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1 무속의 역사적 전개
  • 03. 중세의 무속
서영대

한국무속사에서 중세는 7세기부터 16세기로 왕조사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이다.25)이 시기의 무속 전반을 다룬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연구가 있다. 朴昊遠, 「高麗 무속信仰의 展開와 그 內容」, 『민속학연구』 1, 국립민속박물관, 1991 ; 서영대, 「민속종교」,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 金泰佑, 「高麗시대 무격의 身分과 世習化 過程에 대하여」, 『예성문화』18, 예성문화연구회, 1998 ; 趙興胤, 「조선왕조 초기의 巫」, 『巫와 민족문화』, 민족문화사, 1993 ; 민정희, 「朝鮮前期의 무속과 정부정책」, 『학림』 21, 연세대 사학연구회, 2000. 이 시대는 무속이 정치적 기능을 상실하고 사회적·개인적 기능만 발휘하던 시기이다.

무속이 정치적 기능을 상실했다는 근거로는 첫째, 국왕의 무왕적(巫王的) 성격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물론 국왕은 신성한 존재라는 관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예컨대 고려의 건국설화는 고려 국왕이 서해 용왕을 비롯한 신들의 후예라는 관념을 담고 있으며,26)『고려사』 권1, 世系. 그래서 이를 뒷받침하는 유적으로 개성 대성(開城 大井, 태조 왕건의 할머니인 용녀(龍女)가 친정인 서해를 드나들던 우물)을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했다. 이러한 관념은 고려 후기까지 지속되었으니, 삼별초의 난 때 ‘용손십이진(龍孫十二盡, 용의 후손인 고려 왕실은 12대만에 망한다)’이란 구호가 나온 것은27)『고려사』 권130, 열전43, 반역 배중손.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또 고려시대에는 이자겸(李資謙)이나 무인정권 시기의 집정 무인처럼 왕을 능가하는 권력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이유도 왕이란 신성한 존재여서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관념의 잔존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상적 왕자상(王者像)이 유교적 성군(聖君)이나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바뀌면서 무왕적 성격은 퇴색되고 만다.

둘째, 무격이 국가 조직에서 배제되며, 국정을 보좌하는 기능을 상실한다. 고려시대에도 국가의 관리로 일관이 있었지만 오히려 이들은 무격을 배척하는 입장이었다.28)『고려사』 권16, 세가16, 인종 9년 8월 병자.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는 일관과 무격이 별개의 존재이며 다른 길을 걸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일관의 존재를 가지고 무격이 국가 조직의 일원으로 참여했다고 할 수는 없다.

셋째, 무격이 국가의례에서도 배제된다. 그런데 『고려사』에서 국가적 차원의 기우제에 많은 무격들이 동원되었으며, 많을 때는 300명까지 동원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29)『고려사』 권16, 세가16, 인종 11년 5월 경오. 따라서 무격이 국가의례에서 배제되었다는 것은 잘못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무격의 종교적 능력에 의존한 의례가 아니라, 그들을 장시간 땡볕에 세워두는 것이었다. 즉, 신령의 세계와 통하는 무격을 이런 식으로 학대하면 하늘이 이들을 가엽게 여겨 비를 내려줄 것이라는 논리에 기초한, 소위 ‘폭무기우(曝巫祈雨)’였다. 그리하여 1329년(충숙왕 16)에는 기우제에 지친 무격들이 도망을 갔고, 이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던 사건이 발생하였다.30)『고려사절요』 권24, 충숙왕 16년 5월. 그러므로 폭무기우를 근거로 무격이 국가적 의례를 주관하는 사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31)서영대, 「민속종교」, 『한국사』, 16, 국사편찬위원회, 1994, p.364.

