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2 고려시대의 문자생활과 서체
  • 02. 고려시대 중기
손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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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적경 권59(1011∼1031)
대보적경 권59(1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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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부터는 탄연에 의하여 왕희지체가 유행하였다. 탄연의 글씨는 <진락공중수 청평산문수원기(眞樂公重修淸平山文殊院記)>(1130)·<운문사 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1147), 탄연의 제자 기준은 스승의 석비인 <단속사 대감국사비(智異山斷俗寺大鑑國師碑)>(1172)와 <순천 수성비(順天守城碑)>를 썼다. 왕희지체에서 자신의 독특한 서체를 구사한 탄연은 속성이 밀양 손씨이다. 그의 글씨가 왕희지의 글씨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음은 <진락공중수 청평산문수원기>을 통하여 알 수 있다. 그는 왕희지의 연미함을 안진경을 통하여 극복하였다. 이는 안진경체로 탄연이 쓴 <승가굴중수기>에서 확인된다. 왕희지의 능숙한 결구의 장점과 연미한 필획의 단점을 극복한 명필은 오직 탄연이다. 탄연을 이은 인종(1109∼1146)과 문공 유(文公裕, 1086∼1159), 기준 등이 무신집권기(1170∼1259)에 탄연체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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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탑중수기(1024)
석가탑중수기(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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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1011∼1031)
대승아비달마잡집론 권14(1011∼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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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비 제액(1017) 탁본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비 제액(101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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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은현화사비 두전(1021) 탁본
대자은현화사비 두전(102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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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비 두전 탁본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비 두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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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체의 유행으로 그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가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왕희지 글씨를 집자한 집자비로는 <직지사 대장전비(直指寺大藏殿碑)>[1185 망실(亡失)]·<인각사 보각국사정조비(麟角寺普覺國師靜照碑)>(1295) 등이 있으며, 왕희지체를 따른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흥법사 진공대사비>, 김생의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탑비(太子寺朗空大師 白月栖雲塔碑)>(954)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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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 두전(1025) 탁본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 두전(102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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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빈신사지 4사자9층석탑 명문 탁본(1022)
사자빈신사지 4사자9층석탑 명문 탁본(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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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순 필법의 글씨라도 법상종계 왕사와 국사의 탑비는 화려한 장식성과 함께 글씨도 정제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채충순이 쓴 <대자은현화사비(大慈恩玄化寺碑)>(1021), 백현례의 <봉선홍경사갈기비(奉先弘慶寺碣記碑)>(1021), 안민후의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1085), 민상제의 <칠장사 혜소국사탑비>(1170)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교로 수용했기 때문에 고승의 탑비나 사적비가 왕명에 의해 건립되었고, 비문을 만들고 쓰는 사 람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한문학의 융성과 과거제도, 그리고 서예를 교육하는 기관에서 서학박사나 서령사 등 글씨만을 전문으로 하는 서예전문직의 등장은 고려시대 서예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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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1025) 탁본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102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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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홍경사갈기비(1026) 탁본
봉선홍경사갈기비(1026)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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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석가탑 보협인다라니경(1024)
불국사 석가탑 보협인다라니경(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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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 석가탑중수형지기(1038)
불국사 석가탑중수형지기(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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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원융국사비 두전(1053) 탁본
부석사 원융국사비 두전(1053)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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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원융국사비 탁본
부석사 원융국사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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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기 전서의 예로는 제액이나 두전에서 살필 수 있다. 곧, <영취산 현화사비(靈鷲山玄化寺碑)>[1021, 현종 어서전액(顯宗 御書篆額)]·<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1025, 김거웅 봉선서병전액(金巨雄 奉宣書幷篆額)]·<봉선홍경사갈기비>·<칠장사 혜소국사비>·<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비>·<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金山寺慧德王師眞應塔碑)>(1111)·<영통사 대각국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반야사 원경왕사비>·<선봉사 대각국사비>·<단속사 대감국사비>·<서봉사 현오국사비>[1185, 유공권 봉선서(柳公權 奉宣書)] 등의 예가 있다.

