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1.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
  • 조선 후기 서예 동향
  • 2. 18세기 서예 동향
  • 순정 회귀와 창신추구
이성배

18세기 서예는 크게 양적인 팽창과 질적인 심화를 보이면서 몇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첫째로 순정한 서예정신을 추구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이서(李漵, 1662∼1723)로 『필결(筆訣)』에서 역리(易理)로 점획의 원리와 정신을 설명하면서 왕희지 해서의 순정함을 기준으로 삼아 중화적 서예정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그동안 조선의 서예가 순정함을 잃었다고 보고 왕희지 서예를 정통 기준으로 삼아 재확립하려 하였다. 왕희지 해서 <악의론(樂毅論)>의 필의를 터득한 그의 서체는 동국진체(東國眞體)라는 평을 들었다. 이처럼 순정한 서예를 회복하려는 의식은 당시 조선 유학이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주리론으로 심화되는 등 당시의 사상경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정조도 서체반정(書體反正)을 추구하여 국초의 순정한 서체로 돌아가기를 원하였다.48) 이민식, 「정조시대의 서예관과 서체반정」, 『정조시대의 명필』, 한신대학교 박물관, 2002. pp.102∼113 참조. 그는 왕희지나 종요(鍾繇)와 같은 명필을 원한 것이 아니라, 돈실원후(敦實圓厚)하고 순정한 필체를 원하였고, 공교하고 기이함보다 졸렬하지만 참된 기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기준에 부합되는 인물로 안진경·유공권(柳公權)이 주목되었고 그들의 서체와 정신을 중시하였다. 정조는 항상 마음이 바르면 글씨가 바르다는 ‘심정 필정(心正筆正)’을 말하고 우암 송시열의 묘표나 충무공 이순신의 신도비도 안진경·유공권체로 쓰거나 집자하였다. 이 영향으로 당시에 순정한 글씨를 쓰려는 풍조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서체반정에 어긋나는 이로 윤순(尹淳)을 거론하였다. 윤순이 서체의 진정한 기운을 없어지게 하고 마르고 껄끄러운 병통을 열어 놓게 하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둘째로 인감의 마음(心)과 정(情)과 욕구(欲)를 긍정적으로 강조하는 양명학적 미의식이 대두하였다. 성리학적 미의식이 서예의 심화를 이루었다면 양명학적 미의식은 서예의 다양화와 개성화를 발생시켰다. 또 양명학적 미의식은 점차 정체현상이 나타나던 당시 서예에 대한 자각을 하게 하였고 자신의 진정성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력 있는 창작과 서예 비판을 강조하는 등 새로운 미의식의 변화를 일으켰다.

셋째로 아(雅)에서 속(俗)으로 미의식의 전환이 나타나면서 개성과 창신성(創新性)이 강한 서예가 등장하였다. 단아하고 중화적 미감에 맞는 왕희지체·조맹부체·동기창체 등에서 벗어나 한(漢)·위(魏) 예서와 그 이전의 전서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에 전아(典雅)한 진(晉)·당(唐)의 글씨에서 벗어나 진(秦)·한(漢)의 금석비문에 쓰인 전서와 예서의 거칠고 강하고 고졸한 서예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명말청초에 경세치용의 학풍과 실증을 중시한 금석고증학이 등장하고 있었던 것과 궤를 함께 하는 것이다.

넷째로 이러한 변화는 서예에서 고법(古法) 기준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윤순은 왕희지 서예의 바탕이 되는 전서나 한의 예서를 주목하였고 송대 미불(米芾)의 행서를 강조하였다. 윤순의 영향을 받은 원교 이광사(李匡師)도 『원교서결(圓嶠書訣)』을 통해 왕희지 중심의 서예에서 탈피하고 종요를 중시하고 한·위의 예서를 주목하였으며, 송대의 소식과 미불 등 서예를 수용하여 활기차고 변 화를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조선의 역대 서예를 비평하였다. 강세황도 자찬 묘지에서 이왕미동(二王米董 왕희지·왕헌지·미불·동기창)을 혼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들은 왕희지체나 송설체 중심의 고법에서 벗어나 다양성과 개성 넘치는 서예를 썼던 것이다.

다섯째로 다양한 서체가 유행하면서 각 서체에 일가를 이룬 이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진·한·위의 전예를 연구하여 개성이 강한 전서와 예서를 썼던 이인상(李麟祥, 1710∼1760)은 원령체(元靈體)로, 고졸한 종요체를 연구한 김상숙(金相肅, 1717∼1792)은 직하체(稷下體) 등으로 불렸다. 또한, 송문흠(宋文欽, 1710∼1756)은 <조전비>를 바탕으로 한 유려한 예서로 유명하였고, 유한지(兪漢芝, 1760∼1834)는 각종 한예의 장점을 종합하여 단아하고 간명한 예서를 써서 일가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처럼 18세기 서예는 개성과 창신성 및 다양성이 넘치는 변화 때문에 이학적인 서예의식이 중심이 되었던 아의 미학에서 벗어나 다양한 서예미학을 추구하는 속의 미학에서 아속(雅俗)으로의 전환이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개성이 강한 서예가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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