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3 세시 풍속과 생업: 생산
  • 02 농업과 세시: 적기적작, 농민생활사, 세시력과 농사력의 관계
  • 농서와 민속지리, 농법의 전파와 민의 대응 방식
주강현

조선 후기 각 지역에서 올라오던 『응지농서(應旨農書)』, 그리고 직접 현지를 돌아다니면서 지역적 토대를 두고 쓴 선진 농서의 압권을 이루었던 『천일록(千一錄)』의 경우는 각 지역의 현실과 농법의 간극을 좁혀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앙법의 전파 과정을 통하여 이들 농서들이 지니는 민속지리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 밭농사도 중요하였지만 역시 조선시대의 최대 농업은 쌀농사에 기준이 맞추어졌으며, 대다수 세시의 핵심도 이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이제 이앙법과 두레를 중심으로 하여 농법이 전파되고 백성들이 어떻게 생활상으로 수용하는가 하는 문제를26) 주강현, 『두레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 『한국의 두레』 1·2, 집문당, 1997 참조. 하나의 사례로서 다루고자 한다.

임진왜란 이후, 특히 17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이앙법은 남부는 물론이고 기내(畿內)까지 확산되고 있었다. 이앙법은 17세기 후반에는 남부 지방에 거의 다 확산되었고, 근 100년 뒤인 1799년 양익제(梁翊濟)의 『응지농서』에 이르면 직파에 대한 언급이 아예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불안전한 수리 사정과 지형적 조건은 지역에 따라 다른 여건을 보인다.

『응지농서』와 같은 시기의 『천일록』을 살펴보면27) 정조 20년(1796), 순조 4년(1804)에 應旨疏로 올렸으니, 18세기 벽두의 농업 상황을 잘 알려주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① 호남(湖南)·영남(嶺南)·호서(湖西): 대개 만도(晩稻)는 주앙(注秧)을 하나, 일부 조도(早稻)에 한해서 파종한다.

② 해서(海西)·서관(西關)·북관(北關): 대개 파종을 하고 주앙을 하지 않았다.

③ 기순(畿旬): 파종과 주앙이 반반이었다.

④ 관동(關東): 파종이 많고 주앙이 적었다.28) 『千一錄』 卷1, 建都山川風土關扼.

위 ①로 보아서 삼남은 대개 이앙법이 실시되었다. 반면에 ②의 이북 지방은 여전히 이앙법이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관서는 물론이고 해서 지방도 『천일록』 당시까지만 해도 이앙을 하지 않고 있었다.29) 『千一錄』, 山川風土關扼 海西, “大路以東 田多畓少…畓皆播種 不注秧.” 반면에 ④의 강원도는 산간 지방이 많은 탓에 파종이 많은 한전 지대(旱田地帶)의 특징을 잘 보여주면서도 이앙법이 확산되고 있는 모습도 동시에 보여준다. ③의 경기도는 지대에 따라서 파종과 주앙이 이루어지고 있음으로 해서 이앙법이 확산되는 과도기 양상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당시의 모내기 노래는 위 남부의 ①지역에서 발생하여 ③·④의 중부 지역으로 북상하고 있었다.

이앙법과 파종법이 혼재된 경기도의 양상을 살펴보면 당시의 과도기적 정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성이북(都城以西): 水田亦小泉源灌漑之處多乾播 又多注秧

도성동북(都城東北): 畓則多播種而小注秧

도성이남(都城以南): 小直播多注秧

화성부(華城府): 乾直播

개성부(開城府): 直播注秧上半

강화부(江華府): 宜土畓 則或播種或 則或注秧30) 『千一錄』 卷1, 建都山川風土關扼 畿旬條.

현재의 경기도 서쪽은 건파(乾播)와 이앙이 반반이고, 동북쪽은 파종이 많다. 여주·이천·안성 같은 도성 이남은 이앙이 많고, 바닷가 쪽인 화성부는 직파가 많다. 강화는 땅에 따라서 다르며, 개성은 반반으로 이루어진다. 남쪽에서 올라온 이앙법이 경기도를 하나의 계선(界線)으로 혼재되고 있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준다. 모내기 노래도 이같은 계선을 중심으로 움직여 나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표> 수전과 한전지대의 2모작과 부종법(付種法) 비교














일모작 50 61 42 51 83 73 98 97 99 99.9 100 99 100
이모작 50 39 58 49 17 27 2 3 1 0.1 · 1 ·
수도 70.3 55.4 64.2 60.7 70.7 52.2 66.0 53.7 47.2 35.7 53.4 37.7 19.7
육도 · · · · · · · · · 2.7 · · ·
출전: 印眞植, 『朝鮮)の農業地帶』, 生活社, 1940.