고려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11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석비의 표제 기록 양식이 바뀌는 시기이다. 석비의 표제 기록 양식에는 대략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세로기록 방식으로 이수에 쓰여진 갸름한 직사각형 제액양식이고, 다른 하나는 가로기록 방식으로 비신에 한 줄이나 두 줄의 납작한 직사각형으로 쓰여진 두전양식이다. 그리고 제액과 두전을 절충한 양식의 제액식 두전양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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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장사 혜소국사비 두전(1060) 탁본
칠장사 혜소국사비 두전(106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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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 묘지명(1061) 탁본
이자연 묘지명(106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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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두전(1085) 탁본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두전(108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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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액은 크기가 작게 이수에 쓰여지던 명찰의 개념이었다. 작은 명찰개념의 제액이 글자가 많아지고, 글자의 크기도 커져서 편액의 표제개념으로 바뀌는 시기가 바로 고려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11∼12세기부터이다. 그리고 두전의 양식도 편액의 양식과 같이 변죽을 그려 넣고, 호화롭게 장식되어 꾸며진다. 이러한 양식은 당시의 편액에도 사용되었고, 두전의 양식에도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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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 두전(1111) 탁본
금산사 혜덕왕사진응탑비 두전(111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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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사 원경왕사비 두전(1125) 탁본
반야사 원경왕사비 두전(112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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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통사 대각국사비 두전(1125) 탁본
영통사 대각국사비 두전(112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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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락공중수 청평산문수원기 두전(1130) 탁본
진락공중수 청평산문수원기 두전(1130)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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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기 표제 기록 양식은 표제개념인 가로기록 방식의 두전이 출현하였으며, 제액과 두전을 절충한 양식인 제액식 두전이 유행하는 시기이다. <정토사 홍법국사실상탑비> 이수의 제액은 이수에 기록한 명찰개념의 제액이다. 그러나 비신 상단에 소전으로 가로 한 줄로 쓴 것은 표제개념의 기록양식인 두전에 해당한다. 비신에 쓴 두전은 필획과 결구와 장법이 모두 9∼10세기에 사용된 제액의 양식과는 다르게 변모되었다. 비신에 두전을 쓰는 두전양식의 표제는 이 비로부터 시작되었다. 제액과 두전을 해서와 소전으로 병행한 예도 <정토사 홍법국사탑비>가 그 효시이다. 이때부터 소전의 갸름한 결구의 특징이 나타나고 필획의 굵기가 고르게 안정된 전형적인 소전의 필법이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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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
목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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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전장법의 양식에 있어서 아직 11세기까지는 세로 장법의 제액이 사용되었고, 간혹 비신에 가로 한 줄로 쓰는 두전은 많지 않다. 11세기 새로운 양식의 표제인 두전은 <정토사 홍법국사탑비>를 시작으로, <봉선홍경사갈기비>·<부석사 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 등이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고려시대 현종의 어필인 <영취산 현화사비>는 세로기록 방식의 제액과 가로기록 방식의 두전을 합한 절충양식을 만들었다. 그것이 제액식 두전양식이다.

12세기에 들어서면 장법은 세로 장법에서 가로 장법의 절충양식인 제액식 두전양식으로 변모하였다. 옆으로 길게 늘여 쓰는 양식으로 변한 것은 11세기와 구별되는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11세기까지 유행되었던 세로 장법의 제액과 가로 장법의 두전이 혼합된 절충양식인 제액식 두전양식이 12세기부터 유행하였다. 제액과 두전의 중간양식에 해당하는 제액식 두전양식은 11세기부터 시작되어 12세기에 유행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제액식 두전의 효시인 고려 현종의 어필 <영취산 현화사비>를 시작으로, 11세기에는 <거돈사 원공국사탑비>·<칠장사 혜소국사비>·<법천사 지광국사탑비> 등을 들 수 있다. 12세기에 들어서는 그 수가 더욱 많아진다. 이러한 사실은 <금산사 혜덕왕사탑비>·<영통사 대각국사비>·<반야사 원경왕사비>·<진락공중수 청평산문수원기>·<선봉사 대각국사비>·<묘향산 보현사비(妙香山普賢寺碑)<[1141, 인종 내강어필제액(仁宗 內降御筆題額)]·<운문사 원응국사비(雲門寺圓應國師碑)>[1147, 단속사주지□□ 봉선서(斷俗寺住持□□ 奉宣書)]·<단속사 대감국사비>·<영국사 원각국사비(寧國寺圓覺國師碑)>(1180)·<서봉사 현오국사비>·<용문사중수기(龍門寺重修記)>[ 1185, 연의 봉선서(淵懿 奉宣書)] 등이 말해 준다. 11∼12세기 동안의 표제기록 양식은 두전과 중간 표제기록 양식인 제액식 두전양식이 유행한 시기이며, 신라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유행하였던 것으로 <정토사 홍법국사탑비> 이수를 마지막으로 200년 동안 거의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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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 7층탑 두전(1131) 탁본
안양사 7층탑 두전(113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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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사 대각국사비 두전(1132) 탁본
선봉사 대각국사비 두전(1132)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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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전양각은 11세기에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12세기 들어 <반야사 원경왕사비>·<영국사 원각국사비> 등이 뒤를 이었다. 이어 12세기를 지나 13세기 고려시대 후기에 들어서면 자취를 감추는 표제기록 양식이 되었다. 소전음각은 가장 많은 양식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중기의 예로는 <정토사 홍법국사탑비>·<영취산 현화사비>·<거돈사 원공국사탑비>·<봉선홍경사갈기비>·<부석사 원융국사비>·<칠장사 혜소국사비>·<법천사 지광국사탑비>·<금산사 혜덕 왕사탑비>·<영통사 대각국사비>·<선봉사 대각국사비>·<영국사 원각국사비>·<서봉사 현오국사비> 등의 예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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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향산 보현사비 두전(1141) 탁본
묘향산 보현사비 두전(114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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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원응국사비(1147) 탁본
운문사 원응국사비(1147)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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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두전으로는 <정토사 홍법국사탑비>·<진낙공중수 청평산문수원기>·<운문사 원응국사비>·<단속사 대감국사비>·<용문사중수기> 등 수도 많고 명품이 다양하다. 그야말로 11∼12세기는 해서 제액식 두전이 유행한 시기이다. 모두 음각인데 반해서 <운문사 원응국사비>는 해서 양각두전으로 흔치 않은 예이다.

