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3 세시 풍속과 생업: 생산
  • 03 어업과 세시: 적기적획, 어민생활사, 세시력과 어업력의 관계
  • 수산서와 민속 지리, 어종의 분포 양상과 시후
주강현

물고기는 잡히는 지역이 분명하게 갈린다. 동해에 명태가 잡힌다면 서해에는 당연히 명태가 없다. 겨울에 명태가 잡힌다면, 여름에는 명태가 없다. 서해에 조기가 잡힌다면 동해에는 당연히 조기가 없다. 봄에 조기가 잡힌다면, 가을에는 조기가 없다. 그런데 같은 조기라도 지역에 따라서 잡히는 시기가 차이가 난다. 칠산 바다의 조기와 연평도의 조기, 평안도 철산의 대화도 조기가 각각 밑에서부터 회유하면서 올라간다. 연평도 조기가 산란기답게 알이 꽉 찬 조기라면, 대화도에서는 산란을 마친 조기들이 많이 잡힌다. 법 성포 조기는 봄철이라 굴비를 만들 수 있지만, 대화도쯤에서는 이미 시기가 늦어져서 더위 때문에 굴비를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영광 굴비는 봄철에 말리는 것이 된다. 같은 조기라도 생태적 주기가 다르며 이에 따라 어민들의 생활도 달라진다. 가령, 법성포에서는 4월 말이면 조기잡이의 전성기가 끝이 나기 때문에 5월 5일 단오날에 거창하게 법성포 단오제를 지내면서 밀린 노고를 풀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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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 단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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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 단오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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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 단오제는 조기잡이의 마무리와 직결되는 세시로 인정되기 때문에 법성포 단오제의 토대에 생업 문제가 깔려 있다. 이는 향촌의 권력 동향과도 밀접히 관련되는 강릉의 단오제와 전적으로 대비된다. 강릉단오제가 강릉 사회의 향권 동향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는다면, 법성포 단오제는 조기잡이를 끝낸 어부들이 중심이 되어 치르는 소박한 향촌의 세시인 셈이다.

『동국세시기』 3월 월내(月內)에 ‘석수어로 국을 끓여먹는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는 두말할 것 없이 봄철 조기잡이의 결과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3월에만 조기가 잡혔을까. 조기를 중심으로 시기를 판별해 본다.49) 주강현, 『조기에 관한 명상』, 한겨레신문사, 1998.

연평도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조기잡이로 명성을 날렸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토산은 석수어(조기)가 남쪽 연평평(延平坪)에서 나고, 봄과 여름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이어 그물로 잡는데,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쓴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 전기부터 조기떼가 대규모로 잡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영광의 파시평(波市坪)과 더불어 황해도 연평평에서의 조기잡이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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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조기파시
연평도 조기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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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 파시는 연평 파시평, 연평 작사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조기씨가 말랐지만, 불과 30∼40년전인 1960년대까지만해도 연평 파시가 벌어져서 수천 척의 배가 몰려오는 성황을 이루었다. 칠산 파시와 더불어 최대의 조기 어장을 형성하면서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남겼다. 조기잡이 중선의 주어장은 연평도 서쪽 10∼15리에 있었다. 어구는 중선, 건강망, 궁선, 어살 등이 쓰였다. 중선은 연평도 앞바다보다도 서쪽 에 길게 돌출한 황해도 등산곶(登山串) 근역과 구월봉 아래에서 조업을 하였는데, 수심 20m를 넘는다. 구월봉 아래는 이른바 ‘구월이 바다’로 불리던 구월반도가 길게 늘어진 곳이다. 구월봉은 조기잡이 배들이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는 가늠잡는 봉우리다. 등산이와 구월이 앞바다는 자잘한 여와 모래밭으로 형성되어 있어 조기에게 최적의 산란장이었다. 옛 만호진이 있던 ‘등산이’라고도 부르는 등산포(登山浦)가 자리잡고 있으며, 청송 백사로 유명한데 모래가 바람에 날려 백사정을 이루어 사냥터로도 유명하였다.

