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2 출산하는 몸
  • 03. 출산과 산후병
  • 각종 산전 산후병
이순구

1774년 7월 28일 노상추(1746∼1829)는 한양에서 편지를 받고 경악한다.257) 『노상추일기』 1777년 7월 28일. 『노상추일기』는 조선 후기 무관인 노상추가 68년간 쓴 일기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2005년∼2006년에 총 4권으로 탈초하여 간행하였다. 며칠 전 부인이 산후증으로 아이 낳은 지 7일 만에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노상추는 “30도 안 돼서 부인을 두 번이나 잃다니”라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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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추일기』
『노상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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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노상추는 이전에도 부인을 잃은 적이 있다는 얘기다. 10년 전인 1764년 10월 9일 첫 번째 부인 손씨는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아들을 낳았다고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3∼4일 후부터 부인에게 발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열이 올랐다 내렸다 하였다. 이후 증세는 점점 심해져 심신 불안증을 보이고 황당한 말을 하는가 하면 때때로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병세가 아주 극심해지자 부인은 거의 거동을 못하고 또 먹지도 못하였다. 결국 부인은 장인이 보낸 가마를 타고 친정으로 갔다. 그러나 친정으로 간지 며칠 되지 않아 부인은 죽었다. 출산한 지 49일 만이었다. 남편이 보고 쓴 부인의 병세라서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아팠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발열 증상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출산으로 인한 염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거동을 못하였다는 것은 하혈 등의 증상도 동반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전형적인 산후증에 의한 사망으로 보인다.

이렇게 첫 번째 부인을 잃은 경험이 있는 노상추로서는 또 부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0년 만에 부인을 두 번 잃는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었다.

노상추가 두 부인을 모두 산후 조리 중에 잃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근대시기 젊은 여성들의 사망률과 출산과의 관련성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노상추는 세 번 째 혼인까지 하게 된다. 이를 통해 본다면 조선에서는 양반 남자가 세 번 혼인한 경우에는 대개 부인들이 산전 산후증으로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생각된다. 앞에서 말한 권상일도 세 번 혼인하였는데, 그 부인들의 사망도 출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권상일의 첫 번째 부인의 사망 원인은 구토와 발열 증세였다.

“지난 달 초 아내가 병을 얻었는데, 토하고 춥고 더운 증세가 반복되며 조금 덜하였다가 또 더하였다가 하니 민망하여 말을 할 수가 없 다. 이 증상은 바로 임신 증후인데, 어찌된 것인가?” 권상일과 부인은 이 병을 임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병을 얻은 지 두 어 달 만에 부인은 죽고 만다. 이 병이 임신에 의한 것이었는지 단언할 수는 없으나 권상일 자신이 임신 증세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연관이 있어 보인다.

두 번째 부인은 출산 후 2년 후에 사망하기는 하였지만, 역시 부인병 증세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간이 좀 되긴 하였지만 출산 후유증이 아니었을까 한다. 권상일의 표현에 의하면 배가 차갑고[冷腹之痛], 또 뱃속에 뭔가 덩어리가 만져졌다고 한다. 이 덩어리는 이른바 혈괴라고 하는 것이 배출되지 못하고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동의보감』이나 여타의 기록들에서는 출산 후 여자들의 혈괴가 자주 문제가 된다.

약방이 아뢰기를 “의녀의 말에 의하면 세자빈께 갱탕을 계속 올렸고 기후가 처음처럼 평안하시나, 다만 뱃속에 편치 않은 기운이 있다고 합니다. 의관 등은 모두 산후에 으레 있는 증상으로 남은 피가 모두 흩어지지 못해서 생긴 현상으로 봅니다. 복숭아씨 가루와 홍화씨 술을 조금 넣어서 궁귀탕을 만들어 계속 드시면 뱃속이 평상과 같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 지어 올릴 것을 감히 아룁니다.”고 하였다.

봉림대군의 부인이 세자빈이 되고나서 출산할 때의 일이다. 의관들이 세자빈의 뱃속이 편치 않은 것을 염려하여 궁귀탕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이틀 후 어의들은 또 다른 논의를 하게 됐다. 의녀들의 말에 의하면 세자빈이 출산 전에 뱃속에 작은 덩어리가 있었고 이번 출산으로 그것이 매우 커졌다는 것이다. 어의들은 이 덩어리가 이전 출산 때 피가 흩어지지 못하고 남아 혈괴를 형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혈괴를 파괴할 약재에 대해 논의하였다. 결국 궁귀탕에 삼릉(三稜) 등을 더해서 치료하기로 하였고, 이후 세자빈의 증세는 호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일 이 세자빈의 경우와 달리 혈괴를 끝내 제거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후에라도 혈괴가 자연 소멸되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될까? 권상일 부인의 경우 출산 당시의 혈괴가 소멸되지 않고 하나의 덩어리로 남았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부인으로서 뱃속이 차고 덩어리가 있었다고 하면 부인병일 확률이 높다. 오늘날의 ‘자궁 근종’이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또 부인은 최초 발병 후 7개월이 지나서 사망하였는데, 병의 진전 속도도 부인과적 질병 확률을 높인다고 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 나와 있는 각종 산후 대처 약초들은 대개 출산 시 문제가 되는 혈(血)을 다스리는 것이 많다.

