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를 내면서
허용호

‘무속의 문화사’를 기획하면서 했던 가장 큰 고민은 ‘무속의 모습을 보다 입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였다. 짧았지만 깊었던 논의 속에서 그 답은 ‘무속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를 중심으로 그 역사적 변화 양상’을 살피는 것으로 일단 정리되었다. 먼저 무속의 역사를 개괄한 후, 이어서 그 무속이 구체화되는 무속 의례, 무속 의례의 핵심적 주체 중 하나인 무당, 무당이 연행하는 굿 속에서 흥미롭게 존재하는 무당굿놀이, 그리고 무속에 대한 서구인의 시선 등으로 나누어 무속에 대한 입체적 접근을 시도하기로 한 것이다. 이 책은 그 시도에 대한 결과물이 된다.

이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5개의 장은 각각 ‘무속’, ‘무속의례’, ‘무당’, ‘무당굿놀이’, ‘무속에 대한 외부의 시선’ 등의 열쇠말(key word)로 표현할 수 있다. 제1장 ‘무속의 역사적 전개’에서는 일관된 관점으로 무속의 역사를 개관해 보았다. 제2장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는 무속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의례를 중심으로 그 역사를 살펴본 것이다. 제3장 ‘무당의 생활과 유형’은 무속 의례의 핵심 주체 중 하나인 무당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제4장 ‘무당굿놀이의 유형과 변화 흐름’은 무당의 굿에 나타나는 놀이적 대목에 주목하여, 그 유형과 변화의 흐름을 살핀 것이다. 제5장 ‘서구인 굿을 보다’는 서구인의 시선에 비친 무속의 모습 을 정리한 것이다. 각 장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기존의 무속 관련 연구 성과에 많이 기댄 것이다. 따라서 해당 대목에 인용 표시나 각주를 마땅히 달아야 한다. 하지만 전체 책의 체제 상 뒤쪽에 참고 문헌을 다는 것으로 대신했다. 이 점 양해를 구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각 장의 내용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제1장 ‘무속의 역사적 전개’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 무속의 역사를 개관한 것이다. 역사란 과거의 사실인 만큼, 무속의 역사라면 무속에 관한 과거의 사실이다. 그러나 무속 관련 사실들을 나열한다고 해서 무속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무속의 큰 흐름을 파악하고, 무속의 변화와 변천의 단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무속 관련 사실들 가운데 무엇을 중심으로 큰 흐름을 파악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단계를 설정하느냐는 것이 문제이다. 1장에서는 무속의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 이러한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논의된 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속의 기능으로는 정치적 기능, 사회적 기능, 개인적 기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치적 기능이란 국가와 같은 큰 집단에 대한 기능이며, 사회적 기능이란 고을이나 마을 같은 지역 사회에 대한 기능, 개인적 기능이란 개인의 길흉화복에 관한 기능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들이 발휘되는 것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고대로 올라갈수록 무속은 이들 세 가지 기능을 모두 발휘한 데 반해, 현대로 올수록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고 개인적 기능만 남는다.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1장에서는 한국 무속사를 크게 3단계로 구분했다. 우선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는 무속이 3가지 기능을 모두 발휘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무속은 정치 권력을 정당화하고 국가의 통합과 결속을 뒷받침하는 지배 이데올로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삼국시대 불교가 수용되면서 무속은 정치적 기능 을 상실했고, 그 결과 통일신라시대부터 사회적·개인적 기능만 남게 되었다. 다시 말해 지방 세력의 권력 유지와 함께 지역민의 정체성 확인 내지 지역민의 결속을 뒷받침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변화한다. 사림파는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면서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하려고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향촌사회의 무속적 전통의 극복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무속의 배척을 본격화했으며, 그 결과 무속은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한국 무속의 역사는 무속이 갖고 있었던 여러 기능이 점차 상실되어 가는 전개 양상을 보인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무속은 이들 세 가지 기능을 모두 발휘한 데 반해, 현대로 올수록 정치적·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고 개인적 기능만 남는다. 그런데 무속에 대한 수많은 억압과 탄압이 있었음에도 무속의 개인적 기능을 끝내 뿌리 뽑지는 못했다. 무속은 현세이익적 종교이다. 무속의 초점은 도덕적 완성이나 내세의 구원이 아니라, 현세에서 고통 없이 건강하게 사는 데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무속은 길흉화복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에 맞설 수 있도록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다른 종교가 무속을 대신할 수 없으며, 무속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제2장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에서는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각 시기에 나타난 무속의례를 살펴보았다. 각 시기에 어떤 무속의례들이 행해졌으며, 그러한 무속의례가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었고, 그것의 사회 문화적 위상과 기능은 무엇인가를 정리했다. 이러한 정리의 목적은 한국 무속의 의례가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조감하려는 것이었다. 논의된 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2장은 인간 삶에서의 무속의 기능에 초점을 맞춰 무속의례를 크게 점복(占卜), 기양(祈)의례, 기복(祈福)의례로 유형화하여 서술하였다. 기양의례는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나, 질병·출산·결혼·죽음 등 삶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행해지는 의례이다. 포괄적인 의미의 위기 상황에서 행해진다는 점에서 위기의례라고 할 수 있다. 삶의 문제나 위기는 갑작스럽게 발생한다는 점에서 기양의례는 임시의례의 성격을 갖는다. 기복의례는 삶의 문제나 위기와 무관하게 인간 삶의 안녕과 번영, 생산의 풍요 등 조화롭고 복된 인간 삶을 기원하는 의례를 말한다. 기복의례는 한해의 삶의 리듬에 대응하여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정기제의 성격을 보여준다.

