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삶은 두 가지 시간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일회적인 평생(일생)이고 다른 하나는 순환반복의 시간, 즉 매일, 매달, 매 계절, 매년이다. 일생 동안 부딪치는 각종 중요 시기에는(탄생에서 죽음까지) 그에 맞는 의례 행위가 따르고, 매달, 매 계절의 특별한 날에도 각종 의례 행위가 연출된다. 이를 일러 평생 의례(일생 의례)라 하고 세시 의례(풍속)이라 한다. 어느 시간이든 이를 분절하여 특별한 날이나 기간에 특별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역사의 각 시기, 국가-왕실과 양반, 지방, 생업, 민간에 따라 행위의 규모와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두 시간 축에 속하지 않는 것은 없다. 제사의 경우 양쪽에 다 속하지만, 의례 주체(후손)의 입장에서 보면 매년 치르는 세시 의례에 가깝기에 본문에서 중히 다루었다.
이 책에서는 세시 풍속(의례)의 문화사적 의미를 규명하고, 주요 사례들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 이는 해방 후 관련 학계에서의 연구가 잔존 문화로서의 민속 조사에 머물고 역사적 변화 과정 및 생업과의 연관, 종교적 기원을 소홀히 한 데 대한 반성과 재연구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세시란 해(歲)와 때(時)의 합성어다. 여기서 해는 일년 혹은 사시(四時)를 뜻한다. 이에 세시란 일년 중의 때때를 의미한다. 그러나 세시는 무시(無 時)의 반대말의 의미가 더 크다. 무시는 무상시(無常時)의 준말로 수시, 혹은 명절이 아닌 날을 가리킨다. 따라서 세시란 무시가 아닌 특별한 날, 곧 명절(名節)이다. 절은 마디다. 따라서 일년 중 특별한 마디 날[節日], 매듭을 짓는 날인 것이다. 하여 세시 명절이라고도 한다.
세시는 순환 반복의 시간, 즉 매달, 매 계절 중 특별한 때(날)이다. 인간은 흐르는 연중의 시간에 때로 중요한 마디를 설정하고는, 그 때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걸맞은 의례적 행위를 한다. 그중에서도 월별 풍속이 중심이었다. 정월의 다양한 풍속을 필두로 하여 입춘, 이월 연등, 삼월 삼질, 사월 초파일, 오월 단오, 유월 유두, 칠월의 칠석과 백중, 팔월 한가위, 구월 중양, 시월 상달, 동지와 납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월별 분류는 일제시기 이후 민간 풍속을 중심으로 임의 설정한 것이고, 실제로는 명일(名日)이나 계절별 풍속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이에 본문에서도 월별 풍속과 더불어 명일이나 계절별 풍속으로 분류하여 고찰하였다.
한편, 해방 후 국가에서 지정한 법정 경축일(국경일)이나 공휴일 등도 중요한 현대의 세시 의례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국경일은 3·1절, 제헌절(7·17), 광복절(8·15), 개천절(10·3)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 수립 이듬해인 1949년 10월 1일 민족 의식과 민족 정기를 고취하기 위하여 ‘국경일에 관한 법률’(법률 제53호)을 제정·공포하였다. 1949년 5월 24일 행정부가 3·1절, 헌법공포일, 독립기념일, 개천절을 4대 국경일로 하는 정부안을 국무 회의 의결로 확정, 같은 해 6월 2일 제헌 국회로 이송,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헌법 공포일을 제헌절로, 독립기념일은 광복절로 명칭을 수정하여 합의한 후, 같은 해 9월 21일 제5회 임시 국회에서 법률안을 확정하였다. 공휴일은 대통령령에 의해 결정된다. 공휴일은 말 그대로 쉬는 날인데, 누구나 쉬는 날이 아니고 ‘관공서’가 쉬는 날이다. 그래서 법령의 이름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이다. 이와 관련한 최초의 대통령령은 1949년 6월 4일 공포되었는데(제124호), 일요일, 국경일, 1월 1∼3일, 식목일, 추석, 한글날, ‘기독 탄생일’ 및 기타 정부에서 수시로 지정하는 날로 명시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취소(식목일 등), 신규 지정(부처님 오신 날 등)이 있었다. 이외 각종 기념일이 있으나, 이는 현대의 세시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해방 후의 이들 각종 기념일은 국가의 의전(儀典) 체계에 속해 나름의 법식과 절차가 정비되어 있어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세시 풍속의 역사적 변화와 생업 및 종교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논구하기에 이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단 설, 추석, 성탄절, 부처님 오신 날은 당연히 주요하게 다루었다.