이러한 경향은 조선시대로 오면서 더욱 강화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한 국가였고, 따라서 성리학 이외의 사상은 모두 이단이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에서는 음사 배척에 노력을 경주했지만, 무조건 배척만 한 것은 아니었다. 즉, 유교적 질서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포섭하려 했다. 이러한 사례로는 이사제(里社制)를 들 수 있다. 이사제란 이(里) 단위에 세운 사직신(社稷神)의 제단을 말한다. 여기서 사(社)는 토지의 신, 직(稷) 은 곡물의 신으로, 국가제사의 중요한 대상으로 사직에 제사하는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실내가 아니라 옥외에 제단을 마련하여 사직신을 모셨는데, 그것은 하늘의 기운과 통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사직단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단위에도 설치되었다. 중앙의 사직단에서는 국토 전체의 토지와 곡물신, 지방의 사직단에서는 해당 지역의 토지와 곡물신을 제사했다. 이러한 지방 사직단 중의 하나가 이사(里社)인데, 이사는 100리 또는 25리 단위로 하나씩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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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삼국시대 고구려 때 확인되며 신라를 거쳐 고려시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지방 사직단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조선시대에는 중앙은 물론, 지방에까지 사직단의 설치가 확산된다. 지방 사직단의 설치는 명나라 『홍무예제(洪武禮制)』의 영향이었다. 『홍무예제』는 1381년(홍무 14)에 반포된 국가 예제 규정집으로 여기에는 부주현(府州縣)의 사직과 이사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에서도 1406년 주현 사직단을 두고 사직제를 실시했는데, 『동국여지승람』에서 모든 주현의 읍치의 서쪽에 사직단이 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조치의 결 과이다. 이어서 1414년(태종 14)에는 충청도 도관찰사 허지(許遲)가 40∼50호 단위로 이사를 하나씩 설치하자고 건의했는데, 이를 계기로 이사도 설치되기 시작했다. 1416년 기우제를 이사에서 지내자고 하여 이사의 존재를 기정 사실화한 점이나 세종 때는 이사에서 기우제를 거행했다는 기록이 몇 차례 확인되는 점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이사의 설치를 추진한 목적은 중국에서 시행하고 있던 최신의 유교 예제의 수용이란 의미도 있었지만, 조선왕조 자체의 필요성에서 말미암은 바 크다. 즉, 이사제를 통해 지역민들을 교화하고 단결시킴으로써 향촌사회의 안정과 국가의 향촌 지배를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의 비유교적 민속신앙들을 이사로 흡수·대체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조선왕조에서 사직제는 2월[仲春]과 8월[仲秋]의 첫 번째 무일(戊日)에 거행되었다. 그러므로 이사에서도 사직제도 같은 날 제사되었을 것이다.

명나라의 이사제는 110호를 단위로 1리를 편성하는 이갑제(里甲制)를 보완하는 장치이다. 즉, 이가 행정단위의 존재를 전제로 한 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에는 유명무실화되고 말았다. 이에 비해 조선 초기에는 면리제가 확립되지 않았다. 즉, 이사제의 기초가 되는 이가 행정 단위로서 작동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향촌사회의 민속신앙적 전통은 이사로 대체하기에는 너무 강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에서 이사는 주현 사직과는 달리, 전국적으로 설치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후에도 향촌사회의 유교적 교화를 명분으로 이사의 설립은 추진되었다. 예컨대 1665년(현종 6)에는 허목이, 1670년(현종 11) 윤휴가 이사를 설치하고 이사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사들이 얼마나 존속되었으며, 어느 정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의문이다. 이렇듯 이사제는 조선시대를 통하여 제대로 시 행되지는 못했지만, 이사라는 용어는 조선 후기에는 널리 사용되었다. 그 중 하나는 향리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역에서 배출한 유학자를 모시는 향현사(鄕賢祠)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무속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하여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지역의 수호신이 중시되었다는 점이다. 지역 수호신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은 해당 지역의 산신이다. 산신은 산이 생활의 근거였던 수렵·채집 문화 단계부터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만, 생활의 근거지가 산 아래의 평지로 옮겨진 농경 문화 단계에 와서도 계속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따라 산신은 수렵신에서 농경신으로 기능이 바뀐다. 그리고 농경의 시작과 수확을 전후한 시기에 산신을 산으로부터 모셔와 촌락에서 제사하고, 다시 산으로 돌려보내는 형태로 산신 의례가 바뀌게 된다. 그러나 산신이 수렵 채집단계 이래로 지역의 수호신이란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지역신의 대표는 산신이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특수한 신령이 신앙되기도 했다. 경주의 두두리(豆豆里) 신앙32)朴恩用, 「木郞攷」, 『한국전통문화연구』, 효성여대, 1986 ; 姜恩海, 「豆豆里(木郞)再考」, 『한국학논집』 16, 계명대, 1989., 영해의 팔령신(八鈴神) 신앙33)『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경상도 영해도호부, 명환., 울산의 계변신(戒邊神) 신앙34)『慶尙道地理志』, 蔚山郡., 삼척의 오금잠(烏金簪) 신앙35)李昌植, 「삼척지방 烏金簪祭의 구조와 의미」, 『강원민속학』 7·8, 강원민속학회, 1990. 등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신령의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신체(神體)도 다양했는데, 경주의 두두리신은 나무 몽둥이[목봉], 영해의 팔령신은 방울[령], 삼척의 오금잠 신은 비녀[잠]가 신체였다. 그리고 고려시대부터 성황신이 지역신에 가세하게 된다.

