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7권 한국 서예문화의 역사
  • 4 근·현대의 서예 동향
  • 02. 일제강점기의 서예 동향
  • 해외 유학파에 의한 청·일서풍 유입
이승연

근대는 혼란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외세의 압력과 문호개방으로 인하여 중국과 일본의 서풍이 유입되는 역할을 하였다. 구한말 개화기에는 사신과 역관들에 의해 서화작품 및 탁본자료가 유입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직접 해외에서 서·화·각을 배우고 귀국한 서화가들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대표적인 서화가로는 김규진·민영익·오세창·서병오·김태석(金台錫, 1874∼1951)·고봉주(高鳳柱, 1906∼1993)·현중화(玄中和, 1907∼1997)·김기승(金基昇, 1909∼2000)· 김영기(金永基, 1911∼2007)·유희강(柳熙綱, 1911∼1976)·손재형·배길기(裵吉基, 1917∼1999)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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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 <연년익수(延年益壽)>
김규진, <연년익수(延年益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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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진은 18세가 되던 1885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8년간 수학하고 1893년에 귀국하여 평양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190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사진기 조작법을 배우고 돌아와 서울에서 사진관을 열어, 그 분야에서도 개척자가 되었으며, 1913년에는 자신의 사진관[상호는 천연당(天然堂)]에 최초의 근대적 영업화랑인 고금서화관(古今書畵館)을 병설하였다. 또한, 1915년에는 서화연구회라는 3년 과정의 사설학원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였다. 그는 청나라 유학으로 연마한 대륙적 필력과 호방한 의기를 폭넓게 발휘하여, 글씨에서는 전·예·해·행·초의 모든 서법에 자유로웠다. 특히, 대필서(大筆書)는 당대에 독보적이여서 많은 사찰의 현판과 주련을 썼다. 『서법요결(書法要訣)』·『난죽보(蘭竹譜)』·『육체필론(六體筆論)』을 저술하여 서예 이론 체계를 확립하려 하였다.

민영익은 김정희에게서 북학과 추사체를 익힌 생부 민태호(閔台鎬)의 영향으로 서예를 시작하여 허련·서병오·김규진 등 당대 최고의 서화가들과 교유하여 ‘운미난(芸楣蘭)’을 창안함과 동시에 중국의 동기창·축윤명·유용·하소기 등의 여러 서체와 추사체의 영향을 받아 자가풍의 행서를 구축하였다. 특히, 1895년 이후부터는 주로 상해의 천심죽재에 거주하며 중국 서화가들과 깊은 교유를 하였다. 그 중에 특히 오창석이 직접 새겨준 전각작품 300여 과(顆)는 국내 전각계에 큰 영향을 미쳐 전각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오창석의 서화 작품 또한 국내 서화계의 흐름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한복은 동경유학을 통해 오창석의 화풍과 서풍의 영향을 받았다. 선전 1회에 입선한 <석고전문(石鼓篆文)>에서 오창석의 석고문(石鼓文)을 확인할 수 있으며, 김용진의 화훼화는 내한한 화가 방명(方洺, 1882∼?)과의 교유와 지도로 인하여 오창석 화풍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방명은 오창석의 제자로 오사카에 머물면서 낙수회(落水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26년 내한하여 김용진을 직접 지도하였으며, 김규진·이한복 등과 교유함과 동시에 경성구락부에서 작품전시회를 가져 국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오세창은 1897년 일본 문부성 초청으로 동경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부임하게 되어 일본에서 1년 동안 생활하였고, 이때 18세부터 전각에 관심을 가졌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일본 전각계를 두루 시찰하였다. 1902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여 약 5년 동안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체류하면서 그곳의 문화계 인사들과도 교유하였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부친 오경석의 수장품인 청대 전각가들의 인보(印譜)의 모각(摹刻)을 통해 등석여·오양지·오창석·조지겸(趙之謙, 1829∼1884)·서삼경(徐三庚, 1826∼1890) 등의 영향을 받아 한국 전각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오세창의 글씨는 청대 고증학과 금석학, 그리고 비학의 영향으로 전서와 예서를 즐겨 썼으며,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글씨나 와당(瓦當)·고전(古錢), 갑골문(甲骨文) 형태의 구성적인 작품을 시도하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추사금석학을 이어받아 실제 금석 유물에 근간을 둔 작품을 제작하여 진적의 탁본이나 금석인 종정이기(鐘鼎彝器)·비석(碑石)·와당·전문(塼文)·동경(銅鏡)·전폐(錢幣) 등을 활용하여 다양한 형식으로 작품화하였다.