한국 사회에서 무속의례를 실천한 주체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지만, 크게 개인을 포함한 가정, 마을과 지역 사회, 왕실과 국가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무속의례의 실천 주체는 한국 사회의 기본 삶의 단위이자 주체이기도 하다. 무속의례를 크게 점복, 기양의례, 기복의례로 나눠 살펴봄으로써 한국 사회에서 무속의례가 이러한 삶의 단위이자 주체들과 어떻게 관련되면서 기능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나아가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무속의례와 무속의 사회 문화적 위상과 기능을 아울러 보여준다.

청동기시대에 이미 한국 사회에는 무당과 같은 종교전문가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무당의 명칭과 그들의 활동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자료이다. 두 자료에서 나타나는 무당 담당 의례는 점복, 치병과 죽은 자와의 소통 같은 기양의례이다. 이런 점에서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고려시대 이전 무속의례는 점복과 기양의례이다. 기복의례 역시 당연히 행해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 아니면 이 시기에는 가정과 지역 사회, 국가, 왕실의 포괄적인 복을 비는 기복의례는 무속의례의 형식이 아닌 다른 형식의 의례로 행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 시기 점복에 대한 무당의 독점적 위치가 약화된 것이 발견된 다. 그리고 기이하거나 신이한 사건, 천체의 이변 등의 사건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도 일자나 일관에게 그 역할을 내주고, 무당은 점점 공적인 역할에서 멀어진다. 치병의례에서도 불교 치병의례가 무속 치병의례의 경쟁상대로 기능하였다. 이런 점에서 왕을 지칭하는 거서간이라는 명칭이 신에 대한 의례를 담당하는 무당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무당은 국가로부터 이전과 같은 존중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이전 시기의 무속의례가 지속되면서 새로운 무속의례가 등장한다. 점복과 치병 관련 의례는 이전 시기부터 무당이 담당해 온 의례들이다. 반면에 기우제(祈雨祭), 기은(祈恩) 등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처음 확인된다. 고려시대의 기양의례는 치병의례와 기우제만이 확인된다. 아직 탄생과 죽음 등 통과의례와 관련된 무속의례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복의례로서는 기은이 이뤄졌다.