해방 후 학계의 민속 연구는 대부분 국문학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민담, 설화, 무가, 놀이 등의 연구가 중심이었다. 역사학자들 및 예학자들에 의해 국가 의례나 주자 가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민속 연구와의 접점을 찾기는 어려웠다. 1970년대 이후 일군의 인류학자들이 본격적으로 민속 연구에 참여하여 연구의 폭이 넓어져, 가례(한동안 통과의례로 잘못 쓰이기도 하였다), 무속, 생산 민속, 의식주, 세시 풍속 등 연구 영역이 확대되고, 일정한 연구 성과가 도출되었다.
세시 풍속 연구도 속출하였다. 그러나 세시 풍속 전문 연구가 아니라, 민속 전반에 대한 연구 중 세시 풍속에 관해 따로 논저를 발표한 것이기에 연구사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다. 문화인류학자인 김택규의 독보적인 저술(『한국 농경 세시의 연구』,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5)이나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인 김명자의 논문 『한국 세시 풍속연구』(경희대학교, 1989) 등이 세시 풍속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개별 논저 외에 의미 있는 작업은 문화재관리국에서 펴낸 『한국민속종합보고서』(1969∼1981)에 실린 전국의 도별 세시 풍속 현장 조사 보고이다. 당시의 세시 풍속의 현장 조사라는 의미는 있지만, 조선 시대 세시기류의 복사, 지역별 특성의 부재, 본격적인 현장 조사 방법론의 미비 등으로 현재는 거의 인용되고 있지 않다.
2001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도별 세시 풍속 조사 보고서를 펴냈다. 이는 각도의 시군별로 3곳을 선정, 집중 조사를 하였기에 이전보다 조금 더 진전된 조사 보고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도 이전 보고서들의 조사 방식을 답습한 것으로, 이전 조사 내용을 보완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국립민속박물관에서 2004∼2006년에 걸쳐 편찬한 『한국 세시 풍속 사전』은 사전 항목 선정, 집필자 선정 등에서 기존의 연구 성과와 역량을 최대한 활용하였고, 박물관 연구원들이 전국 실태 조사로 이를 보완하여 간행한 세시 풍속 사전이다. 사전에 실리지 않은 사진과 참고 자료, 색인 등은 책자나 DVD로 발간하였다. 이 사전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진행 중이나, 향후 이 같은 사전류의 편찬이 불가능할 것으로 보여, 그 연구사상 의미는 크다 하겠다. 한편,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사전 편찬 작업 중에 각종 세시 풍속 자료집성 시리즈물을 간행하였다. 국립민속박물관 자료 총서 중 한국 세시 풍속 자료 집성을 『삼국·고려시대편』(2003), 『신문·잡지편(1876∼1945)』(2003), 『조선 전기 문집편』(2004), 『조선 후기 문집편』(2005), 『조선대세시기』(2005) 등으로 속간하여 연구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는 사전 편찬에 못지않은 큰 성과라 하겠다.
이 책은 이 같은 기존의 연구 성과를 참고하면서도 기존 연구나 보고서, 사전류와는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하여 집필되었다. 본문 총론에서도 서술하였듯이 세시 풍속의 문화사적 의미를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행사 주체의 파악(국가, 계급, 중앙과 지방, 민간 등), 농어업 생산력의 발전과 이에 따른 세시의 변화, 세시 풍속의 종교적 연원 규명 등의 세 차원에서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을 살펴본 것이다. 이에 따라 세 영역별 전공자가 나누어 집필하였다.
