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1 예와 수신으로 정의된 몸
  • 03. 조선 사회가 여성의 몸을 바라보는 시각
  • 절개를 지키는 몸, 화를 불러일으키는 몸
김언순

가계의 계승을 위한 아들의 출산과 가정 경제 유지를 위한 여공의 강조가 여성의 생산능력의 활용과 관련이 있다면, 직접적으로 몸과 연관해서는 성(性)에 대한 관점을 살펴볼 수 있다. 『예기』는 ‘음식남녀(飮食男女)’를 인간의 큰 욕망으로 보았다.226) 『禮記』 「禮運」, “飮食男女 人之大欲存焉.” 식욕과 성욕[食色]은 끊을 수 없는 강렬한 욕망으로서, 인간의 생존과 존속을 위해 필수적인 본성에 가깝다. 그러나 도를 넘어서면 몸을 해치게 되기 때문에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특히, 절제되지 않은 성욕은 본인은 물론 타인의 파멸을 가져오기도 한다. 따라서 남녀 모두에게 성욕은 수신의 주요 대상이다.

그런데 성욕의 수신에 대해 유교는 남녀에게 이중 잣대를 적용하였다. 남성에게는 계색(戒色)이란 덕목으로 성적 방종을 경계시켰지만, 배우자에 대한 성적 순결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남성은 색을 경계하는 것이 수신의 주요 내용이었으나, 설사 소홀히 하더라도 크게 비난받지 않았다. 심지어 남성의 성적 욕망을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외도의 책임을 여성의 유혹에 돌렸다.

여색을 경계하는 일은 가장 말단의 일이나 심히 어려움이 많다. 이는 반드시 내 스스로 찾는 법이 없어도 저절로 와서 나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므로, 그 마음이 철석같다고 하더라도 어찌 어렵지 않으며, 어찌 평생을 잘못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227) 宋時烈, 『尤庵戒子孫訓』, “戒女色 最末一事 有甚難者 非必自我求之榘 必自來獻笑於此 而必心如鐵石 豈不難哉 豈不誤平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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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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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宋時烈, 1607∼1689)은 여성의 유혹을 떨치는 일은 매우 어렵다는 논리로 남성 외도의 책임을 여성의 불온함에서 찾았다. 한편, 여성의 투기를 자신과 가정을 망치는 제1의 악행으로 비난하였으며, 불투기(不妬忌)를 남편 섬기는 도리로 규정하였다.228) 송시열, 「튀긔지말나도리라」,『우암션계녀서』(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 투기가 남성의 외도에서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여성의 투기를 패가망신시키는 악행으로 문제 삼은 것이다. 남성의 외도와 이로 인한 가정 불화의 원인을 모두 여성에게서 찾은 것은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사고로서, 여성을 불온한 존재로 보는 여화론에 근거하고 있다.

남성에게 여색의 경계를 요구한 반면, 여성에게는 정절과 일부종사(一夫從事)를 요구하였다. 일부종사의 관념은 남편 사후에도 적용되어 여성의 재가(再嫁)를 실절(失節)과 비례로 규정하였다. 여성의 재혼을 실절로 규정한 것은 “왕촉(王蠋)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229) 『小學』 「明倫」, “王蠋曰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말에 근거한다. 그런데 충신의 경우 생전의 임금을 바꾸지 않는데 국한해 사용된 반면, 일부종사의 개념은 남편 사후까지 적용해 재혼을 비례로 본 것이다. 여성이 재혼하는 것을 실절로 규정한 반면, 남성의 재혼은 실절로 보지 않았다. 다만, 혼인 횟수와 관계없이 재가녀와 혼인할 때는 실절로 간주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도리상 과부를 취하는 것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였다.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그렇다. 무릇 아내를 취하는 것은 자신의 배우자를 삼는 것이니, 만일 절개를 잃는 자를 배우자로 삼으면 자기 자신도 절개를 잃는 것[失節]이 된다.”고 하였다. 또 묻기를, 외로운 과부가 빈궁하고 의탁할 곳이 없는 경우 재가해도 좋습니까?라고 하자, 답하길, “단지 후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을까 두려워해서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굶어죽는 일은 지극히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일은 지극히 큰일이다.”고 하였다.”230) 『小學』 「嘉言」, “或問 孀婦於理 似不可取 如何 伊川先生曰 然 凡取以配身也 若取失節者 以配身 是己失節也 又問 或有孤孀 貧窮無託者 可再嫁否 曰 只是後世 怕寒餓死 故有是說 然 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

