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5권 ‘몸’으로 본 한국여성사
  • Ⅲ. 몸, 정신에서 해방되다-1 몸의 가치와 모성의 저항
  • 04. 전쟁에 동원된 몸
  • 일본군 ‘위안부’
신영숙

일본군 ‘위안부’란 일제 식민지 전시기에 일본군 ‘위안소’로 강제로 연행되어 일제에 의해 조직적이고도 반복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정신대’, 일본군은 이 여성들을 그밖에도 유곽의 ‘작부(酌婦),’ ‘창기,’ ‘추업부’ 등으로 불렀다. 최근 국제 활동을 통해 붙여진 ‘일본군에 의한 성노예(sexual slavery)’라는 용어가 그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는 용어이다.423) 이하 내용은 주로 한국정신대연구소, 『할머니, 군위안부가 뭐예요』, 한겨레신문사, 2000 참고.

만주침략과 중·일전쟁 등을 비롯한 침략 전쟁이 확대되고 장기전으로 들어가자, 일제는 통제되지 않는 군인의 강간에 의한 성병 확산을 막고 군의 감독과 통제 하에 군인과 ‘군위안부’를 함께 둠으로써 군의 사기 진작 등 효과적인 군사 활동을 꾀하려는데 중요한 목적을 두고 군 ‘위안부’제도를 만들었다.

민간 주도의 군 위안소는 이미 청·일전쟁부터 있었다고 하지만 일본군이 주도하여 처음 군 위안소를 만든 시기는 1932년으로 추정된다. 일본 해군이 1931년 말 상하이에 있던 대좌부(貸座敷, 유곽의 일종)를 기초로 1932년경 해군위안소를 만든 후 이를 본받아 오카 무라(岡村寧次)가 육군 파견군에도 위안소를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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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위안소
군 위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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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육군성이 본격적으로 군 위안소를 설치한 것은 1937년 말부터이다. 중지나 방면군, 육군성 병무국, 의무국 등에서는 위안소를 설치하는 목적이나 군 위안소의 경영 감독과 군위안부 동원 및 모집 인원에 대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점령지뿐 아니라 격전지마다 군 위안소를 설치하려는 계획도 미리부터 세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군 위안소는 ‘위안부’로 끌려간 여성들이 기거하며 인권을 유린당한 공간이다.

위안소는 일본군 문서상 ‘군 위안소’, ‘군인 클럽’, ‘군인 오락소’, 혹은 ‘위생적인 공중 변소’ 등으로 군부대가 주둔지에 신축하기도 하고, 원주민 가옥을 고쳐 이용하기도 하였다. 부대가 이동하거나 전쟁 중일 때는 군인 막사나 초소, 참호, 군용 트럭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일본군 ‘위안부’와 관리자가 있는 위안소 방 문 밖에는 방 번호나 ‘위안부’의 일본식 이름이 쓰여 있기도 하였다. 방안에는 ‘위안부’의 일상용품 외 삿쿠(콘돔)가 있었다. 위안소 안에는 군인의 군표나 돈을 받는 접수처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삿쿠와 막 휴지가 돈과 교환되기도 하였다. 또 질 세척용 소독약(붉은 색)과 대야 등이 있었다. 그러나 군대의 막사, 참호 등에는 오직 ‘위안부’와 군인만이 존재하 기도 하였다.

일제는 군 ‘위안부’ 여성들을 우리나라에서 광범위하게 동원하였다. 그것은 식민지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과 함께 국제법을 피해갈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일제는 당시 ‘부인 및 아동의 매매를 금지하는 국제 조약’에 가입하면서 식민지에서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유보 조항을 두었던 것이다. 또한, 일제의 수탈 정책으로 조선에서는 빈곤층이 늘어났고, 특히 농촌에서는 일자리를 얻으려는 딸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동원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일제는 일본에서 뿐 아니라 전쟁으로 점령한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라바울 등의 현지 여성들까지도 군 ‘위안부’로 동원하였다.

군 ‘위안부’로 끌려갈 당시 여성의 연령은 10대 초의 미성년에서부터 20대, 30대의 기혼 여성도 있었다. 이들 여성은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거나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다는 등의 취업 사기를 당해서 위안소로 간 경우가 많았다. 또는 위안소 업자나 모집인들에 의해 유괴당하거나 인신 매매되기도 하였으며 관리, 경찰, 군에 의해 강제 납치당하기도 하였다. 민간 업자가 여성들을 모집한 경우에도 이들 민간 업자들은 관동군, 조선군 사령부 등의 관리, 감독 통제 아래 있었다.