1장 총론에서는 ‘세시와 역법의 인지 체계’, ‘세시기 편찬과 저술가 들’을 별도로 기술하였다. 역법은 세시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변수임에도 그동안 조선의 역법과 인지 체계와 관련하여 세시의 변화를 추적하는 작업은 거의 없었다. 역법 체계와 변화는 매우 전문적인 영역이라 향후 역법 전문가와 더불어 공동 작업을 통해 그 변화상과 내용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세시기류와 저술가에 대한 검토는 세시 풍속의 매 시기별 실상과 변화를 규명하는 필수 자료임에도 그동안 단순한 인용 차원에 그치거나 오류를 그대로 재록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에 특히, 대표적 세시기인 『동국세시기』의 교감(校勘)과 저자인 홍석모(洪錫謨)에 대한 규명은 필수 작업이었음에도 그간 자료의 미비와 판본의 오류로 인하여 진척이 없었다. 연세대 소장 원사본을 검토하고 홍석모의 가계, 행적에 대해서도 최대한 추적, 정리하였다.
2장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에서는 ‘세시와 국가 정책’, ‘세시 풍속의 계급적 성격’, ‘세시 의례와 지역 문화사’,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을 살펴보았다. 국가 차원의 사전(祀典) 체제는 전통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고려까지 사전 체제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사료만 남아 있기에 소상하게 알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의 국가 사전 체제는 자료가 상세하게 남아 있다. 이 중 국가 세시 의례라 할 것은 거의 대부분 『국조오례의』 중 길례(吉禮)에 속한다. 말하자면 국가 제사 절차인데, 일 년에 한번 혹은 수시로 행해지던 의례들이다. 이는 대중소사(大中小祀)로 분류되고, 국가 단위나 지방 군현 단위에서 동일하게 행해졌다. 그러나 이들 중 성황제, 여제, 기우제 등은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지역별 특색이 강화되다가, 일부는 결국 소멸하거나 마을 단위의 민간 의례로 전화되기도 하였다. 또 다른 국가 의례인 도교 초제는 조선 중기에 소멸하였고, 임란 이후 유입된 관우 신앙은 조선 후기에 관왕묘 치제(致祭)로 성행되다가, 일제 이후 일부 민간이나 무속의 신앙 대상으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시 풍속의 계급적 성격’에서는 왕실-양반-민간으로 나누어 살펴 보았다. 왕실의 가장 중요한 의례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거행되지만, 궁궐에서도 각종 속절에 나름의 세시 풍속을 지냈다. 왕실에서는 사시(四時)와 납일(臘日)의 제사 외에 설, 한식, 단오, 추석의 사명일(四名日)과 입춘 및 동지 등을 명절로 쇠었다. 단오의 부채와 동지의 역서는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여 임금이 신하에 내리는 대표적인 명절 하사품이었고, 이는 지방 관아에서도 그대로 준행되었다. 고려시대 관리들은 각종 명일에 휴가를 내어 제사를 지내거나 놀이를 하였으나, 조선의 양반들은 각종 속절에 당하여 상당 기간 혼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각종 문집에는 속절과 민간의 풍속에 대한 수많은 기록이 보인다. 양반들은 제사를 가장 중히 여겨 이에 대해 예서와 문집 기록을 많이 남겼다. 주로 정조, 한식, 단오, 추석의 사명일의 묘제(墓祭)에 관한 기록을 남겼고, 다른 한편 속절에 대해서도 중국의 풍속과 관련하여 여러 기록을 남겼다. 상원, 입춘, 답청, 칠석, 중원, 중양, 동지, 납일 등에 어찌해야 하는가를 두고 여러 의견을 펼치기도 하였다. 민간의 세시 풍속은 생각 외로 기록이 많지 않은데, 양반들의 문집에 단편적이지만 여러 기록이 전한다. 이들 기록에 의해 정월, 봄, 여름, 추석, 가을 고사와 겨울 세시 풍속으로 나누어 민간의 풍속을 정리하였다.
‘세시 의례와 지역 문화사’는 중앙과 지역으로 나누어 서술하였다. 중앙은 서울과 지방 관아로 나누어 정리하였다. 중앙은 곧 서울(한양)과 인근이다. 서울에서는 백악신사, 목멱신사, 한강단, 민충단, 부군사, 선무사 등이 있어, 산천제의와 인물신에 대한 제사가 주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지방 군현 단위의 관아에서는 사직단, 지역산천, 성황단, 여단 및 해신이나 도신에 대한 제사가 주를 이루었다. 이는 지방관이 국왕의 대행자로서 치제를 한 것이다. 이외 기우제나 부군제 등이 있었고, 지방 향교에서는 공자 제사인 석전을 올렸다. 지방에는 고려 이래로 존재하던 성황사 등의 각종 신사(神祠) 사당이 있었다. 이는 지방 관아에서 주재하던 국가 제사와 일부 겹치기도 하지만, 지역 토호, 아전 등이 군현민을 이끌고 지 내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조선 초기부터 음사(陰祀)로 규정되어 철폐되기도 하였으나, 무당, 승려 등이 사제로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왕권이나 수령권이 모든 지역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는 일정 부분 용인되어, 오늘날의 각종 단오제나 별신굿 등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기도 하다. 이들 지방 제사 시 지방관이나 문장가들이 쓴 제문이 문집 등을 통해 지금도 많이 전해 오고 있다.
