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Ⅱ. 유순한 몸, 저항하는 몸-4 여성의 외모와 치장
  • 01. ‘미인박명’에 담긴 이데올로기
정해은

‘가인박명(佳人薄命)’, 동양에서 ‘미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 말은 북송(北宋)의 문장가 소식(蘇軾, 1036∼1101)이 지은 <박명가인시(薄命佳人詩)>의 한 구절에서 유래한다.

그 한 구절이란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기구한 운명 많으니(自古佳人多薄命)”라는 짧은 소절이다. 아름다운 여인일수록 운명이 순탄치 않다는 이 구절은 아름다움이 여성에게 재앙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아름다운 여인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담고 있어 미인에 대한 사회 전반의 우려어린 시선을 대변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미인이 사회적으로 위험시되고 부정적인 존재로 자리 잡은 것은 아름다운 여성이란 남성을 유혹으로 이끌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예컨대, “요사하고 음란한 미인이 정치하는 데 유해한 점은 역대로 지나간 일을 고증해 보면 그 때문에 나라를 망하게 하고 가산을 탕진한 자가 많습니다.”라는329) 『세종실록』 권62, 세종 15년 12월 계축. 발언처럼 미인이란 나라와 가정을 흔드는 위험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부용(婦容)’이라 하여 여성의 용모에 대한 기준을 마련하였다. 후한 때 반소(班昭)는 『여계(女誡)』에서 여성의 실천 사항으로서 부덕(婦德)·부언(婦言)·부용(婦容)·부공(婦功) 네 가지를 주창하였는데, 부용이란 “세수를 깨끗이 하고 의복을 정결하게 하며 정기적으로 목욕을 하여 몸에 때를 없게 하는 것”이었다.330) 班昭, 『女誡』 제3 敬順(이숙인 역주, 『여사서』, 여이연, 2003, pp.37∼38).

당나라의 여성 학자 송약소(宋若昭)도 『여논어(女論語)』에서 “여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을 바로 세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자신을 바로 세우는 방법은 오직 깨끗하고 올곧게 처신하는 것이다. 깨끗하다는 것은 몸을 청결하게 하는 일이요, 올곧다는 것은 몸을 영예롭게 하는 일이다.”고 하였다.331) 송약소, 『여논어』 제1 立身(이숙인 역주, 앞의 책, pp.57∼58). 이숙인 선생은 송약소의 경우 「수절」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절이고 그 다음은 청정이다”고 언급한 점을 들어 수절과 청정을 같은 개념으로 인지하고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곧, 여성에게 청결을 강조하면서 올곧은 수신(修身)의 길로 나아가도록 권장하였던 것이다.

여성에게 청결을 강조한 이 조항은 이후 여성의 용모를 이야기할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내용으로 각종 여훈서나 경전에서 계속 강조되었고 조선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혜왕후 한씨(韓氏, 1437∼1504)는 “여성의 용모란 반드시 얼굴이 아름답고 고운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먼지와 때를 씻고 의복이나 치장을 청결히 하며 수시로 목욕하여 몸을 더럽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았다.332) 소혜왕후, 육완정 역주, 『내훈』, 열화당, 1984, pp.30∼31. 곧, 여성의 용모란 외모가 아닌 청결에서 나온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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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도 “부인이 단정하고 정결함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얼굴을 화장하여 남편을 기쁘게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면서 화장하고 예쁘게 옷 입는 여성을 부덕을 갖추지 못한 여성으로 평가하였다.333) 이덕무, 『士小節』 「婦儀」.

근대 초기 서양의 신체관은 상이한 두 가지 태도가 공존하였다. 하나는 약점과 욕망의 근원으로서의 인간 육체에 대한 불신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나체가 재발견되고 육체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태도였다.

그런 반면에 유학에서 몸이란 내면의 발현체로서 예와 선(善)을 실 천하는 주체이자 수신(修身)의 대상으로서 중시되었다. 여성의 몸이 마음의 투영체로서 중시되다보니 청결과 예의바른 몸가짐이 강조되었고, 여성의 몸짓, 자세, 동작 등을 통해 조신있는 동작을 훈련하도록 권장하였다. 그 결과 “여자는 외모를 자랑하지 말고 덕에 기준하여 행동해야 한다. 무염(無鹽)은 외모는 비록 초라하였지만 그 말이 제나라에 수용되어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였다.”는334) 仁孝文皇后, 『내훈』 제3 愼言(이숙인 역주, 앞의 책, p.129). 무염은 춘추시대 제나라 宣王의 왕비가 되었던 추녀 鍾離春을 지칭한다. 말처럼 용모가 아닌 행동거지를 여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활용하였다.

여성의 용모에 대한 담론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규범서를 통해 교육되고 전달되었다. 조선 후기 한글로 쓰인 어느 규범서를 보면, “여성의 용모란 부인의 거동이니 타고난[天生] 추악한 얼굴을 변하여 곱거나 아름답게[艶美] 하지는 못하나 마땅히 얼굴 가지기를 조용히 하고 의복을 정제히 입고 말씀을 드물게 하고 앉으면 서기를 공순하게 하고 걸음을 찬찬히 걸으며 자리가 바르지 아니하면 앉지 아니하고 벤 것이 바르지 아니하거든 먹지 아니하며 의복을 차리지 말고 추위에 얼지 아니할 만큼 입고 음식을 너무 사치하기 말라.”고 되어 있다.335) 『규범』(성병희, 『민간계녀서』, 형설출판사, 1980, p.101). 곧, 여성의 용모란 겉모습이 아니라 정갈한 옷차림과 예의바른 태도에 달려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미인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더라, 천하에 어떤 경국지색도 덕성기품을 당하지는 못해.” 최명희씨의 소설 『혼불』(1990)에 나오는 이 한 토막의 대화처럼 조선의 여성은 덕성 있는 행실을 갖추었을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여성으로 추앙받았다. 여기에는 여성의 덕행이 안정망으로 작용해 미모로 남성을 파멸로 빠뜨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과 믿음이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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