연평 파시에는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등 각지의 배가 몰려왔다. 연평도 조기는 멀리 남지나해에서 출발하여 북상한 조기들이었다. 조기 선발대는 음력 3월 하순에 이미 연평도에 당도하였으며, 후발대도 4월 초파일 무렵에는 모두 연평도에 도착하였다. 연평도에서 4월 초파일을 ‘조기의 생일’이라 부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칠산 바다에서 곡우사리가 펼쳐졌다면, 인천과 연평 바다에서는 소만 사리가 펼쳐졌다. 조기잡이가 끝나는 5∼6월은 ‘파송사리’라 불렀다. 반면에 새우잡이를 포함한 모든 고기잡이가 완전히 끝나는 10월은 ‘막사리’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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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마포 나루터
1900년 마포 나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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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가 잡히면 시선배(柴船)가 몰려왔다. 마포 나루에서 얼음을 잔뜩 실은 시선배들이 땔깜, 식량 따위를 싣고 연평도까지 와서 사로잡은 조기와 맞바꾸었다. 일부는 해주항을 거쳐 개성 부잣집으로 실려가기도 하였다. 얼음에 차곡차곡 채워진 조기들은 강화도 북쪽을 통해 그대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마포 나루까지 직진하였다. 이들 상인들을 경강상인(京江商人)으로 불렀으니, 마포 새우젓 동네까지 진출하여 서울의 생선 공급을 도맡아하였다. 『동국세시기』에 등장하는, 3월에 조기국을 먹었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논리적으로 4월 초파일을 ‘조기의 생일’로 부를 정도로 조기 어획이 성하였으니, 세시기에서 4월에 조기국을 먹는다로 기록하였어야 더 타당할 일이다. 따라서 『동국세시기』에 등장하는, “3월에 조기국을 먹는다.”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임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연평 파시 이전에 이루어졌던 칠산 파시는 같은 조기잡이도 지역에 따라 각각 시기가 달랐음을 말해준다. 일찍이 지도 군수 오횡묵(1833∼?)이 쓴 정무 일기 『지도군총쇄록(智島郡叢刷錄)』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법성포 서쪽 칠산 바다에는 배를 댈 곳이 없고 …… 고기를 사고팔며 오가는 거래액이 가히 수십만 냥에 이른다. 가장 많이 잡히는 물고기는 조기로 팔도에서 모두 먹을 수 있다.

칠산 바다는 법성 근역의 칠뫼뿐 아니라 북쪽의 위도까지 아우른다. 곡우가 오면 그날 한 시부터 열세 시 사이에 정확하게 조기떼가 울었다. 머나먼 남쪽 바다에서 올라온 조기가 이리도 정확하게 칠산 바다에 착지하여 첫 울음을 뱉어냈다. 자연의 오묘한 이치였다.

어부들은 대나무통을 바다에 넣고 한쪽 귀를 막고서 울음소리를 들었다. 조기떼가 올라오는 시각을 예견하는 놀라운 ‘민속 지식’을 칠산 어민들은 두루 체득하고 있었다. 법성포 구수산의 철쭉꽃이 뚝뚝 떨어져 바다를 물들이면 어민들은 조기떼가 왔다는 신호로 알아듣고 이내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때 잡아들인 조기를 말려서 오가잽이(오사리에 잡는다는 뜻) 굴비를 만들었으니, 임금님 수랏상에 오르던 족보다. 그 전통이 오늘에 이어져서 법성 굴비가 되었다. 따라 서 같은 조기잡이라도 지역에 따라 시기가 전혀 달랐으니 연평도와 칠산의 경우가 극적으로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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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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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청어를 중심으로 세시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즉, 청어라는 물고기 한 가지 사례를 중심으로 『동국세시기』의 청어 내용을 역사민속적으로 비판하고자 한다.50) 주강현, 「청어와 민중생활사」, 『해양과 문화』 3, 해양수산부 해양문화재단, 2000. 이는 세시기에 등장하는 사료들을 비판적으로 검증해야만 할 것이다.

『동국세시기』 11월 월내(月內)의 내용을 살펴보자.

임금은 이 달에 청어(靑魚)를 천신(薦新)한다. 경사대부의 집에서도 이를 행하였다. …… 청어 산지로는 통영·해주가 가장 성하며, 겨울과 봄에 진상한다. 어선이 경강(京江)의 연안에 닿으면 온 시내의 생선 장수들이 거리를 따라 소리를 지르며 팔고 다닌다. 통영에서는 갑생복(甲生鰒)과 대구어(大口魚)도 잡혀 진상한다. 나머지는 예에 따라 재상들에게 보낸다.