지역신에 대한 의례는 지역민들에 의해 거행되었다. 지역민들은 지역신 의례를 위한 조직을 구성했으며, 이러한 조직을 사신향도(祀神香徒)라 부르기도 했다.36)李泰鎭, 「사림파의 유향소 복립운동」, 『한국사회사연구』, 지식산업사, 1986, pp.128∼129. 그리고 사신을 위한 결사는 제사뿐만 아니라 지역의 토목 사업에 투입되기도 했으며, 경주의 두두리 결사가 귀교(鬼橋)나 영묘사의 3층 불전을 건설했다는 전승은37)『신증동국여지승람』 권21, 경주부 고적 및 불우조.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38)선조 41년(1608)에 편찬된 『영가지』에 “吉安石城은 현 동쪽 2리에 있는데 둘레가 700보이다. 지금은 허물어져있다. 성위에 성황당이 있어 촌민들이 매년 입춘 때에 재계하고 공양을 드리며 온갖 놀이를 하여 풍년을 기원하는데 이를 御溝香徒라 한다.”고 하였다.

지역신에 대한 신앙과 의례들은 지역민들의 정체성 확인과 사회적 통합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그래서 지역민들은 타향에 이주해서도 고향의 지역신을 계속 숭배했다. 예컨대 경주 출신의 이의민(?∼1196)은 출세를 해서 수도인 개경에 거주하면서도 계속 두두리신을 모셨으며, 나주 출신의 정가신(?∼1298) 역시 개경에서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나주 금성산신(錦城山神)을 숭배했다.

