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2 세시 풍속과 사회·문화
  • 03. 세시 의례와 지역 문화사
  • 중앙과 지방 관아의 세시 의례
  • 2. 지방 관아의 세시 의례
정승모

다음은 군·현을 단위로 하는 지방 관아의 사전적 세시 의례에 대해 알아보자.

조선 초기에 중앙 집권화의 방편으로 정부가 추진한 각종 지방 제의에 대한 정비는 『국조오례의』의 규정에서 그 전모를 찾아볼 수 있다. 그 규정에 따르면 산천·성황·풍운·뇌우 등 여러 명칭이 붙어 불리던 단(壇)들은 성황사(城隍祠)에 수렴하여 재배치하였고 대신 그 동안 지방의 토호들이 장악해 온 성황사를 흡수하거나 정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방 토호가 여전히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조처만으로는 기존의 풍속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었다. 즉, 지방 주도 세력이 교체되는 시기, 또는 사족화하는 시기까지는 기존 풍속의 본질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사전 정비 사업 이후 지방의 각 군현에서는 수령 주재 아래 사직단(社稷壇) 제사, 국가 사전(國家祀典)에 올라있는 산천 이외의 지역 산천에 대한 제사, 성황단(성황사)에서의 제사, 여단(厲壇)에 올리는 제사, 해신(海神) 및 도신(島神)에 대한 제사 등을 행하였다. 이사제(里社制)는 대부분 지역에서 시행되지 못하였지만 수령이 나서서 이를 실시한 일부 지역에서는 토신(土神)이나 동신(洞神)에 대한 제사도 있었다.

자연신에 대한 제사는 지방관이 국왕의 대행자 자격으로 올린 것 이다. 명산대천의 자연신에 대한 제사를 국가 사전을 모델로 하여 지방관이 주관하도록 한 것은 국가 사전 개편 내용의 일부로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즉, 국내 산천에 대한 일원적인 지배를 통하여 지방의 독자성을 약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역 나름의 관례나 풍습이 유지된 제사도 적지 않았다. 고려적인 지방 제의가 이 시기까지 지역에 따라 비록 음사(淫祀)로 취급되면서도 그 전통을 이어온 곳이 있는 반면, 지방관 또는 재지 사족들의 적극적인 공세로 폐지되거나 유교식으로 변한 곳도 있다.

◇ 사직(社稷)

조선시대에는 군·현에도 사직단이 세워졌는데 성 서쪽에 있었으며 사(社)·직(稷)이 단(壇)을 함께 하고 석주(石柱)와 배위(配位)는 없었다. 매년 2월과 8월의 상무일(上戊日)에, 그리고 문선왕(文宣王) 석전(釋奠) 때 제사를 올렸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민간 차원의 동제에서 후토신(后土神), 후직신(后稷神) 등이 대상신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직단의 본래적 의미와는 직접 관계없다.

『대록지(大麓誌)』는 충청도 목천현의 읍지로 1779년에 간행된 것인데, 이 읍지의 단묘조(壇廟條)를 보면 사직단은 현 서쪽 3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2월과 8월 상무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이것은 공식적인 관아 행사이기 때문에 이 제사와 시행 일자는 대부분의 읍치에서 지켜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외에는 지역에 따라 조금씩 시행 관습에 차이가 난다. 예컨대 1819년에 간행된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를 보면 충청도 아산 지역에서는 현 북쪽에 있는 여단에서의 여제는 봄에는 청명일, 7월 백중일, 겨울에는 10월 초하루 등으로 1년에 3차례 제사를 지내고 현의 동남쪽에 있는 성황단에서의 성황제는 봄, 가을, 겨울 각각 3차례 지내는 여제의 3일 전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경상도 울진군의 경우를 보면 이곳의 사직단과 성황사, 그리고 여단의 제향일이 각기 다르다. 사직단은 현 서쪽 고성리(古城里)에 있으며 2월과 8월의 상무일에 현사신(縣社神)과 현직신(縣稷神)을 제사하였고 여단은 현 북쪽 연지리(蓮池里)에 있으며 3월과 9월에 제사하였다. 단지 성황단은 읍내리(邑內里)에 있는데 1월 5일과 5월 5일이 제사일이라고 하였다.

1923년에 간행된 『용성속지(龍城續誌)』를 보면 전라도 남원은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모두 서문 밖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모두 폐지되자 일반민들이 그것을 개탄스럽게 여겨 매년 5월 10일에 사직단에서만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 성황(城隍)

고려 문종(1055) 때 선덕진(宣德鎭, 현재 함경남도 정평군 선덕면) 신성(新城)에 설치되어 춘추로 치제하였다고 하며, 정종 2년(1400)에 중앙에 제단이 설치되면서 주·현에도 단을 설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결과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성황사에 대한 재편이 이루어졌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기왕의 것이 그대로 존속되기도 하였다.