분명히 홍석모의 시대에는 해주·통영 등에서 청어가 많이 잡혔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같은 사료는 매우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물론 청어는 조선 전기에도 다획 어종이었다. 충청도·전라도·평안도에서 조기가 많이 잡히고 있었지만, 청어는 서남동해를 막론하고 분포되었던 다획 어종이었다. 예종 원년(1469)의 『경상도 속찬지리지』 어량소산조(魚梁所産條)에 여러 가지 어류와 1종의 연체동물이 실려 있는데 빈도 수순으로 나열해보면, 은구어(銀口魚)·대구어(大口魚)·청어(靑魚)·이어(鯉魚)·황어(黃魚)·전어(錢魚)·홍어(洪魚)·연어(年魚)·홍어(紅魚)·사어(沙魚)·고도어(古都魚)·백어(白魚)·소어(蘇魚)·위어(葦魚)·수어(水魚)·석수어(石首魚)·송어(松魚)·문어(文魚) 순이다. 민물고기인 은어, 남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던 대구 등을 제외하면 청어가 단연 수위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청어가 특산물로 등장하는 지역은 다음과 같다.

서해안: 충청도 공주목 남포현·비인현, 홍주목 태안군·서산군·보령현, 전라도 전주부 만경현·부안현, 황해도 해주목 옹진현·장연현·강령현, 황해도 풍천군

동해안: 경상도 경주부 동래현·영일현, 함길도 경원도호부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 볼 때, 황해도로부터 전라북도까지 중부서해안, 부산에서부터 함경도까지 전 동해안을 포괄하되, 이상하게 강원도와 남해안은 적시되지 않았다. 적시되지 않았다고 하여 잡히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겠으나, 아무래도 위의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어획되었던 것 같다. 사료 비판이 전제가 되어야겠지만, 단위 지역별로 나타나는 현상이 매우 흥미롭다. 실제로 청어는 한해성 어종으로서 동서해안, 일본 북부, 발해만, 북태평양 어종임을 감안할 때, 비교적 정확한 자료인 것 같다.

조선 후기 『여지도서』에 실린 수산물을 일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수어(秀魚)·석수어(石水魚)·전어(錢魚)·홍어(紅魚)·홍어(洪魚)·청어(靑魚)·도어(刀魚)·백어(白魚)·사어(鯊魚)·금린어(錦鱗魚)·마어(麻魚)·휘어(葦魚)·민어(民魚)·진어(眞魚)·은구어(銀口魚)·대구어(大口魚)·리어(鯉魚)·취사어(吹沙魚)·밀어(密魚)·도미어(道味魚)·천어(川魚)·철어(鐵魚)·조린어(烏鱗魚)·세미어(細尾魚)·황소어(黃小魚)·동백어(冬白魚) 등51) 『輿地圖書』, 土山.

청어는 아무 때, 아무 곳에서나 많이 잡혔을까. 성호 이익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금 생산되는 청어는 옛날에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마다 가을철만 되면 함경도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형체가 아주 크게 생겼다. 추운 겨울이 되면 경상도에서 생산되고, 봄이 되면 차츰 전라도와 충청도로 옮겨간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황해도에서 생산되는데, 차츰 서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점점 잘아져서 천해지기 때문에 사람마다 먹지 않은 이가 없다.

울산(蔚山)·장기(長鬐) 사이에는 청어가 난다. 청어는 북도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하여 강원도의 동해변을 따라 내려와서 11월에 이곳에서 잡히는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점점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서울로 수송하는데, 반드시 동지 전에 서울에 도착시켜야 비싼 값을 받는다. 모든 연해에는 청어가 있다. 청어는 서남해를 경유하여 4월에 해주까지 와서는 더 북상하지 않고 멈춘다. 그러므로 어족이 이곳(영남)처럼 많은 곳이 없다.52) 『星湖僿說』 卷8, 人事門 生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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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의 장기현(지금의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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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현의 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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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청어가 동해에서 황해로 이동하는 회유어로 본 것 같다. 회유어를 관찰한 것까지는 좋은데, 정확도는 의심된다. 청어는 본디 동해 청어와 서해 청어가 별도로 있는 것으로 보이며, 품종도 다소 다르다. 서해 청어는 특별히 ‘비웃’이라고 불렀다. 동해의 청어와 황해의 청어가 내통하는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수온이 낮아지는 겨울에 동해의 청어가 전라남도 해안을 통하여 황해에 침입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사실 남해안산 청어의 서한(西限)은 경상남도 사천만 근처까지이다.

