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6권 한 해, 사계절에 담긴 우리 풍속
  • 3 세시 풍속과 생업: 생산
  • 04 생업과 세시의 장기 지속과 단기 지속
  • 정월
  • 문헌 속의 정월 세시와 생업
주강현

【권농윤음】

『열양세시기』에 “매년 원단에 중국의 전통에 따라 임금께서 직접 지은 권농윤음을 내렸다.”고 하였다. 『열양세시기』도 밝히고 있듯이 권농을 위하여 임금 설날부터 해야 할 공식적인 첫번째 집무의 하나였다. 권농윤음은 『세시풍요』에도 등장하고 있으니, “붉은 윤음을 받들어내는 것이 구중 궁궐로부터 나왔으니, 봄을 당해서 급선무는 백성 농사 권하는 것이다.”고 그 목적을 분명히 적시하였다. 또한, 기곡제(祈穀祭)를 상신일에 친히 지낸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기곡제가 이어졌음을 반증한다.

【입춘의 토우와 목우】

『동국세시기』 관북 풍속에 목우(木牛)가 등장한다. 관부로부터 민 가에 이르기까지 목우를 입춘에 끌고다닌다. 대개 이것은 이 지방에서 소가 생산된다는 일에 본딴 제도로 농업을 권장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라 하였다. 목우 풍습은 조선시대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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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용 목우
의례용 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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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에서 입춘은 정월의 절기이며, 괘(卦)는 감(坎) 육사(六四)로 초후(初候)에 동풍이 불어 얼음이 풀리고 차후(次候)에 동면하던 벌레가 깨어나고, 말후(末候)에 물고기가 얼음 밑까지 올라온다고 하였다.61) 『高麗史』 卷50, 志4, 曆 宣明曆 上. 입춘에는 수달이 물고기로 제사지낸다고 믿었다. 기러기가 북쪽으로 가고 초목들은 싹이 튼다고 믿었고,62) 『高麗史』 卷51, 志5, 曆 授時曆 上. 입춘일에 관리들에게 1일 휴가도 주었다.63) 『高麗史』 卷84, 志38, 刑法 公式 官吏給暇. 그러나 고려시대에 입춘일의 풍속으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토우(土牛)를 내는 일이었다.

조선시대에 목우가 있다면 고려시대에는 토우가 있었다. 토우는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따른 것으로, 입춘 전에 토우를 내어서 농사의 이르고 늦은 때를 보는 것이다. “지금 바로 이른 봄에 곡식 잘되기를 상제에게 빌고 길한 날에 동쪽 교외에서 적전(籍田)을 갈아야할 때입니다. 그런데 임금은 비록 친히 적전을 갈지만 왕후는 종자바치는 의례를 집행하지 않고 있으니 『주례』에 의거하여 우리 국가 의 미풍을 보이도록 하시길 빕니다.”고 촉구하고 있다.64) 『高麗史節要』 卷2, 成宗 7년 2월. 현종 22년 기사에도 왕이 을해일에 친히 적전을 갈았다고 하였다.65) 『高麗史』 卷5, 世家5, 顯宗 22년 정월 乙亥. 이인로도 입춘일에는 토우를 사용한다고 하였다.66) 『破閑集』 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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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곡제
기곡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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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우와 더불어 기곡제가 연계된다. 월내(月內)에 원구(園丘)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정월 첫 신일(上辛)에 기곡제(祈穀祭)를 지낸다고 하였다.67) 『高麗史』 卷51, 志5, 曆 授時曆 上 吉禮 大祀 園丘. 기곡제는 성종, 인종조에서 확인된다. 성종은 정월에 원구단에서 기곡제를 지내고 태조를 배향하였으며, 몸소 적전을 갈고 신농씨(神農氏)를 제사지내면서 후직(后稷)을 배향하였다. ‘기곡제와 적전의 예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祈穀籍田 始此)’란 기사로 보건대 성종조에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68) 『高麗史節要』 卷2, 成宗 2년 정월. 성종 2년 봄 정월 을해일에 왕이 친히 적전을 갈았다고 하였고 그것이 시초였다고 하였다.69) 『高麗史』 卷3, 世家, 成宗 2년 정월 乙亥. 기곡제는 두말할 것 없이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국가적 제사였다. 인종도 친히 적전을 갈았다. 왕이 따비를 다섯 번 밀고, 제왕과 삼공은 일곱 번 밀고, 상서와 여러 경들이 아홉 번 밀었다고 하였다.70) 『高麗史節要』 卷10, 仁宗 22년 정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적전 갈기가 비단 정월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공민왕 19년의 기사에는 3월 을사일에 왕이 몸소 적전을 갈았다고 하였다.71) 『高麗史』 卷62, 志16.