따라서 19세기 초반 모내기 노래의 분포 계선은 경기도와 강원도를 잇는 선으로 여겨진다. 두레는 삼남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나 이앙법 확산과 더불어 차츰 북상하였고, 심지어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북상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결과, 두레가 북상을 계속한 계선이 형성되었다.31) 북한 민속학계에서 현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195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두레의 북방 한계선은 동해안의 안변벌에서 서해안의 연안벌로 이어진다. 대략 임진강 줄기를 따라 판교·안협·이천·토산·금천·배천을 연결하는 선이다(전장석, 「두레에 관하여」, 『문화유산』 2, 1957, p.16).

첫째, 두레의 계선은 논농사 지대와 밭농사 지대의 경계선과 일치한다. 아래의 세 가지 농업 지대에서 그 중간인 제2지역에 두레의 계선이 지나간다.

① 논농사 지대: 전라도와 경상도, 경기도, 충청남도를 포괄하는 남부 지역은 쌀농사 지대로 전·답을 통하여 2모작이 가능하다. 이모작은 전라·경상도·충청도에 집중되어 있고, 그 이북 지방은 극히 일부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수도(水稻)와 육도(陸 稻)가 전체 곡식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에서 평남에만 유일하게 2.7%로 나타나고 있다.32) 印貞植, 『朝鮮の農業地帶』, 生活社, 1940. 이는 결국 건답 지역이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황두 풍습이 건답 지역에 잔존하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② 혼합 지대: 충청북도와 황해도, 강원도를 포괄한 중부 지방의 대부분은 답·전 혼합 지대다. 답 비율이 20∼50%며 미곡과 잡곡의 비중이 거의 균등하다. 전답 지대와 답작 지대의 중간이다.33) 대개 논은 下三道가 비옥하고, 경기도·황해도가 다음이며, 강원도·함경도·평안도가 그 다음이라고 하였다. 밭은 비옥의 정도가 대개 같다고 하였다(『燃藜室記述』 別集 卷11, 政敎典故).

③ 밭농사 지대: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로 답 비율은 20% 이하이다.

둘째, 두레의 계선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북방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서 두레의 분포는 전파 정도에 종속되었다. 황해도에서 두레가 있을 성 싶은 재령·신천벌에는 정작 없고 산간벽지인 신계·곡산에 있는 것은 신계·곡산이 두레 분포 지역과 서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일록』 당시에 해서 지방은 모두 파종을 하고 이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이앙이 넓게 퍼진 것은 19세기 이후다.34) 북한에서 조사한 자료들은 황해도(해주·신천·송화·신계·곡산 등)와 강원도 북부에 전파된 두레가 이남으로부터 왔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19세기 말기에 이르도록 두레는 남쪽 중심이었음을 알려주며 두레의 북쪽으로의 확산이 최근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전장석, 앞의 논문, p.16, “개풍군 광수리 최승록(70)·삼성리(74)·삼성리(74)의 증언에 의하면, 60년 전만 하여도 신해방지구에서조차 건파 농사를 하였으며, 두레는 그다지 보급되지 않았다 한다. 홍기문 동지의 증언에 의하면 북강원도의 농악은 일제 강점 초기에 남조선에서 들어왔다고 하며, 리상춘 동지에 의하면 개성 이북 황해남도에 두레가 파급된 것이 그다지 오래지 않다고 한다”).

셋째, 두레 계선은 농기구 및 축력 이용과 연계된다. 논농사와 밭농사 경작에 따르는 경영상 차이는 소와 보습 사용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보습 경작에서 소를 한 마리 세우는 지대와 두 마리 세우는 지대와의 구별은 영농 방법상 노동 조직에 따른 것이다. 주로 논농사 경작에서는 축력보다 인력에 의거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