이미 조선 전기의 허균은 『성소부부고』에서, “청어는 4종이 있다. 북도산은 크고 속이 희다. 경상도산은 껍질이 검고 속은 붉다. 전라도산은 조금 작으며 해주에서 잡은 것은 2월에 맛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청어의 종류가 달랐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자산어보』에서는 황해 청어의 척추 뼈 수를 74마디, 영남 동해산 청어는 53마디라고 하여 다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황해 청어는 영남해 청어에 비하여 1/2이나 더 크다고 언급하면서, 황해 청어와 동해 청어는 약 40년을 주기로 황해 쪽이 성할 때는 동해 쪽이 쇠하고, 동해 쪽이 성할 때는 서해 쪽이 약해진다고 기록하였다.53) 정문기, 『魚類博物誌』, 일지사, 1974, p.128. 정약전이 어부 창대를 통하여 구전 기록을 옮긴 것으로 보이나, 척골 수 계산법은 불분명하다. 그런데 박구병이 1976년 11월 25일에 같은 흑산도 근해에서 조사한 것을 보면, 척추골이 52개로 창대가 증언한 바와 유사하다. 재미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54) 박구병, 「한국청어어업사」, 『부산수산대학논문집』 17, 1976.

서해 쪽에서 풍어일 때는 전라남도 위도를 비롯하여 전라북도 고군산열도, 충청남도 서산군의 안흥, 황해도 용호도, 해주도 및 평북 철산군 원도 등의 근해로 몰려들었다. 주 산란장은 충청도 안흥과 황해도 용호도 내만이었으니, 『동국세시기』와 『성호사설』에서 ‘해주에서 많이 잡힌다.’는 말은 바로 용호도를 두고 말함이다. 용호도는 조기의 메카인 연평도에서 지척거리이며, 해주만은 조기들의 귀향처, 철산군 원도는 조기의 마지막 회유지이기도 하다. 동해에서는 경상북도 영일만이 가장 중요한 산란장이고, 다음은 강원도 장전만, 함남 원산만, 함북 경성만 및 조산만의 순이었다.

서해 청어는 황해도와 충청도 사이에 널리 분포하여 그 이북 지방에서는 귀하였다. 이 서해 청어가 동해 어족의 일파인 것 같으나 과거부터 이 두 바다의 청어가 서로 교류하고 있는지, 혹은 서해 청어가 독립적으로 몇 대를 거듭하여 번식하는 동안에 동해 청어와 관계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한 증거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양쪽 청어는 적어도 수온에 따라 이동함이 분명한 것 같다.55) 정문기, 앞의 책, p.128. 청어는 해양 조건의 변화에 따라서 그 기복이 매우 심하다는 기록이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56) 박구병, 『한국어업사』, p.84.

조선 전기에 고군산열도가 바라보이는 부안의 청어에 관하여 현감이 올린 상소가 전해진다. 청어의 명산지이면서도 불확실한 청어 때문에 고통 받고 있음을 아뢴다.

신이 맡은 부안현 서해에 활도가 있는데, 옛날부터 청어(靑魚)가 많이 나서 서민(庶民)들 중 전답 없는 자들이 섬을 의지하여 어전을 매고 이를 보는데, 예전에는 15개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상정할 때, 이 섬 어전의 수가 다른 곳의 배나 된다 하여 청어의 수량을 많이 정하니 관에 바치는 수량이 많다고 하겠으나 전일 많이 잡힐 때에는 백성들이 그런대로 어전 설치하기를 즐거워하였습니다. 지난 을축년 뒤로는 청어가 나지 않고 세납은 전과 같아, 어전 설치자들의 소득이 바치는 수량을 충당하지 못하니, 지난 정묘년 간에 국가에서 그 폐를 분명히 알고, 병인년 이전의 황폐한 어전은 모두 세를 거두지 말게 하며, 정묘년 이후의 황폐한 어전은 자세히 실지를 캐어 세를 면하게 하니, 덕이 지극히 넉넉합니다.57) 『中宗實錄』 卷13, 中宗 6년 4월 8일 丁亥.

이익과 정약전도 이렇게 말하였다.

