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전기 서예 동향
  • 4. 편액서(扁額書)의 성행
이성배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에 새로운 궁궐이 신축되어 사대부들의 가옥도 새로 지어지면서 많은 편액서들이 성행하였다. 건국 초기의 웅장하고 씩씩한 기상을 편액서로 표현하면서 이에 적합한 다양한 서체가 등장하였다.

조선 이전에 편액 글씨에 뛰어난 서예가로 신라의 김생과 고려 말의 공민왕을 들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공민왕은 설암체(雪庵體)의 영향을 많이 받아 뛰어난 편액 글씨를 많이 남겼다고 고려 말의 많은 문사들이 칭송하고 있다. 설암의 글씨는 세종조에 법첩으로 간행되어 종친과 정부와 6조, 대언사, 집현전 등의 관리에게 나누어 주었 다.39) 『세종실록』 권52, 세종 13년 6월 2일. 설암의 글씨는 고려 말 이후 조선조 편액글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확대보기
공민왕 대자해서 안동웅부 편액
공민왕 대자해서 안동웅부 편액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한석봉 대자해서
한석봉 대자해서
팝업창 닫기

다음 자료들은 우리나라 서예사에서 전개되는 편액 글씨에 대한 기록으로, 그 전개를 살필 수 있는 내용들이다.

글씨를 잘 쓰기는 어렵지만 편액 글씨 쓰기는 더욱 어렵다. 조자앙의 필법도 편액에서는 이설암에게 양보하거늘, 하물며 조자앙에 미치지 못하는 자에게 서야. 우리나라 공민왕이 쓴 강릉의 임영관(臨瀛館)·안동의 영호루(暎湖樓)는 참으로 노숙하고 강건하여 범인(凡人)이 미칠 바가 아니다. 그러나 강릉의 임영관은 근래에 화재를 당해 없어졌으니 애석하다. 나는 일찍이 개경 안화사(安和寺)에서 전(殿)의 편액을 보니 송 휘종(徽宗)의 글씨였고, 문의 편액을 보니 채경(蔡京)의 글씨였다. 비록 모두 군신의 도리를 잃은 자이지만 그 연대가 오래되고 필적이 교묘하여 보배라 할 만하다.

서인(庶人) 이용(李瑢, 안평대군)이 쓴 대자암(大慈菴), 해장전(海藏殿), 백화각(白華閣)의 글자는 울연히 비동하는 필의가 있어 또한 뛰어난 보배이다. 지금 모화관(慕華館)은 신색(申墻, 1382∼1433)이 쓴 것인데 비록 안평대군에는 미치지 못하나 또한 볼 만하다. 나의 백씨(伯氏)가 쓴 경복궁(景福宮) 문전의 편액 글씨는 전적으로 이설암을 모방하였으며, 꼼꼼하여 법도가 있어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여긴다. 정국형(鄭國馨)이 쓴 창경궁(昌德宮) 여러 전각과 여러 문의 편액은 자체(字體)가 바르지 않고 어긋난 곳이 많다. 융경(隆慶) 정 묘(丁卯, 1567, 선조 즉위년)에 허조사(許詔使)가 와서 보고는 “홍화문과 대성전이 가장 잘 썼는데 대성전이 더 낫다. 탁본하여 보고 싶다.”고 말하자 원점사가 계를 올려 아뢰니, 즉시 대성전 세 글자를 모사하여 첩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 세 글자는 성임(成任, 1421∼1484)의 글씨이다.40) 『慵齋叢話』 권9.

확대보기
세조 대자해서 <영산전>
세조 대자해서 <영산전>
팝업창 닫기

이 자료를 보면 고려 말 조선 초의 편액 글씨로 설암체와 송설체를 많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설암은 원나라 사람 이부광(李溥光)의 호이며 대자(大字) 서예에 능하여 조맹부의 천거로 출사하였다. 그의 대자는 안진경·유공권체와 황정견의 필의를 바탕으로, 획의 처음과 전절 마지막 부분을 과장되게 운필하여 운필과 필세가 호방하며 굳세다. 설암체는 고려 말에 들어와 공민왕이 이 서체에 능하여 여러 누정의 편액을 남겼다.

석봉 한호 등 많은 사람들이 설암 서체의 영향을 받아 궁궐과 서원이나 사우, 누정 등에 많은 편액서를 남겼다. 설암체는 조선 중기 이후 서원의 사액서로 널리 쓰였는데, 굳센 필획의 양강미(陽剛美)가 유가(儒家)의 의리정신과 잘 부합되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궁중에 쓰인 편액서는 설암체와 송설체 외에 안진경체, 주자체를 널리 사용되었으며, 대체로 유가적인 양강미와 중화미(中和美)를 조화시켜 구현하려 하였다. 조선 초에는 이용, 신색, 성임, 정국형 등이 대자 액서(額書)에 뛰어났으며 양녕대군과 세조도 대자에 능하였다고 전한다. 뒤에 봉래 양사언 등도 대자 초서로 금석문을 남겼다.

이상으로 살펴볼 때 조선 전기의 편액글씨는 개국과 관련되어 궁궐과 사찰·사당·누정 등의 발달과 함께 하였으며, 유가적인 정신을 구현하는 데 적합한 서체를 중심으로 성행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