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4. 전쟁에 동원된 몸
  • 여자정신대
신영숙

여성의 몸에 가해진 노동력 수탈은 일제의 만주 점령 이후 1937년 중·일전쟁, 1941년의 태평양전쟁이라는 전시 체제에서 한층 강화되어 갔다. 예컨대 근로보국대, 여자추진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여성을 광범위하게 동원한 것은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된 이후이며, 1940년대에 들어 여자근로정신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421) 정진성, 여순주, 「일제시기 여자근로정신대의 실상」,『한일간의 청산 과제』, 아세아문화사, 1997. 아래 내용은 주로 이 글을 참고한 것이다. 그밖에도 山下英愛, 『ナショナリズムの狹間から』, 明石書店, 2008 참고.

국가총동원법에 근거하여 국민직업능력신고령(1939), 직업소개소령(1940) 등의 법령이 공포되고, 국민 16세 이상 50세 미만 남성의 등록 규정이 1944년에는 12세 이상 60세 미만으로 확장되었다. 1938년부터 시작된 근로보국대의 편성에 애국반이 중요한 조직으 로, 근로보국대에 여성도 포함되었다. 즉, 1938년 6월 ‘학도 근로보국대 실시 요강’에 남학생은 토목 공사에, 여학생은 신사 청소와 군용품 봉제 작업에 동원되도록 명기되었다.

이에 따라 1938년 경기도에서만 32개교의 약 6천명 학생이 하루 6시간씩 10일 간 작업하고, 1940년 7월 경기도의 여학교 19개교, 4천명이 근로보국대로 조직되었다. 25세 미만 미혼 여성을 근로보국대에 참여케 하는 ‘근로보국령’은 1944년에만 192만 5천명 이상을 동원하였는데, 거기에는 학생 이외 많은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학교 자체 내의 공장화와 외부 공장 근무 등으로 동원되었는데, 여학생은 그밖에도 위문문 쓰기, 위문대 만들기, 군복 빨기 등을 강요당하였고, 여자추진대는 관(官) 알선 형식으로 장려되었다. 지방 연맹에서는 20, 30대 초등학교 졸업 이상의 여성을 선발하여 읍, 면 단위로 여자추진대가 편성되었다. 1944년 4월에는 전 조선 여성을 대상으로 여자특별연성소가 설립되기 시작하여 경기도에만 250여 개소나 설립되었다.

‘정신대’란 일제가 제국주의 전쟁에 필요한 인력 동원 정책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일본인은 누구나 일본 국가에 말 그대로 ‘몸을 바친다’는 뜻의 제도상의 용어이다. 특히, 식민지 조선 여성에게는 1944년 8월 ‘여자근로정신령’을 제정함으로써 이전부터 자행된 당시 여성들의 강제 동원을 합법화시켰다. 어쨌든 여자근로정신대는 여학교나 마을 등을 중심으로 일단 지원자를 차출, 일본 등지로 끌려간 여성들을 일컫는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처녀 공출’이란 말도 정신대가 일반적으로 이뤄졌음을 반증한다.

1944년 8월 여자근로정신령이 일본에서 공포되고, 조선에서도 실시될 것이라는 발표에 앞서 이미 1943년 11월 잡지 『조광』에 “여자근로정신대는 학교의 신규 졸업자, 동창 회원 등이 자주적으 로 결성하고, 학교장과 학교 선배가 지도한다. 이 정신대는 학교 졸업 후 시집가기까지의 동안을 국가를 위해 바치겠다는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1943년 9월 이전부터 여자 정신대로 조선의 여성들이 동원되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초등학교나 여학교 출신 여성들이 여자근로정신대로 나간 것은 기본적으로 황민화 교육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과 헌신이라 하여 좋은 일로 선전하였지만, 실제로는 강제 동원이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에게 더 공부할 기회를 갖고, 돈도 벌 수 있다는 유인책은 자신 뿐 아니라 가족을 위해서도 효를 행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로 생각하도록 거짓 포장된 것이었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그들은 교사나 주위의 강권에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일본 등 군수 공장에서의 생활은 그들의 바람이나 희망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기본적으로 동원 대상은 첫째, 농촌 여성과 공장 노동자 및 현재 노동을 하고 있는 여성을 제외한, 대개 도시의 여성이었다. 둘째, 나이 어린 미혼 여성인데, 대개 13세에서 22세 정도로 나이 폭이 커졌고 나이에 무관할 경우도 있었다. 셋째,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학력 소유자를 선호하였으며, 일본어 해독 능력이 있는 여성들이었다. 넷째, 중류 계급 이상을 동원하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초등학교 재학생, 또는 졸업생 중 가난하거나 독립 운동 등의 약점이 있는 가정의 여성들이 포함되었다.

이들은 공장, 조선 내지, 일본 및 만주 지역으로 동원되었다. 가장 많이 밝혀진 곳이 일본의 군수 공장으로 도야마[富山]현 후지코시 공장에 1945년 5월 말 현재 1,089명의 대원이 있었으며, 미쓰비시 나고야 항공기 제작소에는 종전 무렵 272명의 대원이 있었다고 한다. 또 국내에서는 평양, 광주 등 공장에 있었다고 하나 전반적인 상황은 잘 알 수 없다.

확대보기
여자근로정신대원들
여자근로정신대원들
팝업창 닫기

피해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집단 노동으로 기숙사 생활과 강도 높은 고된 노동에 부상, 사망자도 적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공장 노동 이외에 무용이나 노래도 하였다는 증언이 있고, 밤에 성노예 같은 일을 당하였다고도 한다. 식민지 미혼 여성의 몸이 일제의 전시 이른바 황군체제 하에서 어떻게 유린되었는가는 군 ‘위안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422) 한국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후원회, 『訴狀, 내 생전에 이 한을』, 예원, 2000.

결국 그들이 받은 피해는 동원 당시에 그치지 않고 전후 귀국, 귀가하여서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거의 ‘위안부’ 여성과 다름없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해방 후 한국 사회는 이들 여성 피해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 스스로는 자신의 몸이 더럽혀진 듯이 수치감으로, 또는 친일 행위로 오인 받을까 하는 두려움에서도 입을 봉하였고, 남성들은 자신들의 소유물에 해당하는 여성의 몸을 ‘왜구’, 일제에 내돌렸다는 데서 오는 자책감, 수치감 등으로 사실을 은폐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들은 ‘위안부’와 근로 정신대를 포괄하는 의미의 ‘정신대’ 여성으로 오인되고, 가부장제의 굴레에서 젠더적 차별이라는 이중 피해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회는 이들과 ‘위안부’ 여성을 구분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 중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성노예에 놓인 경우도 있었다. 결국 여성이 밖으로 내돌려졌다는 점에서 여성의 몸은 별 차이 없이 더럽혀졌다는 사회적 몰지각이나 저급한 사회 인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성은 나이, 계층, 학력, 직업, 혼인 여부와 전혀 무관하게 그저 단지 여성의 몸으로 비치는 것일까. 정신과 영혼이 함께 하는 인격체로서 여성의 몸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 여전히 심각한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