“해산 후 궂은 피[敗血]가 심(心)에 들어가 헛것이 보인다고 날치는 것을 치료한다.” “해산 후 혈가(血瘕)로 배가 아픈 것을 치료한다.” “태루(胎漏)로 하혈이 멎지 않아 태아가 마르면 곧 생지황즙 1되와 술 5홉을 섞어서 세 번 또는 다섯 번 끓어오르게 달여 두세 번에 나누어 먹는다.” “해산 후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갈증이 나는 것을 치료한다.” “또는 혈허(血虛)로 배가 아픈 것을 치료한다.” “해산 후 혈훈으로 이를 악물고 까무러쳤을 때에는 홍화 40g을 술 두 잔에 넣고 달여 한 잔이 되었을 때 두 번에 나누어 먹이면 곧 효과가 난다.”258) 『동의보감』 잡병편 권11, 부인조에서 각종 산후증에 대해 처방한 것에서 볼 수 있다.

혈을 다스리는 것에 주의하는 이유는 일차적으로 하혈 등과 같이 피를 많이 흘려 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미 필요 없게 된 피, 즉 ‘궂은 피’가 배출되지 못하고 남아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몸에서 피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어떤 것에도 우선한다. 따라서 혈을 다스리는 것은 중요하였고 조 선의 의관들이 혈괴에 신경을 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유종(乳腫)도 혈 문제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역시 주의해야 할 중요한 산전산후병의 하나였다. 노상추는 첩 석벽의 유종 때문에 매우 고생을 하였다. 노상추가 삼수갑산에 파견 나가 있을 때, 당시 수청기였던 석벽이 노상추의 아이를 낳으면서 겪은 일이다.

“석벽의 유종 증세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음식을 전혀 먹지 않고 해산도 못하고 있으니 생사가 염려된다.” 1789년 5월 21일의 『노상추일기』의 내용이다. 유종 때문에 생사가 걱정될 정도라는 것이다.

20여 일이 지나 윤5월 11일 드디어 석벽의 유종이 곪아 터졌다. 그러나 이때에도 산달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해산은 하지 못하였다. 노상추는 몹시 걱정하였다. 유종이 터진 후 7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석벽은 해산을 하였다. 해산 자체는 비교적 순조로웠으나 그래도 노상추의 노심초사는 끝나지 않았다. 특히, 아이에게 젖을 물릴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보다 못한 노상추는 석벽을 장모에게 두고 아이만 자신의 거처로 데려와 이웃집 부인에게 맡겼다. 모든 노력을 다해 석벽을 돌봤던 것이다.

“중궁전의 유즙이 꽉 막혀 통하지 않으니 유방이 팽창해서 불안한 상태에 있습니다. 지금 치료하지 않으면 변증이 생길까 우려됩니다. 침수도 편치 않다고 하십니다.” 숙종 16년 장희빈이 유종으로 고생할 때 얘기이다. 의관들은 유종이 번열 증세를 동반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즉, 곪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곪으면 열이 나고 열은 어떤 경우든 심하면 신체에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유종이 석벽의 경우처럼 심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발열 증세를 보이면 유종도 만만치 않은 산후증이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일반적인 산후증으로는 변비, 부종 등이 있는데, 이 경우는 생사와 직접 관련되지는 않지만, 산모 자신에게는 적지 않은 고통이었다. 특히, 변비의 경우는 두통까지 동반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렇게 출산이 힘든 일이었지만,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바랐다. 근대 이전의 여성에게 있어서 임신과 출산은 다른 어떤 능력보다도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여성들에게 고유한 능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의 생식 능력없이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성의 그것에 비해 여성의 출산은 기간이 오래고 또 가시적이기 때문에 더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시기 여성들은 출산을 하는 어머니라는 위치로 인해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다. 가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후손을 계속 생산해 내기 위해서는 출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남자들은 이를 인정하였던 것이다. 여성들은 이러한 상황을 잘 인식하였고 따라서 임신과 출산을 자신들의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결과적으로 여러 가지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그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만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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