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4. 전쟁에 동원된 몸
  • 종군 간호부
신영숙

종군 간호부는 일종의 전문직에 해당하는 군속이다. 그들은 일본 군의부 소속 육군 병원과 그 산하 야전 병원, 위생 병원, 위생대 등에 파견되어 군의 환자를 돌보았다. 후방의 육군 병원에는 병참 병원, 야전 예비 병원(간호부), 야전 병원(위생병) 등이 포진하고 있다. 그밖에도 전장에는 환자 요양소나 수용소 등이 수시로 세워졌다. 그 사이를 병원선이 오가며 환자, 의약품, 간호부 등을 수송하였다. 종군 간호부들은 이렇게 전선을 오가며 말 그대로 몸이 부서지도록 부상병을 치료, 간호하여야 하였다.

종군 간호부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 적십자사의 구호 간호부와 육해군이 직접 모집한 간호부로 크게 둘로 나뉜다. 이들은 흔히 일본 적십자사 구호 간호부(일적)와, 일반 육군 간호부(육간)로, 그 안에 다시 특지 간호부, 속성 간호부, 임시 간호부, 징용 간호부, 보조 간호부, 간호부 조수 등 다양한 형태의 이름으로 존재하였다.

전쟁 말기에는 일반 여자 군속이나 ‘위안부’ 여성도 간혹 간호부로 차용되어 간호뿐 아니라 빨래, 환자와 물자 운반 등 군대 내 각종 잡업에 가차없이 시달렸다. 전쟁이란 특수 상황과 일본 천황제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관 등으로 젠더 인식이나 여성 몸의 내적 차이에 대한 생각 등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국가와 사회에 봉 사하는 ‘군국의 어머니’의 몸으로 미화, 총체적으로 이용당하였으며, 그에 따른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간호부는 항상 부족하기만 하였다. 정식으로 교육을 받은 구호 간호부, 이를 테면 정규직 간호부들조차 자신의 긍지에 버금가는 몸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때로는 군 장교 등에 의한 성폭력 등 불법 행위에 노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어떤 간호부들은 늙은 장군에게 수혈까지 해주면서, 자신의 소중한 몸의 일부를 내주어야 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동원된 간호부도 적십자사를 통해 간 경우와 육해군의 모집에 의해 동원된 간호부들이 있다. 식민지 여성으로 동원돼 간 과정은 다양할 수 있으나, 대체로 빈곤층 여성으로 성적 대상이지만 ‘백의의 천사’로 호명되어 동원, 희생되어 간 것이다. 1938년 시작된 조선인 종군 간호부는 전시 간호학교의 확충을 기하고 1940년부터는 간호학교를 지정하여, 무시험으로 면허를 취득케 하면서 늘어갔다. 평양 해군공제조합병원 부속 간호부 산파양성소를 비롯하여, 1944년 인천 육군 조병창 육군병원 간호부양성소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곳이 새로 지정을 받아 종군 간호부 양성에 힘썼다. 1944년 7월에는 ‘자급자전 태세 확립’의 물적 인적 전력 증강에 혈안이 되어 교육 전반에 학도 전시 동원 체제로 돌입하고, 일반 여학생에게도 간호 교육을 실시하였다. 간호부 면허 발급 연령도 16세까지 낮추어 전쟁 동원에 급급하였다.

종군 간호부들은 일정한 교육을 받은 자로 현지 채용되었거나, 입대 후 간호 교육을 수 개월 이상 받은 경우도 있다. 황씨는 동원령에 의해 당시 학생들이 군복 만드는 공장이나 비행장 등에 동원되는 가운데 간호 교육에 응한 후 속성 간호부가 되었다. 소씨는 당시 주소지인 중국 상해에서 중학교 졸업 후 44년 4월 간호부로 입대하고, 병원 근무 중 병사하였다. 1945년 5월 급성 신장염으로 병사한 그녀는 견습 간호부로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현지 채 용 후 견습 간호부 수업 중 전신 권태, 설사 등으로, 또한 심신의 과로와 영양 부족 등 저항력 약화가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이라 한다. 조선 간호부는 일본 간호부의 조수로 더 열악한 상황에 내몰려 차별과 억압을 받아야 하였다.

<표> 종군 간호부
  기간 장소 자료상신분 교육 비고[자료]
반씨 42. 1- 45. 12 대만 육군병원, 필라핀 병참병원 적십자 구호반 경북여고, 서울적십자병원 부로명표
황씨 43. 10-45. 9 만주국 봉천육군병원 간호부 생도 (속성간호부) 대련고등중학교, 흥성간호부양성소 루스명부
전씨 43.12-45. 5 동만총생
훈춘[理春]현립병원
육군간호부 (임시) 편입 1년 후
월급 발령
푸스명부
소씨 44. 4.-45. 5 상해 남시육군병원, 중지(상해) 제173병참병원 견습간호부 용인(군속) 상해에서
중학교 졸업
피징용사망 자연명부
✽출처 : 위원회 자료와 황 모 씨 면담(2009. 8. 13 자택), 전 모 씨 면담(2009. 10. 12 자택) 자료
✽반씨는 2010년 봄에 별세

1941년 이후 급증한 ‘육간’ 안에는 명목상 용인(임시공) 등도 포함되었지만, 그들은 부대 안에서 군인, 남성 군속들과의 차별은 물론 전후에도 끝내 은급(원호) 대상에서도 배제되어 그들의 몸값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특히, 전장에서는 질병조차 전쟁 부상, 전염병 등과 성병을 구분하였는데, 간호부의 질병은 공적 상해와 사적 부주의 사이에서 애매하게 취급되곤 하였다. 병균이 과연 남녀의 몸에 다르게 침투하는가 하는 웃지 못할 질문을 던져 보게 한다. 결국 여성은 간호부이든 ‘위안부’이든 국가로부터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언제나 전시 체제의 남성 군인에 예속되었으며, 식민지 조선 여성의 민족적, 성적 차별은 가중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종군 간호부의 몸이란 첫째, 군인과 간호부 사이의 간호와 위안의 성적 대상이었으며, 둘째, 구호반 간호부들은 애국 을 위한 희생 정신의 담지자로, 직접 전쟁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 부대의 원천이었다. 당시 ‘일본 여성의 진수’란 미명은 포대 재료의 재생 공작, 세탁, 소독, 재활용 등 물자 절약과 검약 실천하는 여성들의 희생 정신의 허명(또는 호명)에 다름 아니었다. 끝으로 이들 대부분은 미혼의 딸로서, 단지 여성의 몸은 효녀 또는 가족애의 표상이었으며, 가부장적 황군 체제의 최우선으로 희생된 제물 그 자체이었던 것이다.

어떤 식으로 미화한다 해도 전쟁에 동원된 여성은 그 정신 세계, 또는 인격과는 전혀 무관한 여성의 몸에 불과하였으며, 여성에 대한 당시 사회적 인식이 그러하였기에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야만적인 과중한 노동에 혹사당하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해, 또는 자신의 몸을 구제하고 자신을 성취하려는 욕구와 의식을 가지고 그 방법을 모색, 실현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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