【입춘의 보리 뿌리 점】

『열양세시기』 입춘조에 농가에서는 입춘날에 보리 뿌리를 캐서 풍흉을 점친다고 하였다. 보리 뿌리가 세 갈래 이상으로 갈라졌으면 풍년이고, 두 갈래면 평년작, 한 가닥이면 흉년이다. 보리 뿌리점은 실제로 20세기까지도 가장 보편적인 점풍이었다. 민중들의 주 식이 쌀이 아니고 보리였다는 점에서 보리 농사의 풍흉은 대단히 중요하였으며, 보리고개라는 절기가 말해주듯 중요성이 더하였기에 보리 뿌리점은 매우 보편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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볏가릿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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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일의 볏가릿대】

볏가릿대 풍습은 문헌과 현장에서 두루 확인된다. 『동국세시기』에 풍년을 비는 화적(禾積)이 등장한다. 보름 전날 짚을 묶어 깃대 모양으로 그 속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집어넣고 싸고, 또 목화의 터진 열매를 긴 장대 끝에 매단다. 집의 곁에 이것을 세우고 새끼를 팽팽히쳐서 고정시킨다. 산간 지방 풍속으로는 가지가 많이 친 나무를 외양간 뒤에 세우고 곡식의 이삭과 목화를 걸어둔다. 그리고 아이들이 새벽에 일어나 이 나무를 싸고 돌면서 노래를 부른다. 이렇게 하다가 해가 뜨면 그만둔다. 고사(故事)에 정월 보름날 대궐 안에서 『시경』 「빈풍(邠風)」 7월편의 경작하고 수확하는 형상을 본따서 좌우로 나누어 승부를 겨룬다. 대개 풍년을 기원하는 일이다. 항간에서 화적을 함은 곧 이 행사의 일종이라고 하였다.

【1월 15일의 가수】

『동국세시기』에 정월 보름날 과일나무의 가지가 갈린 곳에 돌을 끼워두면 과일이 잘된다고 한다. 이것을 가수(稼樹, 과일나무 시집보내기)라 한다.

『세시풍요』에는, “뜰 앞의 좋은 나무가 줄을 이루고 있으니, 두 개로 휘어진 가지에서는 의당 과실이 많이 열릴 것이다. 이씨(李氏, 자두) 딸과 매씨(梅氏, 매화) 딸이 한때 석씨(石氏)네 집 신랑에게 시집 을 갔다”고 하였다.

가수는 반드시 보름날만 하였던 것은 아니다. 『사시찬요초』에 이르길, “초하룻날 새벽 닭이 울 때 횃불을 들고 뽕나무나 과일나무 아래 위를 쬐어주면 나무에 잠복중인 벌레나 병원균을 죽여 없앨 수 있다. 해가 뜨기 전에 벽돌을 과일나무 가지 사이에 끼워두면 그해 과일의 풍작이 되는데 이와 같은 작업을 가수라 한다. 보름날이나 그믐에도 이와 같이 할 것이나 대추나무만은 상처를 입히지 말아야 한다. 상처를 내면 대추가 종당 야위어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1월 15일의 목영점년(木影占年)】

『동국세시기』에 이르길, 길이 한 자의 막대기를 뜰의 한 가운데 세우고, 달빛이 오방(午方)에 비치는 그림자에 따라 그 해의 곡식의 풍흉을 점친다. 그림자의 길이가 여덟 치면 풍우가 순조로와 풍년이 들고, 일곱 치 또는 여섯 치도 함께 길조이며, 다섯 치가 되면 불길하고, 네 치는 홍수와 충해가 성행하며, 세 치는 곡식이 전혀 여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데, 이 방법은 동박삭(東方朔)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하였다. 일반적인 점풍으로 여겨진다.

【1월 15일의 달불이】

달불이는 월자(月滋)·호자(戶滋)라고도 한다. 『동국세시기』에, “콩 열두 개에 열두 달을 표시하여 수수깡 속에다 넣고 묶어서 우물 속에 가라앉혀 놓는다. 이것을 월자라고 한다. 다음 날 아침에 꺼내어 콩의 불은 정도를 조사하여 각각 달의 수해·한해·평년 등을 징험해본다. 또 마을 안 호수만큼의 콩에 각각 호주 표시를 하고 짚으로 묶어 우물에 집어넣는다. 이것을 호자라고 한다. 다음날 이것을 끄집어내어 그 물에 불은 정도를 조사하여 잘 불은 집은 그해 농사가 순조로와 부족이 없다고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는 이미 『농사직설』에 등장한다. 곡종 준비 과정에서 이듬해에 작황이 좋을 곡종을 미리 알아보기 위하여 아홉 가지 곡식의 씨앗을 한 되씩 각각 다른 베자루에 넣어 움집 안에 묻어둔다. 50일이 경과한 후에 꺼내어 다시 되어 보아 가장 많이 증량된 것이 그해 풍작이 될 곡종이다. 토양 성질은 곳에 따라 다르므로 각 마을로 하여금 시험케 하여 작황이 좋을 곡종을 알아보아야 한다. 속방에는 동짓날에 묻어 두었다가 입춘일에 꺼내어 본다고 하였다.72) 『農事直說』, 備穀種. 『한정록』에서는, “대체로 그해에 잘 자랄 곡종을 알고자 할 때에는 여러 가지 곡종을 평량하여 각기 다른 자루에 넣어 동짓날 그늘진 곳에 묻어두었다가 동지 후 50일 만에 꺼내어 가장 많이 중량된 곡종이 그해 농사로 가장 알맞은 곡종이 된다.”고 하였다.73) 『閑情錄』, 治農.