무속의례 형식에서 오늘날과 같은 굿 형식이 성립된 것이 고려시대이다. 또한, 제석(帝釋)이나 칠성(七星) 같은 불교, 도교의 신이 무속의례에 유입된 것 역시 이 시기부터 확인된다. 그리고 무속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금지 정책 역시 고려시대부터 나타난다. 고려시대 무속이 담당한 의례들은 무속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점복과 치병은 물론이고 기우제, 기은도 다른 종교의 방식으로 행해졌다. 이런 점에서 무속의례는 다종교 사회인 고려 사회에서 여러 종교의례 가운데 하나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무속의 통과의례가 확인된다. 천연두를 치료하는 마마배송굿도 조선시대에 나타난다. 이 두 의례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무속의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고려시대부터 행해진 무속의례가 그대로 행해진다. 오늘날과 같은 무속의 다양한 의례가 국가와 왕실, 지역 사회, 가정 등의 주체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확인되며, 그러한 의례의 모습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조선시대이다. 「무당내력(巫黨來歷)」, 「무당성주기도도(巫黨城主祈禱圖)」 및 신윤복(申潤福)의 굿 관련 풍속도 등의 자료는 당시 굿의 모습을 그림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무속의례의 유형에서는 큰 변화가 없지만, 유교의례의 정착과 함께 무속의례의 형식은 일정한 변용을 겪으며 사라진 의례도 발생한다. 성황제와 같은 지역 단위의 의례는 유교의례 절차와 무속의례를 병행하며, 무당에 의한 국행 기우제는 17세기에 사라진다.

또한, 유교식 사전체계가 정립되고 무속에 대한 금지 정책이 제도적으로 시행되었지만, 무당과 무속의례의 사회적 위상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무속의례는 국가의례와 같은 공적 영역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왕실이나 민간을 위한 무속 기복의례나 가뭄이나 병, 죽음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행해지는 무속 기양의례는 여전히 행해졌다.

한국사의 각 시기별로 행해진 무속의례를 살펴보면, 후대로 내려올수록 의례의 유형이 다양해진다. 무속의례의 유형이 다양해진다는 것은 그만큼 무속의례가 한국인의 삶에 폭넓게 관여한다는 의미이다. 가장 다양한 무속의례가 행해진 조선시대에는 무속의례가 가정, 지역 사회, 왕실과 국가 등 조선시대 모든 삶의 주체를 단위로 실천되었다. 이는 조선시대 이후 무속의례가 한국인의 삶의 영역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전승되어왔고, 이는 그만큼 한국인의 삶에서 무속의례가 중요한 역할을 해왔음을 말해 준다. 아울러 그것은 무속이 한국인의 삶에서 가장 가깝고 친숙한 종교의 하나였음을 확인해 준다. 이러한 무속의례의 위상과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제3장 ‘무당의 생활과 유형’은 무속의 핵심적 주체 중 하나인 무당을 중심으로 한 글이다. 무당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활동을 해왔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당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무엇인지, 민 속예술사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살폈다. 논의된 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당이란 무교 또는 무속의 사제이며 길흉화복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사람을 말한다. 무당은 의례를 주관하는 사제이고 예언자이며 또 치료사로서 역할을 해왔다. 무속은 불교나 도교·유교·기독교 등의 외래 종교가 유입되기 전부터 있던 토속 종교이며, 외래 종교 유입 이후에는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전승돼왔다. 역사 속에서 때론 상층문화와 융화를 이루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문화로 지속되고 있다. 무속은 역사 속에서 당대의 지배이념과 대립하기도 하고 교섭하면서 변화되고 지속돼왔다. 무속은 화석화된 고대 종교가 아니다. 오래된 전통이면서 현재도 지속되는 민속종교이므로 그 내력과 의미가 각별하다고 할 수 있다.

무당은 우리 역사의 첫머리에 놓이는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했다. 제정일치 사회에서는 무당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으나 이후 역사 속에서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이 유입되던 고려시대에도 무속에 대한 비우호적인 태도가 있었지만 조선시대에는 그것이 훨씬 노골화되고 제도화되어 나타났다. 또한,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 이후 서구 사회를 모델로 한 급격한 근대화가 진행되고 서구식 합리주의가 만연하면서 무속이 미신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하지만 공적인 영역에서 역할이 축소되었을 뿐, 민중생활 속에서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의 무당의 역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무당들은 다양한 상황에 처한 숱한 삶의 내력과 만나면서 그것을 신에게 고하고 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매개자로서 살아가고 있다.

