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3 세시 풍속과 생업: 생산
  • 03 어업과 세시: 적기적획, 어민생활사, 세시력과 어업력의 관계
  • 어보의 속방과 적기적획의 시후
주강현

우리의 어업 전통에서 어업 관련 고문헌의 실체는 한마디로 말하면 매우 빈약하기 그지없어 어떤 논쟁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자료가 태부족인데다가 『동국세시기』류도 농업에 초점을 두었을 뿐, 어쩌다 청어 천신 따위의 몇 가지 개별 사항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있다.

농서들의 적기적작 논리와 마찬가지로 어민들 역시 고기 잡을 시기와 장소를 중시하였다. 이를 논자는 적기적획(適期適獲)이라는 새로운 학술 용어로 제안하고자 한다.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힘의 관계를 통하여 만들어진 농업 관계가 농작(農作)이라 한다면, 반대로 어작(漁作)은 있을 수 없으며 어획이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농사’가 주어진 땅에서 이루어지는 고정체적 활동이라면, 어업은 고정체적 어장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어장을 따라 이동한다. 농업에서 농민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종곡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어민들에게는 어종이 알아서 찾아와주길 바랄 뿐이다. 또한, 어업은 물때에 따라서 이루어지므로 농사 주기와는 주기 자체가 다르다.43) 이기복, 「潮汐·潮間帶와 漁業生産風習」, 『역사민속학』 16, 한국역사민속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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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의 풍어굿(충청남도 서산 창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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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의 풍어에 사용되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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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농민 대비 어민의 속신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록은 매우 드물다. 즉, 농업이 땅을 매개로 하여 어느 정도의 시기 이완이 가능한 측면이 있다고 한다면, 어업이야말로 적기적획의 논리가 관철되는 곳이다. 풍어의 기회는 인간의 힘으로 되지 않는 측면이 강하므로 그만큼 농업에 비하여 어업 쪽의 속신이나 제반 관행이 강하게 생활 속에 관철된다 하겠다.

전통시대 수산인의 처지는 하층민으로 ‘상것’ 대접을 받았다. 또한, 오로지 수탈 대상으로만 간주되었다. 바다의 생리(生利)는 넉넉한데도 군첨(軍簽)이 미처 오지 않고 환자(還上)가 오지 않는 까닭으로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한 처지에서 한국 수산사 연구 역시 아무래도 실학파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실학파들은 민중 의 처지를 고려하면서 몇 종류에 불과하지만 괄목할 만한 수산서를 출간하였다. 사실 조선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본격적인 의미에서는 처음으로 다양한 형태의 생산 관계 저술이 이루어졌던 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농서가 다수 편찬된 것에 비한다면, 수산서는 질과 양에 있어서 비할 바가 못 된다. 그만큼 조선시대의 경제 정책은 농업 위주였으며 수산은 어디까지나 반농반어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몇 권의 중요한 수산서가 실학파들에 의하여 출간된다. 1803년(순조 3)에 담정 김려(金鑢)는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펴낸다. 김여가 1801년 천주교 박해 때 2년 반 동안 진해에 유배되었을 당시, 어부인 동자를 데리고 매일 같이 근해에 나가 각종 어류의 생태, 형태, 습성, 효용 등을 세밀히 조사 관찰하여 이를 엮은 책이다.44) 이 책은 藫庭叢書 外書로 불리기도 하며, 1책 43장의 한문필사본이다.

『우해이어보』와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귀중한 수산서로 정약전(丁若銓)에 의하여 『자산어보(玆山魚譜)』가 저술되었다. 정약전도 김여와 마찬가지로 흑산도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며, 창대라는 어부를 만나서 『자산어보』를 남겼다.45) 嘉慶 甲戌(1800)에 自書를 썼다. 서유구의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는 이름과 달리 목축에 관한 기술은 없고 어류학을 다루고 있다. 1820년에 저술하였으며 본문 7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유구는 일찍이 종합농업서인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서술한 바 있으며 이들 책 안에서도 어업에 관한 대목을 기술하고 있다. 그는 1834년 호남 순찰사로 민중의 피폐상을 목격하고는 고구마 재배를 장려하기 위하여 『종저보(種藷譜)』를 저술하는 등 민생에 역점을 두었다.

조선이 멸망할 즈음, 실학파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일제의 힘으로 출간된 마지막 수산서가 대한제국기에 편찬된다. 통감부와 조선해수산조합이 대한제국기 농상공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전국의 연안과 도서 및 하천에 대한 수산 실태를 조사 기록한 4권 4책의 『한국수산지(韓國水産誌)』(1908∼1911)가 출간된 것이다. 『한국수산지』는 일제의 침략 목적을 위하여 편찬된 수산서임에는 분명해도, 내용상으로 볼 때 상당히 정확한 사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축적시킨 앞선 수산서 출간 경험이 다수 반영되어 있다.46) 주강현, 「21세기 해양의 시대에 ‘해양수산지’가 갖는 의미망」, 『한국수산지』 해제집, 민속원영인본 서문(1911년 조선총독부 발행), 2001. 이 책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전에 그 이후로는 어떠한 국가적 목표를 지닌, 『한국수산지』를 능가하는 종합적인 수산서 출간을 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해이어보』, 『자산어보』, 『난호어목지』를 잇는 의연한 전통을 상실한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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