서병오는 1901년을 전후하여 중국 상해로 가서 망명 중이던 민영익과 친밀히 교유하면서 그의 소개로 당시 그곳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서화가 오창석·제백석·포화 등과 가까이 접촉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특히 포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화법 에서 영향을 받아 문기(文氣) 짙은 묵죽(墨竹) 등의 사군자를 그리게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으며, 귀국 후 1922년 대구에서 교남서화연구회를 발족시켜 서화연구생들을 지도하여 제자 서동균 등으로 하여금 문인화의 지평을 넓히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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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오, <흑죽도(墨竹圖)>
서병오, <흑죽도(墨竹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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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석은 1908년에 궁내부 미술시찰 위원으로 일본 동경과 중국 북경으로 출장을 다녀온 후 다시 중국으로 파견되어 중국에서 18년 동안 체류하였다. 그는 1912년에는 중화민국의 국무원 비서청에 재직하면서 총통이었던 원세개의 옥새(玉璽)를 새겼고, 그의 서예 고문을 지냈다. 또한, 중국 정부의 부탁으로 각 지방 부현(府縣)의 관인(官印)으로부터 정계와 학계의 사인(私印)에 이르기까지 약 3만여 과에 이르는 많은 양의 전각을 새겼다.

1926년 중국에서 귀국하였으나 다시 1938년에서 1944년까지는 일본에서 체류하였다. 고종대에 궁중에 보관하였던 역대 명인(名印)이 화재로 소실되자 정학교·유한익·강진희 등과 함께 5년에 걸쳐 『보소당인보(寶蘇堂印譜)』를 참조하여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출판하였으며, 자각(自刻)한 인보(印譜) 7권을 비롯하여 한국 명사들의 인장을 모아 인보로 엮어 전각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고봉주는 19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전각을 시작하여 1932년부터 일본 근대 서예의 개척자, 근대 서예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하이 덴라이(比田井天來, 1872∼1939)에게서 오창석과 제백석의 전각풍을, 1936년 가와이 센교(河井筌廬, 1871∼1945)에게서는 조지겸 서풍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히하이 덴라이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서도원 심사위원, 전각서예 전공교수 겸 이사로 활동하면서 시고쿠(四國)·오사카(大阪)·고베(神戶)·히로시마(廣島) 등에서 강습회 강사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가와이 센교로부터 인정을 받아 오창석의 전각도를 선물받기도 하였다. 고봉주는 1932년과 1934년, 1935년 3차례에 걸쳐 히하이 덴라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동행하여 김돈희와 오세창을 만나게 하였으며, 1944년 귀국하여 개인전을 비롯한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현대 전각계의 틀을 구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현중화는 1925년 일본으로 유학, 1932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한 후, 1937년 일본 서예의 대가 마츠모토 호우스이(松本芳翠)와 스치모도 시유우(辻本史邑)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서예를 배웠다. 그는 일본 공모전에 출품하면서 매일전(每日展)에 연 3회 수상, 전일본서도전에 1회 수상, 기타 민전에 8차례 수상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여 일본에서 습득한 북위서와 초서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1957년 국전에 입선을 한 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등을 맡아 국내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73년 제주소묵회(濟州素墨會), 1976년 목포소묵회, 1980년 대구소묵회 창립, 1981년 광주소묵회를 창립하여 후진 양성함과 동시에 국내외에서 개인전 및 초대전을 가져, 1983년 타이페이 국립역사박물관의 초청전에서는 관장이었던 하호천(何浩天)이 그의 서격을 ‘필주용사 일기호매 출호자연(筆走龍蛇 一氣豪邁 出乎自然)’ 등으로 평가하였으며, 중화민국의 대가 왕장위(王壯爲)는 ‘낙락능운기 천풍불해도(落落凌雲氣 天風拂海濤)’로, 사종안(謝宗安)은 ‘요기취 절속정(饒奇趣 絶俗情)’이라고 극찬한 바 있다. 일본의 서풍을 흡수·소화하여 독창적인 소암체(素菴體)를 구현하면서 국내 서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김기승은 1928년 중국 상해 중국공학대학 경제과에 입학하여 4년 동안 공부한 뒤 당대 최고의 서예가 우우임(于右任, 1879∼1964)을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김영기는 김규진의 아들로 1932년 중국 북 경 보인대학(輔仁大學)에 유학하여 제백석 문하에서 동양미술을 전공하여 서화와 전각을 연마하였는데, 귀국 후 제백석의 묵적과 전각을 국내에 전하여 제백석풍의 서화와 전각을 유행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유희강은 1937년 북경에서 8년 동안 유학하면서 서화 및 금석학을 배웠다. 손재형은 1938년 북경에서 금석학·고증학의 제일인자로, 은허(殷墟) 출토의 갑골문자를 연구하고 있던 나진옥(羅振玉, 1866∼1940)과의 만남으로 서화와 금석학에 대한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외에 배길기의 일본 유학 등은 현대 서단의 서풍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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