무당의 생활사를 검토해보면, 무당이 과거에 천민이었다는 관념이 의외로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조선시대 호적자료를 분석한 실증적인 연구에 의하면, 천인뿐만이 아니라 양인 중 에서도 무당이 꾸준히 배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천인보다 양인이 무업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도 무당을 천하게 여기는 관념이 남아 있는 것은 유교 중심의 지배이념이 무속과 무당을 근절의 대상으로 낙인찍어 배척했던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리고 서양의 외래 종교가 유입된 이후 퍼진 적대적인 태도도 거기에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신분의 문제보다는 역할에 대한 차별 의식이 지속되면서 무당을 하대하는 관행이 일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당을 부르는 호칭은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고 그 활동상도 다양하며 무당의 유형도 여러 가지다. 성무과정으로 볼 때 강신무와 세습무로 구분된다. 전자는 신이 들려서 무당이 된 경우이고, 후자는 집안 내림의 무업을 승계하여 무당이 되는 경우이다. 또한, 춤을 추면서 의례를 집전하는 무당 이외에 주로 앉아서 의례를 연행하는, 선무당, 명두, 태주, 전내, 판수, 장님, 복술 등도 있다. 한국의 무당은 악사와 역할을 분담하고 있고 그에 따라 예술성이 부각되는 특징을 보인다.

무당 사회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당골제도에 힘입어 무당들은 안정적인 무업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지역마다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무속 집단의 관행으로 유지돼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안정적인 경제적 배경이 있었으므로 생활과 밀착된 의례들이 더 다양하고 역동적으로 전승될 수 있었다.

무당들은 무업을 하면서 또는 그와 무관하게 국가와 지방의 공연예술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경우에는 무업을 벗어나 전문적인 예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당 집안에서 판소리, 산조, 줄타기 등의 연희자가 꾸준히 배출될 수 있었다. 무당의 가계에서 무녀, 굿판 악사, 판소리·줄타기 광대 등이 동시에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무속집단과 전통예술은 밀접한 상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당굿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식은 제한적이다. 우리는 흔히 무당굿을 일반인과는 다른 무당이 주도하는 기이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연행이라 생각한다. 신을 모시는 제의이기에 엄숙하고, 쉽게 참여할 수 없는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무당굿을 한번이라도 보거나 그 연행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인식이 얼마나 제한적이며 편견이었던 가를 인식할 수 있다. 무당굿은 이외로 흥겹고 재미있으며, 두렵고 신령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했던 신격들이 희화화되고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무당만이 연행의 주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굿을 보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고 직접 연행자가 되기도 하는 것이 굿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무당굿에는 제의성과 신성성뿐만 아니라, 놀이성과 세속성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극적이거나 놀이적이거나 재미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무당굿놀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무당굿놀이에 주목한 것이 제4장 ‘무당굿놀이의 유형과 변화의 흐름’이다. 다양한 무당굿놀이의 내용 소개와 관련 논의로 이루어진 것이 4장이다. 4장에서 논의된 바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무당굿놀이는 전국에 걸쳐 분포하며 연행된다. 그 표현 매체도 인간, 가면, 인형 등 우리 전통 연행의 핵심적인 것들을 모두 활용한다. 흡사 가면극처럼 가면을 활용하기도 하고, 인형극처럼 인형을 가지고 놀리기도 한다. 또한, 인간 연행자가 중심이 되어 재담이나 판소리를 적극적이고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양상을 통해 우리는 무당굿놀이가 우리의 전통 연행 장르 전반과 긴밀한 상호 관계를 맺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무당굿놀이들의 주요 목적을 대별해 보면, ‘풍요 기원’·‘제액 축귀(除厄逐鬼)’·‘재미 추구’ 등의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무당굿놀이는 그 목적을 중심에 놓고 볼 때, ‘풍요 기원의 무 당굿놀이’, ‘제액 축귀의 무당굿놀이’, ‘재미 추구의 무당굿놀이’ 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세 유형의 무당굿놀이 사이의 경계는 엄밀한 것이 아니다. 세 유형 사이에 연관성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제액 구축을 통해 풍요 기원을 할 수도 있고, 재미를 추구하면서 제액 구축이나 풍요 기원을 곁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풍요 기원의 무당굿놀이는 풍농, 풍어, 다산, 다복(多福) 등을 기원하며 행해지는 무당굿놀이이다. 농사짓기, 고기잡기, 사냥하기, 애 낳기, 복을 불러들이기 등에 대한 구체적인 모방 행위나 유감 주술적 기원을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제액 축귀의 무당굿놀이는 액을 없애거나 악귀를 쫓아내기 위해 행해지는 무당굿놀이이다. 인간에게 해를 끼치거나 끼칠 것이라 예상되는 존재들을 달래어 보내거나 쫓아내는 내용을 갖는다. 재앙을 예방하거나 직접적인 퇴치 양상을 보여줌으로써 실제 삶에서도 그러하기를 기대한다. 재미 추구의 무당굿놀이는 그야말로 재미를 목적으로 하는 무당굿놀이이다. 그 연행의 주된 목적이 오락적 여흥적 재미를 추구하며 행해지는 무당굿놀이이다. 세속적인 내용이나 일상생활의 모습이 주로 표현된다. 풍요 기원이나 제액 구축과 같은 제의적 지향을 표명하기도 하지만, 본령이 아니라 부차적인 것에 머물고 만다.