‘세시 풍속의 변화와 지속’에서는 조선 초기와 중후기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농업 생산력의 변화와 불교-유교로의 전환, 도교의 부침을 축으로 하여 대표적인 사례를 검토하였다. 정월의 상원 답교와 석전 풍속의 변화, 등석, 단오 및 유두의 쇠퇴, 백중과 두레의 형성, 사시제의 대안으로서의 중양절 등이 그것이다.
3장 세시와 생업에서는 ‘생업과 세시의 제 관계’, ‘농업과 세시’, ‘어업과 세시’, ‘생업과 세시의 장기 지속과 단기 지속’ 등을 살폈다.
‘생업과 세시의 제 관계’에서는 세시가 먹고 사는 문제와 분리될 수 없음을 두레 등의 농업력이나 어업력 등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또한, 전통시대 경제 활동의 핵심이 시기를 잘 맞추는 일이며, 적기적작(適期適作)의 과학성과 세시가 분리될 수 없음을 밝히고 있다.
‘농업과 세시’에서는 먼저 적기적작과 ‘오방풍토부동(五方風土不同)’의 논리를 들어 현지 농부의 농사 지혜가 농서의 근간이었으며, 기본 개념은 같되 지방마다 각론은 다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으로 여러 농서의 내용을 살펴 그에는 반드시 세시가 반영되고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시후와 세시는 농서의 기본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어 조선 후기농법의 변화와 새로운 세시의 탄생을 정리하고 있다. 이앙법의 광범위한 보급, 작부 체계의 변화, 종자의 변화에 따른 두레의 계선을 살피면서 그에 따라 새로운 농경 세시 풍속이 다양하게 등장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어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모내기, 김매기 등의 주요 농사일의 변화에 따라 새로 정립된 동계와 하계의 휴한기에 세시 풍속이 집중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업과 세시’에서는 물고기는 아무 때나 아무 곳에나 들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적기적획(適期適獲)인 것이다. 어장에서 고기잡이가 이루어지고, 어장도 수시로 이동하므로 농사 주기와는 전혀 다른 생업 체계인 것이다. 또한, 수산인이 하층민이라 농사에 비해 관련 수산서가 영성함을 지적하며, 그나마 그 수산서의 전통이 이어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어 『자산어보』 등 주요 수산서의 내용을 검토하며, 물고기가 드는 장소와 어종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 또한, 어종의 회유, 산란 시기 등의 시후와 어획 방법에 따라 어업력이 구성되고 이에 따라 날씨 점, 뱃고사 등의 어업 세시가 결정됨을 논증하고 있다. 고기잡이 세시의 사례 연구로는 명태와 청어를 선정하여, 세밀하게 어업력과 세시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주요 어종의 어획과 세시의 관련을 집중 분석한 글은 매우 드물기 때문에 좋은 연구 성과라 하겠다.
‘생업과 세시의 장기 지속과 단기 지속’에서는 역사 문헌의 기록과 20세기 구술·채록의 비교 고찰을 통하며 ‘세시와 생업’의 지속과 변화를 고찰하고 있다.
