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3 조선시대의 서예 동향과 서예가
  • 02. 조선시대의 주요 서예가
  • 조선 전기 주요 서예가
  • 5. 김구(金絿, 1488∼1534)
이성배

조선 중종 때 활동한 김구는 호가 자암(自庵)이며 절개와 지조가 있는 유학자로, 조광조와 성리학을 논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해 기묘명현으로 꼽는다. 또한, 음률에 뛰어나 악정(樂正) 벼슬을 지내기도 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그가 일찍이 사마시의 생원과 진사시에서 모두 장원을 하자 시험관이 평하기를 “시는 이백과 같고, 부는 사마상여 같으며, 문은 사마천과 같고, 필법은 왕희지와 같다.”고 하였다. 그는 안평대군, 양사언, 한호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예가로 거론된다.

<증별시>는 유려한 초서로 운필과 먹의 윤갈(潤渴)이 잘 어울리게 표현하였다. 먹의 윤갈과 질서(疾徐)의 비백(飛白), 점획의 연면 등에서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감성 서예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왕희지의 행서에 뛰어났으며, 선우추의 초서와 장필의 광초(狂草) 등 원·명 서예가의 서풍을 익혀 연면(連綿)하면서도 유려한 필선에 분방한 조형미가 잘 어우러지는 서예를 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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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초서 <증별시(贈別詩)>
김구 초서 <증별시(贈別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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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글씨에 대한 일화 중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김구는) 매 번 병풍에 글씨를 쓸 때마다 의자에 앉아 검무를 추고 소리를 길게 질러서 정신과 기운이 격양되는 것을 기다렸다가 문득 의자에서 내려와 휘둘러 글씨를 썼다. 먼저 조자앙이 쓴 <적벽부>를 임서하고, 뒤에 장여필의 글씨를 임서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초서로 <적벽부>를 쓸 때 그 글자에 장여필 글씨풍이 서리고 응축된 자태가 있었 다.59) 『어우야담』 권3, 「서화」.

여기에서는 김구가 행초를 쓰기 위해 흥을 돋우는 독특한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검무를 추었다는 대목은 당의 장욱이 당에서 가장 유명한 검무 배우인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무를 보고 자연스런 운필의 묘를 깨우쳤다는 대목과 유사하다.60) 장욱은 劍身一體가 되어 천변만화하는 검무의 동작을 통해 필법의 오묘한 변화를 익히며, 부드럽고 강한 필세를 터득할 수가 있었다. 소동파의 표현에 의하면, 장욱은 술에 취해야 좋은 글씨를 썼고 술이 깨면 좋은 글씨가 나오지 않았다고 했듯이 항상 술에 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두보는 ‘飮中八仙歌’에서 8선의 하나로 장욱을 거론하였다.

김구는 장욱처럼 술을 통해 흥취를 고양시키기보다는 검무와 소리를 길게 질러 필흥을 고조시켰다. 또 기록에 의하면, “김구가 악정 벼슬에 제수된 것은 음율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공은 예에 무소불통이었다.”라고 평하고 있다.61) 『근역서화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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