무당굿놀이에는 제의성과 오락성, 신성성과 세속성, 굿적인 것과 극적인 것 등이 공존한다. 개별 무당굿놀이에 따라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두드러지거나 강조되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무당굿놀이의 변화 혹은 무당굿놀이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개별 무당굿놀이를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개별 무당굿놀이에서 파악되는 어떤 변화의 큰 흐름은 ‘제의화·신성화의 방향’과 ‘놀이화·세속화의 방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제의화·신성화의 방향으로 변화를 보이는 무당굿놀이들은 외부에서 들어와 무당굿놀이화한 것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소놀이굿 유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재미 추구의 무당굿놀이에 해당한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와 제의화·신성화라는 변화를 모색하는 정도는 사례에 따라 다르다. 비록 외부에서 들어왔지만 나름의 제의성과 신성성을 어느 정도 확보한 경우에서부터, 아직도 물과 기름처럼 맞물리지 못한 채로 남아 있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제의화·신성화 방향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놀이화·세속화라는 변화의 흐름이다. 무당굿놀이에서는 놀이성과 제의성 혹은 세속성과 신성성이 공존하기는 하지만, 점차 놀이적 요소 혹은 세속적 요소가 많아지거나 강조되는 경향을 말한다. 놀이화·세속화의 방향으로 변화를 보이는 무당굿놀이들은 대체로 제의적 문맥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 전승 과정에서 판소리나 가면극과 같은 외부 연행 장르의 영향을 받으며 나름의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파악된다. 하지만 제의적 문맥에서 형성되어 전승되는 과정에서 외부의 영향으로 놀이화·세속화라는 변화를 모색하는 정도는 사례에 따라 다르다. 그 제의성이나 신성성을 완전히 탈각하여 세속적인 무당굿놀이 또는 재미 추구의 무당굿놀이라 할 만한 것에서부터, 아직도 제의적이고 신성한 속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까지 다양하다.