18세기 『천일록』을 보면, 축력 이용도도 둘로 나뉜다. 기순의 이남과 한성부, 강화부, 영남 남부, 호서와 호남의 평야를 제외한 지역은 2우경(二牛耕)이었다. 북관·서관·해서·관동은 2우경이고, 호서와 호남·영남의 산간도 2우경이었다. 한수 이북 지방에서 강원도를 연결하는 선은 두 마리를 매우는 지역이고, 이남에서도 충청북도나 경상·전라도의 산곡은 두 마리 지대였다.35) 『千一錄』, 山川風土關扼條. 이 같은 분포는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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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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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계선은 도작 문화의 계선과 연계된다.36) 주강현, 「大同굿의 分化變遷硏究」, 경희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p.26. 두레가 이루어진 곳에서는 어느 곳이나 풍물굿·호미씻이·백중놀이·줄다리기 같은 두레 문화가 보급되었다. 그러나 두레가 퍼지지 않은 지역에도 두레 문화가 확산되었다. 따라서 두레의 계선이 두레의 문화적 분포와 그대로 일치되는 경우도 있고, 일치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① 경기·강원·황해를 잇는 선이 미작 지대로, 그 이북은 일부 지역에서만 호미씻이와 풍물굿이 나타난다. 전라·경상·충청은 100%로 이루어지고 있다. 호미씻이 지역이 두레 분포 지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반면에 풍물굿만 있는 지역은 훨씬 북으로 올라가서 대동강과 영흥강을 연결하는 지대를 포함한다. 두레 노동 조직이 보급되지 않았는데도 풍물굿이 전해진 지역은 문화 전파의 결과로 보인다. 함주나 정주, 청진과 같은 지방에 풍물굿이 있는 것은 이주민에 의한 전파로 해석된다.37) 전장석, 앞의 논문, p.17.

② 평북의 경우 과거 황두 계열의 노동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령 평남 순천 지방에서 5·6월에 청년들이 계를 조직해서 계원집의 김매기를 돌아가면서 해주는데, 휴식 시간에 북소리에 맞춰서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고 춤도 추면서 즐겁게 공동 작업을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보고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계는 특성상 황두로 봄이 정확할 것이다.

③ 미작 지대인 남부에는 줄다리기, 이북에는 석전 등이 성행한 것으로 보아 줄다리기와 농경 문화와의 관련이 두드러지고 있다. 풍농·점풍에 관계된 거북 놀이 등이 풍물과 결부된 길놀이 형식으로 경기도·충청도에, 소놀이는 황해도 일대에 자주 보고 되고 있다. 줄다리기와 금줄의 상한선이 바로 두레계선과 일치한다. 따라서 호미씻이, 금줄, 줄다리기 등은 전형적인 도작 문화의 소산으로 두레계선과 일치함을 알 수 있고, 풍물굿은 농경 작업을 떠나서 하나의 농촌오락적 기능으로도 쓰였기 때문에 두레 계선 이상으로 북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표> 도별 풍물뭇 호미씻이 분포도38) 村山智順, 『朝鮮の鄕土娛樂』朝鮮總督府調査資料47, 1941. 村山의 보고서는 식민지 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조사 방법상에서도 식민통치기구를 이용한 간접 조사라는 명백한 제한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민속놀이의 전국적 분포를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지역(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강원 평북 평남 함북 함남
총지방수 22 10 14 15 22 23 19 17 21 15 17 12 16 223
풍물굿 13 7 12 15 19 22 19 7 17   4 1 2 138
호미씻이 19 10 12 14 19 23 17 10 17 2 2   1 146

즉, 『동국세시기』 등에 잘 반영되어 있는 많은 풍습들은 고려시기의 농법 등과는 맞지 않는 것들이 많으며 거의 조선 후기적 상황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농경 풍습을 담보하고 있는 셈이다. 농법의 변화, 작부 체계의 변화, 종자의 변화 등이 새로운 농민 풍습을 발생시킨 것이다.

조선시대 생업 기술은 전기에서 후기로 옮겨가면서 변화 양상이 사뭇 달랐기 때문에 세시 풍속상의 변화는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39) 세시 풍속과 농사력 관계를 알려주는 조선시대 자료는 매우 많다. 첫째, 農書類로서 『四時纂要抄』(15세기)·고상안의 『農家月令歌』(17세기)·『增補山林經濟』(18세기)·『閨閤叢書』(19세기)·『林園經濟志』(19세기)·『農家月令』(19세기)·『千一錄』(19세기) 등을 들 수 있다. 둘째, 『京都雜志』(18세기)·『東國歲時記』(19세기)·『洌陽歲時記』(19세기) 같은 歲時記를 꼽을 수 있다. 따라서 21세기까지 전승되는 세시 체계의 대부분이 조선 후기적 산물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중에는 목우희처럼 고려시기에도 분명 존재하였던 것들이 있으며, 다양한 농점 전통도 상고시대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나 집단적 풍습들의 상당수가 조선 후기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40) 주강현, 『두레연구』 참조.

