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1 총론
  • 03. 세시기 편찬과 저술가들

과거의 세시 풍속에 대해 연구하려면 시대별로 다양한 세시 관련 기록들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책으로 『동국세시기』가 있고 그 즈음에 역시 세시기 저서들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연구들이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중반까지 작성된 세시기류에만 의존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러나 시대별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세시의 모습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기존 세시기에 담긴 내용의 한계를 극복 또는 보완하는 연구 방법이 필요하다.

그 방법의 하나는 세시를 담은 다양한 사료 및 자료의 활용이다. 즉, 세시기류는 물론이고 기본 사료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일기류(日記類), 읍지류(邑誌類), 『농가월령가』 등의 가사류(歌辭類), 세시 풍속시(歲時風俗詩), 각종 가례서(家禮書), 그리고 그밖에 세시와 관련한 시와 해설을 담은 문집류의 활용이다. 특히, 문집류에 나타나는 기록들은 단편적이지만 저자가 해당 절기에 실제로 무엇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일반론을 다룬 기존 세시기와는 달리 이를 통해 시기적·지역적 특성을 판별해 낼 수 있고 나아가 서로 다 른 시기의 기사들을 비교함으로써 세시 풍속의 변화상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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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가월령가』 12월령
『농가월령가』 12월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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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도 「세시기」를 1년 중 계절에 따른 사물이나 행사 등을 열기(列記)한 책으로 인식하고 있다. 대표적인 세시기로는 종름(宗懍)의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 두공섬(杜公贍)의 『형초세시기』가 있고 이작(李綽)의 『진중세시기(秦中歲時記)』, 진원정(陳元靚)이 찬한 『세시광기(歲時廣記)』 등이 있다. 이중 조선의 학자들은 종름의 『형초세시기』를 가장 많이 참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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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세시기』 표지
『동국세시기』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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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적인 세시기 저서로 『동국세시기』를 들 수 있다. 우선 저자 홍석모에 대해 알아보자. 그 동안 세시 풍속 연구자들이 세시기류로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책이 『동국세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서지적인 사항들이나 저자인 홍석모에 관한 연구 실적이 거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홍석모의 생몰연대가 미상으로 나와 있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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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세시기』 정월편
『동국세시기』 정월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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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모는 서울의 명문 가문인 풍산(豊山) 홍씨(洪氏) 중에서도 핵심 집안이라고 할 수 있는 추만공파(秋巒公派) 자손이다. 추만공 홍영(洪霙, 1584∼1645)은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사위로 예조 참판을 지냈고, 그의 아들은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인 영안위(永安尉) 홍주원(洪柱元)으로 정조(正祖)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부친인 홍봉한(洪鳳漢)이나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의 고조(高祖)가 된다. 홍석모는 홍희준(洪羲俊)의 외아들이고, 홍양호는 홍희준의 생부이다.

홍양호는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문형(文衡)으로 기사(耆社)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묘소는 충청남도 천안군 성환면(成歡面) 용곡리(龍谷里)에 있는데, 본인이 묘지의 서(序)를 쓰고 묘표는 아들 홍희준이 지었다. 그러나 그의 막내 아들 홍희민(洪羲民, 1762∼1822)의 묘가 양주군 해등면(海等面) 우이동(牛耳洞)인 점으로 미루어 사후에도 이들의 거주지이던 우이동 기반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 석모의 부친 홍희준(1761∼1841)은 이조 판서와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기사에 들어갔다.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이고 묘소는 천안군 서면(西面) 용암리(龍岩里) 봉서산(鳳棲山)에 있으며 묘지는 서유구(徐有榘)가, 소지(小誌)는 아들 홍석모가 찬하였다.

풍산 홍씨 족보에 의하면 홍석모는 1781년 7월 29일에 태어나 1857년 10월 19일에 죽었다. 묘소는 천안군 서면 용암리 봉서산에 있다. 초명은 석영(錫榮), 자는 경부(敬敷), 호는 도애(陶厓)이다. 1804년에 생원이 되었고 음사(蔭仕)로 남원 부사(南原府使)를 지냈다. 묘갈(墓碣)은 영의정 정원용(鄭元容)이, 묘지는 참판 송지양(宋持養)이 찬하였다.