제5장 ‘서구인 굿을 보다’에서는 서구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무속을 다루었다. 개화기 이후 우리나라를 여행하거나 탐방한 서구인들의 여러 저작물에 나타난 무속 관련 기록의 의미를 검토한 것이다. 당시 조선을 탐방한 서구인들은 여러 저작물들을 관련 사진과 함께 남겼으며, 이들 자료는 개화기 우리나라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현재 비숍, 칼스, 길모어 등의 여러 저작물이 번역되어 있어 비교적 자료적 접근이 용이한 편이다. 논의된 바를 소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새비지 랜도어가 관찰한 병굿의 사례, 프랑뎅이 본 황해도굿의 사례 등은 당대의 무속 실상이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알 렌, 아손 등의 기록에서도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가 발견된다. 당대의 무속 현상을 가장 꼼꼼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이는 헐버트와 비숍이다. 한국인이 사회생활에서는 유교를, 철학에서는 불교를, 어려움 속에서는 무속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헐버트의 견해는 지금도 통용될 수 있는 주장이다. 유교와 불교와 무속을 서로 다른 층위이면서 상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 것은 종교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굿을 정기적으로 행하는 현대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비숍은 평안도의 병굿과 황해도의 철무리굿을 관찰하여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비숍은 이에 대해 지적인 기여를 하기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여행이 단순한 관광 여행이 아니었음을 내세운다. 무속을 비롯한 한국 문화 전반에 걸쳐 이야기를 진행하는 비숍의 시선에서 한국은 관찰과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아울러 바츨라프 세로 셰프스키가 한국 무속에서 여성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점을 지적한 것, 무속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면서 제의의 종류, 상에 올라가는 제물까지 언급한 것은 글쓴이가 인류학자로 꼼꼼하게 무속 현장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은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이밖에 루이 마렝, 로버트 무스 등이 남긴 다양한 자료도 한국 무속의 실상을 파악하는데 기여했다. 한편, 사진과 별도로 무속 관련 그림을 남긴 엘리자베스의 성과는 서구의 여러 나라에 소장되어 있는 기산 김준근의 풍속화와 함께 한국의 민속 문화를 서구적인 관점으로 해석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서양인들이 한국 무속을 처음 접하면서 가진 느낌은 낯설음이다. 호기심을 가지고 처음 접한 한국 무속에 대해 여러 실상을 기록한 서양인들은 나름의 주관을 가지고 분석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분석을 시작하는데 기독교 중심적인 세계관이 그대로 보인다. 처음부터 한국은 지적 호기심과 분석의 대상, 거리감을 가지고 바라보는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 무속의 실상을 왜곡하는 모 습도 서양인의 기록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다.

한국 무속을 바라본 서양인들의 시선은 무속에 대한 이해가 아무리 깊다 하여도 역시 낯선 나라의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기독교야 말로 무지한 조선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최선의 도구라는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속을 상세하게 기록한다 하여도 그들이 설정해 놓은 전제를 넘어설 수는 없다. 처음부터 한국 무속은 귀신을 달래기 위한 것이고, 그 귀신은 인간을 해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전제하였기 때문에 실재 굿을 보면서도 모든 현상을 귀신과 연결시키는 것은 자연스럽다.

낯설어하면서도 사명감을 가지고 기록을 남기면서 분석하다가, 결국은 왜곡하고 더 이상 무속 탐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서구인들의 모습이다. 당시 조선에는 종교다운 종교가 없다면서, 무속이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한다고 하면서도 보다 근원적인 탐구까지 나가지 못하고 있다. 현지 사정에 밝지 않은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기록의 모든 부분을 검토해보면, 조선은 수준이 낮은 나라였고,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결국 외세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빠져드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이 한국 무속을 관찰하고 기록한 것은 개인적인 호기심의 발로였을 뿐이다.

서양인들이 낯설어 하면서도 분석했고, 이를 왜곡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한국 문화를 부정하지 않고 바라보려는 시선은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한국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한국 문화를 거리감을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남겨 놓은 기록은 행간에서 당시 한국 무속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많은 한국인들이 도리어 한국 문화를 훼손하고 타 문화를 추종하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한국 문화를 문화로만 바라보면 될 터 인데 그들은 한국 문화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주관적인 의미망을 바탕으로 한국 문화를 왜곡한다. 100여 년 전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을 검토하면서 지금도 자행되는 한국 문화 파괴의 여러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서양인들이 가진 시선을 지금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던 인문과학적 태도만큼은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정리된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역사, 무속의례, 무당, 무당굿놀이, 서구인의 시선 등을 중심으로 무속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려 했다. 우리의 의도가 이 책 속에 제대로 반영되었는지, 또 우리의 의도가 어떻게 받아들여질지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다만, 무속을 바라보던 색안경이 이 책을 통해서 벗겨질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은 아직도 강렬하다.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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