첫째,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이앙법이 실시되면서 예전에는 없던 모내기가 선진 농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모내기를 전후하여 단오 명절은 농촌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로 새 롭게 인식되었다. 그러나 단오 때는 워낙 바쁜 절기라 충분한 휴식을 취할 겨를이 없었다. 한재(旱災)가 들면 모를 낼 수가 없었고, 같은 마을에서도 천수답은 늘 물에 따라서 농사를 지어야 하였기 때문이다. 모내기 풍습은 그 자체 농촌의 새로운 풍습이 되었다. ‘하지 전 3일 후 3일 모내기’ 같은 농사력은 하지 세시와 매개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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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농을 기원하는 내농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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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신기의 장대 끝에 다는 꿩장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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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김매기에서도 많은 변화가 따랐다. 삼국시대나 고려시기, 조선 전기에도 김매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질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두레에 의해서 공동체적인 김매기 관행이 이루어졌다. 두레의 김매기는 공동 오락, 공동 노동, 공동 식사의 3요소를 갖추었으며, 이전에는 없던 풍속이다.

모내기로부터 김매기에 이르는 장기간의 힘겨운 노동이 사실상 끝나는 지점에서 두레는 대대적인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물론 조선 전기에도 한 여름철에 농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놀이를 즐기는 일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놀이의 성격과 집단적 힘의 강도는 전혀 달랐다. 모내기부터 김매기에 이르는 장기간의 공동 노동은 두레 성원들에게 단합된 힘을 부여하였고, 노동의 결과 얻어진 공동 수입을 토대 삼아 하루를 실하게 보낼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앙법의 결과 광작(廣作)도 이루어졌고, 지주층에서는 두레 성원들의 노고를 치하해야만 이듬해에도 농사에 지장이 없었기 때문에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농사 장원례와 같이 위세 등등한 일꾼들의 축제는 조선 전기에는 없던 풍습들이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는 동계와 하계로 농한기의 이중 구조가 더욱 명백하게 되었다. 동계 농한기는 대체적으로 전답에서 김장채소류를 제외한 모든 농작물을 추수하고 난 10월 하순부터 익년 2월 중하순까지의 동지에서 춘계에 걸쳐 흐르는 약 5개월 간의 장기간을 지칭하였다. 하계 농한기는 김매기를 끝내고 음력 7월에 접어들면서 추수 직전까지의 ‘어정 칠월 건들 팔월’ 2개월여에 이르렀다. 『동국세시기』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정월: 정초(내농작·농점), 대보름(볏가리·마을굿·쥐불놀이), 입춘(입춘방)

② 2월: 초하루(머슴날·콩볶기·풍신제)

③ 3월: 삼짇날, 청명, 한식, 곡우

④ 4월: 초파일

⑤ 5월: 단오(천중부적·익모초·그네뛰기·씨름)

⑥ 6월: 유두(유두연), 삼복(개장국)

⑦ 7월: 칠석(칠석놀이), 백중(백중놀이)

⑧ 8월: 벌초, 추석, 보리풀

⑨ 9월: 중구, 단풍놀이, 추수

⑩ 10월: 시제, 김장, 추수

⑪ 11월: 동지(동지팥죽)

⑫ 12월: 납일, 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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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김장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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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휴한기인 정월과 하계 휴한기인 7월 풍습이 두드러진다. 정초의 마을굿과 여름에 행하는 두레굿(칠석놀이·백중놀이)이 그것이다. 정초에 마을 대동의 공동체적 신격을 모시는 마을굿과 두레에서 행하는 하절기의 두레굿은 양 축을 형성하는 조선 후기 마을 문화로 정착되었다.341) 농사의 週期는 농작물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정월 준비기를 거쳐서 2월부터 4월까지 파종기, 5월부터 7월 성장기에 이어 8월부터 10월까지 수확기, 11월부터 휴한기의 저장기라는 윤곽이 드러난다. 따라서 생업력, 즉 농업에서 가장 중시되는 시점은 대개 휴한기에 명절을 보내고 난 다음에 행해지는 2월 풍습, 그리고 농번기가 끝난 하계 휴한기라고도 할 수 있는 ‘어정 7월 건들 8월’의 7월 풍습이 주목된다.42) 주강현, 「조선 후기 두레의 성립과 농민축제의 확산」, 『충청문화연구』4, 한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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