『철종실록(哲宗實錄)』에 의하면 1855년에 “전 부사(前府使) 홍석모에게 옷감과 먹을 것을 내려주었는데, 화성(華城)에서 열렸던 내연(內宴)에 참여한 사람으로 회근(回巹), 즉 혼례한 지 60년이 지났기 때문이다(給前府使洪錫謨衣資食物 以入參華城內宴之人 回巹已過也).”(『철종실록』 권7, 철종 6년 3월 정묘)라고 하였다. 화성에서 열린 내연이란 정조가 1795년에 회갑을 맞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화성으로 원행(園幸)하여 벌인 행사를 말한다. 혜경궁 홍씨와는 조카벌이 되는 홍석모는 이때쯤 부인 청주 한씨(1780∼1857)와 혼인한 것 같다. 홍석모의 장인은 판서를 지낸 한용탁(韓用鐸)이다. 홍석모는 2남 7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아들의 이름은 홍건주(洪健周)와 홍선주(洪善周)이며, 사위는 창녕(昌寧) 조씨 조석필(曺錫弼), 전주(全州) 이씨 이만기(李晩器), 연안(延安) 이씨 이공익(李公翼), 연일(延日) 정씨 정원필(鄭元弼), 온양(溫陽) 정씨 정문교(鄭文敎), 동래(東萊) 정씨 정기복(鄭基復), 연일 정씨 정주석(鄭疇錫) 등 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쌍룡동 산 68-5에 있던 홍석모의 부친 홍희준과 홍석모 부자의 묘를 1991년 11월 6일에 이장하면서 지석 등이 발견되었다. 홍희준의 묘는 배위(配位) 용인(龍仁) 이씨와의 합장묘로 이씨가 남편보다 6년 먼저 죽어 이곳 선산에 장사지냈다가 이장하여 남편 과 합장하였다. 홍석모의 모친인 정경부인 용인 이씨는 1760년 2월 5일에 태어나 1836년 6월 17일에 죽었다. 이장 과정에서 백자 지석 3건 12장(2장 중복), 토제 지석함 2개 및 토제 지석 102장이 나왔는데, 그중 백자 지석 2건은 도애가 부모를 위해 찬한 소지(小誌)이며 지석함 2개 중 한 개 함에 들어있는 토제 지석 71장은 도애 부모인 홍희준과 용인 이씨의 지석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有明朝鮮崇祿大夫行吏曹判書兼弘文館提學世子右賓客 成均館經筵春秋館同知事義禁府判事五衛都摠府都摠管事 豊山洪公羲俊之墓 (艮坐) 貞敬夫人 龍仁 李氏 祔左

또 다른 토제 지석함의 지석 31장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은 도애와 부인 청주 한씨의 지석이다.

有明朝鮮通政大夫行南原府使 豊山洪公錫謨之墓 (艮坐) 貞敬夫人 龍仁 李氏 祔左

『동국세시기』 서문을 쓴 이자유(李子有)는 1786년 7월 생으로 호는 곡양(縠瀼)이며 1850년대 초까지 살았던 것 같다. 홍석모는 5년 연하인 그와 30여 년을 사귀었으며 책의 서문을 부탁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회갑 때는 축하 서문을 써주었고 또 먼저 죽은 그를 위해 제문을 짓는 등 두 사람의 교유가 매우 깊었던 것 같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이자유가 1849년 9월 13일자로 쓴 서문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은 홍석모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 그러나 그는 결국 운명에 막혀 쌓아 놓은 재주를 아무도 사지 않 아 저 대궐의 풍부한 책들을 접할 수 있는 높은 벼슬은 남에게 넘겨주고 말단 관리로 머물면서 늘그막에는 자포자기하여 오직 사부(辭賦)와 시율(詩律)로서 스스로 무료함을 보내고 적적하고 우울하고 평온치 못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으니 어찌 이리도 어그러진 일이 있겠는가 …….

그러면서 그는 도애의 세시기 작업을 무료한 가운데 소일거리로 보낸 것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다. 어쩌면 친구 곡양의 말대로 도애가 자신의 선대들처럼 당대에 현달하였던 인물이라면 이 책은 물론 그밖에 많은 시문들도 남기지 못하였을 지도 모른다.

