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1 예와 수신으로 정의된 몸
  • 04. 조선의 예교적 여성
  • 열녀
김언순

열녀는 조선초부터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보급과 정표정책을 통해 국가적으로 장려되었다. 열녀의 의미가 처음에는 남편이 죽은 후 개가하지 않는 여성을 가리켰으나, 점차 정절을 지키기 위해 신체를 훼손하거나 자결하는 여성을 의미하게 되었다.236) 이혜순·김경미, 『한국의 열녀전』, 월인, 2002. 조선 후기로 갈수록 죽은 남편을 좇아 자결(從死 또는 下從)하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수절은 열녀에서 제외되었다.

열녀는 ① 남편이 죽은 후 개가(改嫁)하지 않음 ② 남편이 죽은 후 따라 죽음 ③ 남편을 대신해 죽음 ④ 강간에 저항하다 살해되거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또는 수치심으로 자결 ⑤ 남편의 원수를 갚고 자결 ⑥ 개가를 피하거나 정절을 입증하기 위해 자결 ⑦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내는 등 신체를 훼손하는 유형으로 나뉜다.

그런데 죽음으로 열녀가 되는 것은 유교가 본래 권장하였던 여성상이 아니었다.237) 강명관은 조선의 열녀를 사대부들이 ‘발명’한 것으로 평가하였지만, 명청대에도 열녀가 급증하였다. 田汝康은 명․청대에 열녀가 급증한 이유를 여성의 자발성 외에 과거 시험에서 좌절한 남성들에 의해 부추겨졌음을 지적하였다(강명관, 앞의 책, 2009, pp.46∼47 ; 田汝康 지음, 이재정 옮김,『공자의 이름으로 죽은 여인들』, 예문서원, 1999).

옛 경전에 보이는 부인, 예컨대 위(衛)의 공강(共姜), 노(魯)의 공보문백의 어머니와 같은 경우는 모두 수절을 의로 여겼다. 공자는 부인의 삼종지의(三從之義)를 논하여,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좇는다’라 하였고, 또 『역』의 전(傳)을 지어 ‘부인은 한 사람을 따르다 죽는다[婦人從一而終]’라고 한 것은 역시 수절을 아름다움으로 여긴 것이고, 일찍이 하종(下從)의 열녀 됨을 말한 것은 없다. 그런데 점차 근세로 와서 풍절(風節)이 더욱 빛나고 우리나라의 풍속은 부인의 열행이 더욱 정신(貞信)하여 하종을 제일로 치니, 대개 옛 정부(貞婦)에게는 있지 아니하던 바이고, 성인께서도 논하지 않았던 바이다. 절행은 하종에 이르면 더 할 것이 없다. 하종하는 사람들은 대개 의리와 마음에 편안하였던 것이니, 어찌 후세의 이름을 바라서이겠는가.”238) 成海應, 「爲麻田士人請褒烈婦金氏狀」, 『硏經齋全集』 1, 『한국문집총간』 273, pp.371∼372 : 강명관, 『열녀의 탄생』, 돌베개, 2009, p.494 재인용.

열녀가 되기 위해 신체를 훼손하고 자결하는 것은 유교의 다른 가치와 충돌한다. 조선에서는 여성이 정절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거나, 남편을 살리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斷指] 허벅지의 살을 베어내는 것[割股]이 여성이 실천해야 할 도덕적 행위, 예를 아는 행위로 권장되었고, 많은 여성들이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자결과 단지 및 할고는 부모가 물려준 신체를 훼손하는 불효이며, 시부모에 대한 봉양을 포기하는 것 역시 불효에 해당한다.

또한, 어머니로서 자식의 양육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는 것이다. 간혹 시부모 봉양과 자식 양육을 위해 남편 사후 곧바로 따라 죽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이러한 책임을 마쳤다고 생각하였을 때 자결을 함으로써 종사의 예를 실천하는 사례도 있다. 이와 같이 다른 윤리와 상충하는데도 열녀가 급증한 것은 열(烈)이 유교의 다른 가치를 압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을 겪은 뒤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7)에는 신라 4명, 고려 23명, 조선 76명의 열녀가 수록되었는데, 거의 대부분이 전시 상황에서 강간을 피하기 위해 절벽 아래로 혹은 강으로 투신하거나, 적에게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사례이다. 전쟁의 와중에 빈번하게 발생하는 강간의 위협에 대해 여성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국가는 이런 여성에게 정문(旌門)을 내리고, 모범으로 삼았다. 이렇게 열녀를 국가가 표창하고, 출판을 통해 널리 알린 것은 국가 차원에서 정절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열녀를 조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도 열녀전(烈女傳)을 지어 열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조선 여성 스스로 열녀를 예로서 내면화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남편이 죽거나 정절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결은 여성이 취해야 할 도리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었다. 김기화의 처 풍양 조씨(1772∼1815)는 남편이 긴 병을 앓자 살을 베어 피를 먹이고자 하였으며, 남편의 죽음을 앞두고 자결을 고민하기도 하였다. 끝내 수절을 택하였지만, 조씨의 이러한 행동은 열녀의 전형이 내면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열녀는 수신의 결과였던 것이다.239) 김경미, 「기억으로 자기의 역사를 새긴 보통 여성, 풍양 조씨」,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하였던』, 돌베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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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씨추암(權氏墜巖), 『동국신속삼강행실도』
권씨추암(權氏墜巖), 『동국신속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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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의 증가는 조선 여성의 수신이 보편적 윤리의 관점 보다는 남편에 대한 충절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여성의 몸은 성인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순종과 충절을 입증하기 위해, 그리고 정절이라는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도구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한다.

열녀에 내포된 가치는 바로 종(從)이다. 삼종지도로 집약되는 종은 여성이 따라야 할 절대적 가치로서, 살아서 실천하는 것이었다면, 남편 사후 여성의 선택은 수절과 종사로 귀결되었다. 종은 여성의 삶과 죽음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가치로 작용하였다.

종을 수신의 최고 가치로 삼을 때, 수신의 결과 역시 주체적 인간과는 거리가 먼 종적 인간이 된다. 열녀는 왜곡된 수신관으로서, 조선 여성이 몸의 수신을 통해 구현한 것은 성인과는 거리가 먼 자기 소외였다. 하지만 열녀는 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하나의 방법이었기 때문에 조선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열녀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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