은 보답이 아니겠는가.143) 김용선, 「권부 처 유씨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 p.896.

이제현은 그녀를 부귀영화를 누리고 자손이 창성하였던 당나라 때의 장군 곽자의에 비교하고 있다. 고려의 귀족들에게도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은 축복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 귀족 여성들은 평생 아이를 몇 명이나 낳았을까? 기존 연구에 의하면 고려의 귀족들은 고려 전기에는 남자 20세, 여자 16세에 혼인하였으며, 고려 후기에는 각각 18세와 14세가 평균 혼인 연령이었다. 어머니를 중심으로 출산 자녀수를 보면 1149년까지 5명, 1199년까지 4.2명, 1200년대 전반 3.7명, 후반 2.8명, 1300년 전반 3.9명, 후반 3.1명으로 고려 전체 평균 3.9명이었다. 1200년대에 자녀수가 적은 것은 무신란 및 몽골과의 전쟁 때문으로 추정된다.144) 김용선, 『고려금석문 연구』, 일조각, 2004, pp.134∼135.

이처럼 고려의 귀족 여성들은 보통 3∼4명의 자식을 낳았는데, 만일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면, 그녀는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자식이 혼인 생활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고, 그녀의 시집에서의 지위는 불안정하였는가? 불교에서 탄생은 고통스러운 윤회 세계의 요소이기 때문에 불임 여성은 덜 멸시되었으며, 임신은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기 여성들은 아이를 낳으면 물론 좋겠지만, 설사 낳지 못하였다 해도 자신의 지위가 흔들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또 아들을 낳지 못해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고려시대에는 친족 구조가 부계 중심이 아니었기에, 혼인 자체가 여자가 남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두 집안의 동등한 결합이었다. 서류부가혼속으로 혼인 뒤에도 여성이 친정에서 부모를 모실 수 있었으며, 종법 의식이 없어 제사는 형제자매가 돌아가면서 지냈다. 또 아들이 없어도 외손으로 대를 이을 수 있었다. 때문에 조선시대처럼 꼭 아들을 얻고자 애쓸 필요는 없었다.

이 시기의 친족 관념을 보여주는 것으로 아래의 사료가 있다.

공의 이름은 문탁이고 자는 인성이며 상당 열성군(현 충청남도 청양) 사람이다. 아버지 순(純)은 급제하였으나 일찍 작고하여 도염승으로 추증되었고, 조부 주좌와 증조 한좌는 모두 현장(縣長) 벼슬을 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열성군부인(悅城郡夫人)으로 추증되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고, 계모 이씨는 원래부터 개경의 관리 자녀였다. 공은 일찍이 □모가 돌아가셨으나 떠돌이가 되지 않고, 17세에 서울로 들어가 학문을 시작하였다. 계모 이씨의 집에서 자라났는데, 어머니가 다른 □인 허정선사 담요와 우애가 깊었다.145) 김용선, 「이문탁 묘지명」,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 p.372.

즉, 이문탁(李文鐸)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재혼을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도 돌아가셨다. 이에 이문탁은 배다른 동생과 함께 계모의 친정에서 자랐다. 이는 부계 중심적인 사고를 하는 오늘날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앞서 보았듯 친족 딸을 양녀로 삼거나 처가에서 양자를 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비부계적인 고려의 친족 구조로 인해 여성들의 아들 출산에 대한 부담감은 매우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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