민간의 세시기류는 대개 농가 일용(農家日用)이나 여염 풍속(閭閻風俗)을 담게 되는데, 서울 사람인 홍석모의 경우 주로 시절 음식과 서울 풍속을 많이 다루고 있는 가운데서도 전국적인 풍속을 언급할 수 있었던 배경은 그가 남긴 시문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생활의 여유에서 나오는 끊임없는 여행과 폭넓은 독서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특히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잦은 인용이다. 그 이유는 이후 보완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이 책의 편찬 시기와 『동국세시기』의 편찬 연대(1840년대)와의 간격이 무려 300년을 넘어 이 기간에 벌어진 풍속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로 접하고 있는 『동국세시기』는 1911년에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발간한 연활자본(鉛活字本)으로 김매순의 『열양세시기』 및 유득공의 『경도잡지』와 합편(合編)한 것이다. 원사본(原寫本)은 1책으로 홍승경(洪承敬)씨의 기증본인데, 기증자 홍승경은 저자 홍석모의 증손이다. 그런데 이 광문회본은 원사본과 비교할 때 적지 않은 오자와 탈자가 있다. 예를 들면 정월 원일조(元日條)의 “廣州俗 是日相慶 拜日月神”에서 ‘廣州’는 ‘慶州’의 오자이며, 같은 달 입춘조(立春條)의 “立春日 宜春字于門”에서는 ‘春’과 ‘字’ 사이에 ‘二’가 빠 져있다. 그 결과 입춘일에 ‘宜春’ 두 자를 문에 붙인다고 해석되어야 할 것을 “봄(春)에 합당한(宜) 문자를 붙인다.”는 식으로 번역되고 또 그것을 아무 의심없이 연구자들이 인용하고 있다. 원사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으로는 현재까지는 연세대학교 소장본이 유일한데 1책 42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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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잡지』 표지
『경도잡지』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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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정조 때의 문신 유득공(柳得恭, 1749∼1807)이 서울의 세시 풍습을 기록한 책이 『경도잡지』이다. 간년은 미상으로 2권 1책에 필사본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상권에서는 의복·음식·주택·시화(詩畵) 등 풍속을 19항으로 나누어 기술하였고, 하권에서는 서울의 세시를 19항으로 분류하여 기록하였다. 1911년에 광문회에서 신식 활자인 연활자로 출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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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도잡지』
『경도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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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득공은 문화 유씨로 자는 혜풍(惠風), 혜보(惠甫)이다. 호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당(古芸堂), 고운거사(古芸居士), 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정조 때 북학파(北學派)로서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서이수(徐理修)와 함께 규장각 4검서(檢書)로 이름이 났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1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를 배웠으며, 20세 이후 박지원(朴趾源) 등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영조 50)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779년(정조 3)에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 현감, 양근 군수, 광흥창 주부(主簿), 사도시 주부, 가평 군수, 풍천 도호부사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 임금이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죽었다. 양주(楊州) 송산(松山), 현재의 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 行)한 경험을 살려 기행집과 『발해고(渤海考)』 등 역사서도 남겼다. 그의 저작 『경도잡지』는 후에 김매순의 『열양세시기』와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열양세시기』는 순조 때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이 열양(洌陽), 곧 한양(漢陽)의 연중 행사를 기록한 세시기다. 김매순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이다. 문청공(文淸公) 시호를 받았다. 1795년(정조 19)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그 후 검열(檢閱), 사인(舍人) 등을 거쳐 초계(抄啓) 문신이 되었다. 예조 참판, 강화부 유수 등을 지냈으며 고종 때 판서에 추증되었다. 1책 필사본으로 전해 온 것을 1911년 광문회에서 『동국세시기』·『경도잡지』와 합본하여 연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1월에서 12월까지 주로 서울에서의 일년 행사와 풍속을 분류하여 기술한 내용으로, 책 끝에 저자의 발문이 있고 윤직(尹稷)이 교열하였다.

세시기를 제목으로 하는 저술 중에는 위의 것들 말고도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의 『세시기(歲時記)』, 소유(小游) 권용정(權用正, 1801∼?)의 『한양세시기(漢陽歲時記)』와 『세시잡영(歲時襍詠)』 등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이 지은 백과사전적인 책으로 조선뿐 아니라 중국 등 주변의 고금사물(古今事物), 즉 천문, 역법 등에서부터 복식, 유희, 양조(釀造) 및 외래 물종에 이르기까지 망라하여 고정(考訂)·변증(辨證)한 것으로 항목은 1,400여 개이며 60권에 달한다. 원래는 필사한 단일 원고본으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가지고 있다가 전란 중에 소실되고, 현재는 최남선이 소장할 당시 원본을 베껴놓은 것만이 규장각 도서로 남아있다. 이규경은 서울 출생으로 자는 백규(伯揆), 호는 오주, 본관은 전주다. 『청장관고(靑莊館稿)』, 『사소절(士小節)』, 『기년아람(紀年兒覽)』, 『앙엽기(盎葉記)』, 『송사보전(宋史補傳)』, 『명유민전(明遺民傳)』 등을 지은 이덕무의 손자로 집안 가학에다 당대에 유행하였던 청조(淸朝)의 실학 등을 배경으로 방대한 저서를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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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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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연문장전산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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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죽지(海東竹枝)』는 우리나라의 풍속 전반을 600편에 이르는 칠언율시로 읊은 것이다. 한시 작가로 제국신문(帝國新聞)을 주재하였던 매하산인(梅下山人) 최영년(崔永年, 1856∼1935)이 1921년경에 지은 것을 그 제자인 송순기(宋淳夔)가 1925년에 출간한 것이다. 상·중·하 3편으로 나누어 역대의 기문 이사(奇聞異事)를 상편에, 속악 유희(俗樂遊戲), 명절 풍속, 음식 명물(飮食名物)을 중편에, 누(樓)·대(臺)·정(亭)·각(閣)·당(堂)·전(殿)·묘(廟)·사(祠)·원(院)·단(壇) 등을 하편에 실었다. 윤희구(尹喜求)의 서문과 정만조(鄭萬朝)의 제(題)가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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