충청도 대흥현, 즉 현재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의 성황사는 봉수산(鳳首山)에 있는데 세속에 전하기를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사신(祠神)이라 하여 국초의 재편 이후에도 춘추로 본읍에서 치제하였다.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의 성황사는 현 서쪽 2리에 있었는데 강릉의 단오제를 연상케 하는 제의가 행해졌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자료에는 설치 초기 이후의 변형 과정도 보여준다. 이 지방 사람은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모여서 두 대(隊)로 나눈 다음 사당 신상을 메고 푸른 깃발을 세우고 여러 마을을 두루 찾는다. 마을 사람 들은 술과 찬으로써 제사하는데 나인들이 다 모여 온갖 놀이를 갖는다. 이 행사는 5일, 즉 단오절까지 계속한다. 나례란 고려 때부터 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만가와 궁중에서 잡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이고 나인이란 나례를 행하는 연희자인데 임금의 행차, 인산, 사신 영접 때도 동원되는 등 정부 조직 내의 말단에서 일하던 자들로 향리, 관노 등으로 구성되었다.

◇ 여제(厲祭)

성황단과 함께 세워진 여제는 성황제와는 3일 간격으로 행해진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조선 후기에 오면 이 역시 지역에 따라 차이가 난다. 또한, 여제는 군현 의례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상 전염병의 발생 빈도에 따라 성행이 좌우되었다. 실제 이것은 전염병 등 각종 재난이 빈발하였던 시기인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중엽 사이에 자주 행해진 바 있으며 민간 단위의 행사로도 확산되어 갔다. 강원도 일대의 민간화된 성황당에는 토지지신, 성황지신, 여역지신의 3위를 모시는 것이 대부분인 바, 군·현단위의 사직·성황·여제가 마을 단위의 행사로 확산되면서 한 곳으로 합쳐진 것 같다.

◇ 기우제(祈雨祭)

기우제는 세시 의례의 성격이 약하나 이 역시 문헌상으로는 군·현의 사직단에서 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성격상 제사 날짜가 지정되어 있지는 않고 가물 때 지내며, 응답이 있으면 입추 후에 보사(報祀)하였다.(『연려실기술』 별집 권4, 전고) 이 제의도 그 실행의 단위가 점점 내려와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도 자체적으로 행하게 되었는데, 모내기 직전의 저수(貯水)가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이앙법의 보급에 따라 더욱 확산되었다. 민간에서 행한 기우제는 연(淵), 소(沼), 봉(峰) 등을 기우처(祈雨處)로 하며 주술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공통점은 있 지만 마을마다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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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목(先牧)·마사(馬社)·마보단(馬步壇)

조선 초 정부에서 각 고을에 명하여 고을 중앙에 단을 만들어 선목의 신위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 재앙과 여역을 물리치게 하였다.

◇ 포제(酺祭)

포단은 마보단과 동일한 곳에 있으며 포신(酺神)을 향사한다.(『연려실기술』 별집 권4, 사전전고) 주·현의 포제는 포신을 단상 남향으로 설치하고 변(籩)과 두(豆)는 각각 4개씩 놓는다. 조선 초기 이후 사라진 이 포제 의례가 제주도에서만 존속되어 온 점은 특기할 만하다.

◇ 부군제(府君祭)

지방에 따라서는 향리들 주관으로 부군당(府君堂)에서 부군제가 행해졌다.

◇ 향교 석전례(釋奠禮)

향교에서는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알성례(謁聖禮)를 지내고 봄(2월 初丁日)과 가을(8월 初丁日)에 석전례(釋奠禮)를 행한다. 그 목적은 공자를 비롯한 유교 성현들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지방민에게 유교 이념을 확산시키고 교화시키는데 있었다.

또한, 군·현 단위로 실시되던 향약과 향음주례 등도 대부분 향교에서 모임을 가졌다. 조선 후기 에 들어와 향교의 교육 기능이 쇠퇴한 것과는 달리 제의의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주로 향반(鄕班)들의 주도 하에 지방 세력의 자치적인 행사 기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여씨향약에 근거한 유교적 향약 의례의 하나인 향음주례(鄕飮酒禮)는 이이가 해주에서 향약을 만들어 실시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부분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는데, 주로 향교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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