군 ‘위안부’ 여성들의 생활을 규제하는 위안소 이용 규칙에는 군의 이용 시간, 요금, 성병 검사, 휴일 등에 관한 세부 사항이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군인을 위해 제정된 것이지, 여성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군 ‘위안부’들은 대개 아침부터 초저녁까지는 병사를, 초저녁부터 밤 7∼8시까지는 하사관, 그리고 늦은 시간에는 장교를 상대하였다. 장교는 숙박할 수 있었다. 여러 부대가 같이 주둔한 경우에는 서로 요일을 달리해서 위안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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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소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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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한 사람 당 대개 30분이나 1시간 이내로 이용 시간이 제한되었다. 군 ‘위안부’들은 하루에 평균 10명 내외에서 30명 이상의 군인을 상대해야 하였다. 주말이면 훨씬 더 많았다. 또 위안소가 없는 지역에 파견되면 임시 막사에서 그 부대의 전 인원을 상대하기도 하였다.

군 ‘위안부’들은 처음에 군인들에게 반항하여 맞기도 하였으나 보초 때문에 도망갈 엄두를 못낸 채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도 ‘하나코’, ‘하루코’ 등 일본식 이름이나 번호로 불렸고 우리말도 쓰지 못하게 하는 등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희생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일제는 여성의 몸만을 동원한 것이 아니라 정신을 교화하여 몸을 활용하고자 한 속셈도 가지고 있었다. 술에 취한 군인들은 ‘위안부’들을 손으로 때리거나 칼로 찔러 몸을 학대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군인의 눈에 여성의 몸이 자신의 몸과 같았을 리 없다.

군 ‘위안부’들은 일주일 또는 2주일에 한 번 씩 군의나 위생병에게 성병 검사를 받아야 하였다. 검사 결과 합격된 ‘위안부’들만 군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돈벌이에 혈안이 된 주인들은 검사에 떨어졌어도 군인을 상대하도록 강요하였다. 군인들은 성병 예방을 위하여 원칙적으로 삿쿠를 써야 하였으나 삿쿠를 쓰지 않은 군인들도 많았다. 그 결과 ‘위안부’들의 상당수가 성병에 걸렸다. 그러면 606호 주사를 맞거나 중독 위험이 큰 수은으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성병이 심해지거나 임신하면 어느 날 위안소에서 사라지기도 하였다.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쫓겨난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는 성병 검사 그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었다.

군인이 너무 많이 들이닥치거나 부대로 파견된 경우에는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의복도 군에서 제공 받기도 하고 때로 구입하는 경우도 있으나 빚이 되기 쉬웠다. 임신한 여성은 박대당하거나, 버림받는 예도 적지 않았다. 그들의 몸은 재생산의 도구가 아니라, 다만 성의 도구였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군 ‘위안부’들은 종전 전후에 자살, 또는 학살로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 수용소에서 집단으로 또는 혼자 천신만고로 귀향을 한 경우 등 다양하다. 타국에서 그대로 머물러야 하였던 경우도 있다.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더럽혀진 몸으로 돈도 한 푼 없이 돌아갈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귀향 후 그들의 생활도 몸에 대한 후유증, 트라우마 등으로 상처투성이일 뿐이었음은 주지하는 바이다. 그들 피해 여성의 몸은 말 그대로 만신창이였던 것이다. 그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 반전 평화를 더 간절히 소망해볼 뿐이다.

일제 시기 이른바 근대 여성의 몸은 일제의 지배 권력 아래 일관되게 정신과 몸의 분리를 강요당하였고, 일제의 여성 정책은 한편으로 2세의 몸을 낳아 황민화 정신을 심어주는 후방 여성과 다른 한편으로 단지 일제 지배의 성적 도구로 활용되는 여성 몸으로 분리 지배하는 것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제의 여성 정책은 정신과 몸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데서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신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나 그렇지 못한 기생, 또는 농촌 여성 등이 모두 한 마음 한 몸으로 자신은 물론 가족과 민족을 지켜내는데 헌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정신과 몸이 결코 일제의 지배 정책대로 분리되고 통제 관리되는 대상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진정한 근대적 여성의 몸이 정신이나 마음과 일치하여 다시 하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여성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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