전서와 해서가 같이 쓰여진 두전은 <정토사 홍법국사탑비>로 두전은 전서로 소전이고, 제액은 왕희지체 해서로 쓰여져 다른 양식과 구별된다. 이 비는 손몽주(孫夢周)가 찬자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당대의 명필로서 이로부터 새로운 표제기록 양식인 두전양식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제액과 두전의 절충양식인 제액식 두전양식이 유행하게 되는 단초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수에 쓴 해서는 제액이고, 비신에 쓴 전서두전은 해서제액 전서두전의 새로운 양식의 표제이며, 이 두 양식을 합한 양식으로 제액식 두전이 출현하게 되었다.

제액과 두전의 절충양식인 제액식 두전으로 현종(992∼1031)의 어필인 <영취산 현화사비>이다. 이 두전은 ‘산(山)’·‘지(之)’ 등에서 구절양장법의 필획인 구첩전의 필획양식을 보여 주는 첫 예이다. 그동안 구첩전은 인장에 주로 사용되던 서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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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 원응국사비 두전 탁본
운문사 원응국사비 두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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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 대감국사비(1172) 탁본
단속사 대감국사비(1172)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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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사 선각국사비(1173) 탁본
옥룡사 선각국사비(1173)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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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서두전이 매우 드문 것은 새기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1109∼1146)의 어필 음각 행서두전인 <묘향산 보현사비>는 특별한 양식의 행서두전에 해당하며, 양각 행서두전은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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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사 개창비(1181) 탁본
용수사 개창비(1181)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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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사 현오국사비 두전(1185) 탁본
서봉사 현오국사비 두전(118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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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사 현오국사비 탁본
서봉사 현오국사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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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사 개창비 탁본
용수사 개창비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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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경사 원진국사비(1224) 탁본
보경사 원진국사비(1224)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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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마도 목간(1208)
태안 마도 목간(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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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사지론(1246)
유가사지론(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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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엽두전의 예로는 <반야사 원경왕사비>가 있다. 이는 절충양식인 계선을 사용한 제액식 두전으로 이원부가 썼는데 역시 명품이다. 이후로는 이러한 유엽전의 예가 사라져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제액의 유엽전은 약 400∼500년 이어져 오다 여기서 맥이 끊어졌다.

표제의 양식은 점차 호화롭게 발전하였다. 편액의 변죽과 같이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하거나 계선을 둘렀다. 문양을 넣은 표제는 <영취산 현화사비>·<거돈사 원공국사비>·<봉선홍경사갈기비>·<부석사 원융국사비>·<칠장사 혜소국사비>·<법천사 지광국사탑비>·<금산사 혜덕왕사탑비>·<영통사 대각국사비>·<반야사 원경왕사비>·<선봉사 대각국사비>·<운문사 원응국사비>·<단속사 대감국 사비>·<서봉사 현오국사비> 등 거의 모두에 해당된다. 문양은 보상화문이나 인동문이 주를 이룬다. 계선만 있는 경우는 <진락공중수 청평산문수원기>·<묘향산 보현사비>·<영국사 원각국사비> 등으로 수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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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중수기(1185) 탁본
용문사 중수기(1185)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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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기에는 세로 기록방식인 제액이 <정토사 홍법국사탑비>를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새로운 양식이 현종에 의해 창안된 후 제액식 두전이 유행하였다. 고려시대 중기에는 제액식 두전과 두전이 함께 유행되었고, 각법과 서체는 소전음각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전양각이나 해서가 사용된 예도 있다. 이 시기는 편액의 변죽에 사용된 문양이 화려하게 나타나는 시기이다.

고려시대 중기에 다양하고 호화롭게 발전한 석비 표제기록 양식은 청자의 발달과 비교하여 볼 수 있다. 청자 발달에 있어서도 백화난만한 시기는 제2기 순청자시대(1050∼1150)부터 제3기 상감청자시대(1150∼1250)이다. 순청자시대는 “고려시대 청자가 정착한 시기이며 순수한 청자색을 가진 무문, 양각, 음각, 또는 각양의 물형청자(物形靑磁)가 제작되었던 시기”로 청자발달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났던 시기이다. 이러한 청자문화의 전성기는 11∼12세기에 유행한 석비 표제기록 양식의 전성기와 병행된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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