【1월 15일의 달맞이와 달점】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한다.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하다. 그리고 달빛으로 점을 친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징조이고, 희면 장마가 질 징조다. 또 달이 뜰 때의 형체, 대소, 용부(湧浮) 출렁거림, 고저로 점을 치기도 한다. 달의 사방이 두터우면 풍년이 들 징조이고 엷으면 흉년이 들 징조이며 조금도 차이가 없으면 평년작이 될 징조다.74) 『東國歲時記』, 上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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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
달맞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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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뜨면 그 달바퀴의 빛을 보고 그 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농가에서 정월 보름이면 달뜨기를 기다린다.

북녘에 가가우면 산골에 풍년이 들고

남녘으로 기울어지면 해변가 곡식이 잘 익는다

몹시 붉으면 초목이 탈 까 걱정되고

매우 희면 냇물이 넘칠까 염려로다

알맞게 중황색이라야 대풍년이 들 것이로다.

농민들이 수수깡을 쫙 갈라 한 편에 작은 구멍 열두 개를 뚫고 각 구멍마다 콩을 한 알씩 넣어 열두 달을 표시한다. 이를 물에 넣어 불은 정도로 그 달의 물이 흔하고 가뭄을 점친다. 이를 윤월(潤月, 달불이)이라 한다. 김과 참취나물 등속에다 밥을 싸서 먹는다. 많이 먹어야 좋다고 한다. 이것을 복쌈(縛占)이라 한다.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뜻이다.75) 『洌陽歲時記』, 上元. 달빛으로 점풍하는 풍습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으니, 대략 다음과 같다.

○ 늙은 농부가 정월 대보름날 달의 색깔을 보고 가을 수확을 점친다. 달빛이 붉으면 가물 조짐이고 달빛이 희면 홍수가 날 조짐으로,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한다(『면암집』, 『세시기속』 ).

○ 달의 빛깔을 보아서 그해의 풍년과 흉년을 점친다. 붉은 빛이면 가뭄이 들고 흰 빛이면 홍수가 나고, 누런 빛이 나면서 윤기가 돌면 곡식이 잘 익는다고 한다(『한양세시기』).

○ 상원날 달을 보아 수한(水旱)을 안다 하니, 노농(老農)의 징험이라 대강은 짐작하니’라고 하였다(『농가월령가』) .

○ 달을 보아 점치는 일 옛 기록에 없으리오. 북쪽이면 산천 풍년 남쪽이면 어촌 풍년 북이 붉으면 화훼가 말라죽고 희면 큰 물이 든다네. 올해 달은 둥그렇고 짙은 황색이니 바야흐로 재앙없이 풍년이 될 것 알겠네(『농가십이월속시』).

20세기 문헌에는 달빛으로 풍흉을 점치는 것은 미신이므로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구력 정월 대망(大望)에 달빛이 붉으면 그해에 가물며 홍수가 난다는 등 아직도 이러한 미신이 일부에서 없어지지 아니하므로 인천 관측소원의 말을 참고하여 대강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달빛은 태양의 반사 광선임은 누구든지 아는 바, 태양 광선은 무색이니 이것을 일일이 분석하면 유자 빛, 붉은 빛, 누른 빛, 초록 빛, 보랏빛, 검은 빛의 일곱 가지 원색으로 나뉘며, 이 여러 가지 빛은 각각 길고 짧은 광파가 있어서 비상한 속도로 시방으로 퍼진다 … 달빛이 붉어지는 이유는 중간에 장애로 인하여 변하여진다. 그 장애는 일기가 건조할 때에는 지구에서 여러 가지로 많은 먼지가 공기에 섞이며 비가 온 뒤에는 수중기가 섞임으로 달빛이 공기를 통과할 때에 광파가 다른 광선을 막혀버리고 제일 긴 붉은 광선만 통과함으로 우리들 눈에는 달빛이 붉어보임이요 다른 관계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76) 『매일신보』 1924년 2월 19일자.

【1월 15일의 창명축조(唱名逐鳥)】

관동 지방의 산간에는 여러 아이들이 일제히 온갖 새의 이름을 부르면서는 시늉을 하는 풍속이 있다. 새의 피해를 막고 오곡이 풍년들기를 기원하는 뜻이다.

【1월 월내의 점설】

생산력의 희구는 다양한 형태의 점풍(占風)이나 유감주술적인 기풍, 속신 등으로 나타난다. 고려시대에 눈으로 치는 점설(占雪)이 있었다.

어찌하여 겨울에 눈이 적다 하였더니, 봄이 되자 한 자도 넘게 내렸네.

보리싹을 적시기는 늦은 듯하나, 오히려 없는 것보단 낫네.

올해 농사가 어떠한지를 징험하려고 분명하게 이 일을 적어두네.

만약 밭이랑이 푸른빛을 보게 된다면, 어찌 납향(臘享) 전의 눈만을 기대하는가?(이규보)77) 『東國李相國集』 後集 卷2, 古律詩 「戊戌正月十五日大雪」.

즉, 눈의 과소로 농사의 풍흉을 판단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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