『징비록』에 “해주에서 나던 청어는 요즈음에 와서 10년이 넘도록 근절되어 생산되지 않고, 요동(遼東) 바다로 옮겨가서 생산되는 바, 요동 사람들 은 이 청어를 신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그 당시에는 오직 해주에서만 청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물고기 따위는 매양 시대의 동토와 기후를 따라서 다니기 때문에 요즈음 와서는 이 청어가 서해에서 아주 많이 난다고 하니, 또 요동에도 이 청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58) 『星湖僿說』 卷6.

청어가 요해로 건너가고 황해도에서는 사라진 사실이 흉흉한 소문에 끼일 정도로 황해도에서 청어의 소멸은 당대에 널리 알려진 문제였다.

건륭 경오(乾隆庚午, 1750) 후, 10여 년 동안은 풍어였으나 중도에서 뜸하여졌다가 그 후 다시 가경 임술(嘉慶壬戌, 1802)에 대풍어였으며, 을축년(1805) 후에는 또 쇠퇴하는 성쇠를 거듭하였다. 이 물고기는 동지 전에 영남 좌도에 나타났다가 남해를 지나 해서로 들어간다. 서해에 들어온 청어 떼는 북으로 올라가 3월에는 해서에 나타난다. 해서에 나타난 청어는 남해의 청어에 비하면 배나 크다. 영남·호남은 청어 떼의 회유의 성쇠가 서로 바꾸어진다.59) 『玆山魚譜』.

위에서 언급한 1802년 무렵을 명시하는 기록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확인된다. “우리나라에는 100여 년 전에 심히 성하였다가 중간에 절산되었는데, 1798∼1799년(정조 22∼23)에 다시 나타나 조금 흔해졌다.”고 하였다. 이는 청어가 18세기를 접어드는 시점에 흥하였음을 암시한다.

김려는 『우해이어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해주의 청어를 제일이라고 한다.”고 하여 서해 청어를 높게 쳤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의원인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에도 청어가 실려있다. 그런데 책의 주석에는 우리나라의 청어와는 다르다고 하였다. 나는 이것이 항상 의심스러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해주에서 나오는 것은 청어의 일종이지 청어는 아니라고 하였다. 또한 관북 지방의 양쪽 바다에서 잡히는 비웃 청어라는 것은 더욱이 가짜 청어라고 하였다. 청어는 대구 잡힐 때에 가끔 잡히고 항상 잡히는 것은 아니라고 부연설명하였다.

청어의 흥망성쇠를 검토하기 위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을 기초로 각 지역별로 명시된 어류를 뽑아보면 아무래도 조기가 넓게 분포한다.

  조기 청어
황해 옹진현 해주목·장연현
경기 부평도호부·남양도후부·인천도호부·강화도호부·안산군·교통현  
충남 서산군·면천군·비인현·남포현 결성현·보령현·신창현·해미현·당진현 서천군·서산군·남포현·결성현·보령현
전라 부안현·영광현·무장현·순천도호부·광양현 부안현

이 시기보다 뒤인 인조 8년(1630)에는 재미있는 기사가 등장한다. 황해 감사 이여황(李如璜)이 청어를 진상하였다. 그런데 이런 대목이 눈길을 끈다.

청어는 본래 서해에서 잡히지 않고 또 정공(正供)도 아니었다. 그런데 감사 이경용(李景容)이 처음으로 봉진(封進)하였는데, 여황이 그것을 이은 것이다.60) 『仁祖實錄』 卷22, 仁祖 8년 2월 19일 己巳.

청어 성쇠의 진폭이 컸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다. “본래 서해에서 잡히지 않던 고기”라니! 이 정도 되면 『동국세시기』의 그 간단한 기록, 즉 “11월에 청어를 천신하고 서해 해주와 남해 통영이 주산지”라는 그 기록 몇 줄의 매우 엄청난 사료적 비판을 전제 하지 않고는 세시를 적시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11월 청어잡이, 해주와 통영’ 식의 단정적인 방식은 재고를 요하는 것이다. 더욱이 19세기 말에 이르면, 서해안에서는 청어가 거의 잡히지 않는다. 이상 조기잡이와 청어 천신 두가지의 사례 분석을 통하여, 세시기 일반의 오류와 제한성을 지적하고, 엄정한 역사민속적 관점을 요구하는 저의는 바로 이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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