이 글은 여성의 재혼(改嫁)을 실절(失節)로 규정하고, 절개를 지키는 일이 목숨보다 소중한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담론의 원천이다. 재가녀와의 혼인을 실절로 규정한 것은 여성의 재혼을 불온시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정이천에 의해 여성의 정절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절대적 가치가 되었으며, 조선 사회는 이 담론을 재생산하였다. 반면, 남성은 정절의 의무가 없으며, 여색을 경계하되 외도하더라도 그 책임은 유혹한 여성에게 있으며, 재가녀와 혼인하지 않으면 실절을 피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여성에게 정절은 매우 중요한 수신의 내용이었다. 정절의 강조는 국가가 앞장서 주도하였으며, 제도적으로 여성의 재가를 금지하고 열녀를 장려하였다. 성종 8년(1477)에 재가녀 자손의 관직 진출을 제한하는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이 만들어져, 여성의 재혼에 현실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재혼은 여성 자신의 절개를 훼손하는 실절일 뿐만 아니라, 남편을 실절시키고, 자식의 앞길도 막는 화(禍)이고 비례였다.

그러므로 일부종사의 예에 따라 남편이 죽은 후 수절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재가와 실절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자결을 하기도 하였다. 즉, 자결은 비례를 행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매우 적극적인 수신의 방법이었다. 조선 사회는 이런 여성을 열녀라고 극찬하고, 적극 권장하였다.

유향의 『열녀전』을 수정 보완한 『고금열녀전(古今列女傳)』이 태종 4년(1404)에 도입된 사실을 볼 때, 지배 집단에서는 유교적 여성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인지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30년 후인 세종 16년(1434)에 충신, 효자, 열녀의 사례를 모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편찬되었다.231) 조선이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펴낸 여성용 교화서는 『삼강행실도』 열녀편이다. 『삼강행실도』 가운데 대중 교화를 위해 가장 먼저 번역(1481)한 것도 열녀편이다. 『삼강행실도』는 몇 차례 수정 보완되었는데, 중종 9년(1514)에 『속삼강행실도』가 간행되었으며,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사례만을 모아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를 편찬하였다. 『열녀전』에 실린 여러 여성상[烈女] 가운데 국가 차원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열녀였다.232) “열녀는 고려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존재하였던 것은 ‘節婦’였다. 고려시대에 ‘수절’은 여성에게만 강요된 윤리가 아니었다. 여성의 재가, 삼가가 얼마든지 허락되는 상황에서 절부는 여성 자신의 선택이었지, 도덕적·법적 강제사항이 아니었다. 배우자 사망시 수절하는 여성을 가리켜 ‘절부’, 남성을 ‘義夫’라고 하였다. 여말선초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한동안 효자·순손·절부·의부를 한 묶음으로 하는 표창을 계속하다가 『경국대전』에 와서 ‘의부’를 삭제함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오로지 여성의 윤리로 강제하였다. 가부장제는 남성에 대한 성적 종속성을, 여성이 자신의 신체 일부 혹은 전부를 스스로 희생하게 하면서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을 실천한 여성이 곧 열녀였다. 열녀는 고려 말까지 존재하지 않았고, 여말선초의 사대부들이 ‘만든’ 것이었다. 다만, 열녀는 곧 탄생하지 않았고, 2세기를 지나 17세기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건국 후 2백년은 열녀를 만들기 위한 시간이었다(강명관,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pp.46∼47). 『삼강행실도』는 조선 전 시기에 걸쳐 편찬되었으며, 국가 차원에서 열녀를 정표(旌表)하였다. 또한, 사대부들도 열녀전(烈女傳)을 지어 열녀를 예를 아는 여성으로 칭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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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홍문(紅門) 정려문(旌閭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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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과 열녀의 강조는 여성의 몸에 대한 조선의 사회적 인식을 보여준다. 기본적으로 여성의 몸은 남성을 유혹하고 사회 질서를 교란시킬 수 있는 불온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정절의 강조는 여성의 몸이 초래할 위험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있다. 또한, 여성의 성을 남편 가문에 귀속된 것으로 본다. 여성의 몸이 남편의 가문에 의해 관리될 때, 여성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자신의 가치를 최대한 인정받을 수 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해 정절을 지키지 못할 때, 여성은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다. 여성의 음란함은 칠거지악에 속한다.

반면 남성은 아내 외에 첩을 두거나 외도를 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절의 의무는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요구된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봉인하고 무욕의 상태로 지내는 것이 예이며, 여성의 성적 매력은 철저히 단속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맥 락에서 남성의 성은 수신의 대상이 된 반면, 여성의 성은 억압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여성의 정절을 강조한 이유는 여성의 출산 능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부계 혈통의 순수성을 보장하고 가부장제 질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열녀의 강조는 정절의 의미를 자발적 수신이 아닌 타율적 수신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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