4장 종교와 세시 풍속에서는 불교와 기독교, 신종교(민족 종교)의 세시 풍속을 다루고 있다. 이들은 그 역사적 연원이나 성행 시기 등이 서로 상이하여 한데 묶어 서술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이들 주요 종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각종 행사의 주체이고, 그 역사적 연원은 여러 생산 풍속이나 국가 의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기에 함께 살펴보았다. 유교의 사전 체제나 도교 풍속은 2장에서 전체적인 검토를 하고 상술하였기에 따로 다루지는 않았다. 또한, 무속이나 기타 고대의 민속, 민간 신앙에서의 세시도 살펴보았으면 하였으나, 이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불교와 세시 풍속’에서는 사대 명절, 연등회와 팔관회, 재일과 재공양, 불교 제사, 주요 월별 풍속 순으로 정리하였다. 불교의 사대 명절은 교조인 부처의 탄생(불탄절, 불생일)과 출가(출가절), 깨달음(성도절), 죽음(열반절)을 기리는 순수한 종교 명절이다. 불탄절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으나, 2월 8일, 4월 8일 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중국, 동남아, 우리나라 등에서 각기 다른 역법에 따라 지내지고 있으며, 역사 기록에서도 여러 이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중국 당대의 풍속과 전래 경전을 따라 지냈으나, 실제 불탄절을 국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지낸 기록은 거의 없다. 고려시대에도 불탄절이 아니라 연등회로 국가 차원의 등놀이였다. 이에 인도와 중국, 동남아, 일본 등의 불탄절 행사를 기록에 의해 살펴보았고, 사월 초파일은 월별 풍속에 따로 배치하였다. 기타 출가절, 성도절, 열반절 등도 역사 기록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으나, 중국 기록을 중심으로 정리하였고, 최근에는 불교계에서 본격적인 기념 행사를 정례화하고 있다.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시대 가장 성대한 국가 의례였다. 유교적 사전 체제가 확립되지 않았고, 다양한 종교 문화가 융섭하고 있던 시기에, 불교 명의의 성대한 국가 제전이 치러졌던 것은 매우 중요하기에 따로 정리하였다. 재일(齋日)과 재공양(齋供養)에서 재일은 10재일이라 하여 정기적인 행사일이고, 영산재나 수륙재, 생전예수재 등 재공양은 천도재의 영역을 넘어 불교 각종 연중행사나 풍속에 반드시 등장하는 종합적인 의례 방식이기에 정리하였다. 불교식 제사는 고려시대나 조선 초까지 왕실과 사대부가에서도 준행하였던 풍속이다. 조선 중기 이후 불교식 제사는 사라지고, 최근 다시 그 행례법이 준비되고 있다. 풍속의 지속과 변화에서 중요한 사례라 정리하였다.
불교의 월별 풍속은 조선시대 세시 풍속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초의 마을 굿, 입춘, 단오, 칠석과 백중, 동지 등은 지금도 불교에서 크게 지내고 있다. 역사 기록과 현재 사례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이중 사월 초파일은 조선 중기 이래 장시 등 대처에서 도시 상인들이 주도한 등놀이로 민속화되었는데, 등석·관등 등 여러 이름으로 각종 문집류에 기록이 산재한다. 오늘날은 연등 축제로 되살아나고 있다.
‘기독교의 연중행사’는 기독교가 아직 우리 사회에 전래된 지 오래지 않아 토착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먼저 교회력을 살펴보았다. 서양에서 교회력의 형성과 변화 과정을 살피지 않고는 그 내력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전래 후 조선 사회와 갈등 관계를 심하게 겪었으나, 초기에는 전통 문화를 수용하려는 모습도 보였고, 이후 산업화 시기에는 다양한 의례 토착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중 대표적인 사례가 성탄절과 추수감사절이다. 이들은 전래 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나름의 토착화 과정을 거쳤기에 그 과정과 내용을 정리하였다. 부활절이나 기타 교회력은 아직 기독교 내부의 행사에 머물고 있어 따로 정리하지 않았다.
‘한국 신종교의 연중행사’는 전통에 근거하면서도 근대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나름대로 생존해 온 종교 집단이라 서술하였다. 동학(천도교), 증산교, 대종교, 원불교 등은 전통 시기 절기와 세시 풍속을 그 의례 체계 속에 아직도 많이 담고 있는데, 이는 지금은 사라진 전통 세시풍속의 규명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보았다.
1장 총론과 2장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는 정승모(지역문화연구소 소장)가 집필하였다. 3장 세시와 생업은 주강현(제주대학교 석좌교수)이 집필하였다. 4장 종교와 세시 풍속은 진철승(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집필하였다. 세시 풍속의 문화사적 의미를 위의 세 가지 차원에서 규명하고자 하였으나, 미흡한 점이 많다. 향후의 정진을 약속드린다.
2011년 8월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