이렇듯 지역신은 향토의식의 중요한 근거였기 때문에 지역 간의 경쟁이 지역신 신앙에 투영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지역신 봉작을 둘러싼 지역 간의 경쟁이다. 고려에서는 국가나 지역에 공로가 있는 신들에게 봉작을 수여하는 제도가 있었다. 여기에는 국가의 경사나 신의 음조(陰助)가 필요할 때 사전에 등재된 모든 신을 봉작하는 경우와39)충렬왕 7년(1281) 3월 병오 중외성황·명산대천재사전자 개가덕호(『고려사』 권29, 충렬왕 세가). 특정 신만 봉작하는 경우가40)현종 16년 5월 이해양도정안현 재진산호수 승남해신사전(『고려사』 권63, 지17 예5 길례소사 잡사 ; 권23, 세가23). 있었다. 후자의 경우는 주로 지역민의 요청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지역민들은 자기 지역신의 봉작을 높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그것은 지역신의 봉작이 자기 지역의 국가적 위상과 관련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역신 봉작을 둘러싼 경쟁은 이러한 이유 때문인데, 13세기 나주 지역 사람들의 금성산신 봉작을 위한 노력에서 그 일단을 살펴볼 수 있다. 당시 나주는 전라도 지역에서 광주와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런데 광주 무등산신의 경우, 신라 때부터 국가제사의 대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1273년에는 삼별초난 진압을 도왔다고 하여 국가로부터 봉작 수여가 있었다.41)『고려사』 권63, 예지5, 길례소사, 잡사. 이러한 조치에 대해 나주 측에서는 금성산신을 모시는 무녀를 통해 여론을 조성하고, 나주 출신의 관리가 적극 주선하여 결국 1277년에 금성산신을 정령공(丁寧公)으로 봉했다.42)『고려사』 권63, 예지5, 길례소사, 잡사. 충렬왕 3년 5월 임진. 이후 1281년에는 제2차 일본 정벌 때 공이 있다고 하여 무등산신(無等山神)을 가봉했는데,43)『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사묘조. 이를 적극 주선한 인물은 광주(광산) 출신으로 동정 원수(東征元首)였던 김주정(金周鼎, ?∼1290)이었다. 따라서 1281년의 가봉 역시 나주 금성산신 봉작에 대한 광주인의 경쟁의식의 발로가 아니었던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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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성황대신사적기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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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신들에 대한 봉작은 지역의 민심을 수렴하는 수단인 동시에 국가의 권위를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특히, 지역 간의 경쟁의식이 국가의 신지(神祇) 봉작으로 나타날 경우, 봉작 수여의 주체인 국가의 권위가 그만큼 더 신장될 수 있었다.

무속의 사회적 기능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지역 사회의 신앙과 의례의 중심에 지방 세력인 향리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전주에서는 매월 초하루 아리(衙吏)들이 사슴·꿩·토끼를 제육(祭肉)으로 삼아 성황에게 제사했으며,44)『동국이상국집』 권37, 祭神文-全州祭城隍致告文 無韻. 순창의 성황제는 매년 5월 1일에서 5일까지 향리 5명이 교대로 자신의 집에 당(堂)을 설치하여 성황신 부부를 모셨다고 한다.45)남풍현, 「순창 성황당 현판의 판독과 해석」, 『성황당과 성황제』, 한국종교사연구회, 민속원, 1998, p.61. 또 삼척 오금잠제 역시 5월 5일부터 여러 가지 금기를 지키며 3일 동안 계속되었는데, 이 일을 주관하는 자는 향리의 대표인 호장(戶長)이었다고 한다.46)허목, 『미수기언』.

물론 이러한 의례에서 사제자(司祭者)는 무격이었지만, 의례 전반을 주관하고 관장하는 것은 향리 계층이었다. 지역 의례는 지역민의 귀속의식의 근거이며 결속의 구심점이었다. 그렇다고 할 때 이러한 지역 의례를 향리들이 주도했다는 것은 무속이 지역 세력의 권위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또 무속이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길흉화복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기능을 발휘했음도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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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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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왕실에서는 양재초복(禳災招福)을 무속에 의존한 바 많았다. 우선 초복을 위해서는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별기은(別祈恩)을 거행했다.47)李惠求, 「別祈恩考」, 『한국音樂序說』,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2, 참조. 별기은이란 지방의 명산대천에 무격을 파견하여 왕실이 사사로이 복을 비는 의례이다. 또 양재의 예로는 인종(1122∼1146)이 병에 걸렸을 때, 병의 원인이 척준경의 원혼 때문이란 무격의 말에 따라 척준경의 자손에게 벼슬을 내렸다든지, 역시 무격의 말에 따라 김제 벽골제를 허문 것 등을 들 수 있다.48)『고려사』 권17, 세가17, 인종 24년 2월 병진·경신. 이것은 太歲神이 머무는 방위에서 토목공사를 비롯한 動土를 했을 때 재앙이 발생한다는 관념이다. 또 고려시대에는 왕실 내부에서 정적을 몰아내기 위한 저주 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이것은 유감주술(homeopathic)적 방법으로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인데 발각이 될 경우 도리어 처벌을 받았고, 이로 말미암아 정치 세력의 변화가 초래되기도 했다.49)서영대, 「민속종교」, 『한국사』 21, 국사편찬위원회, 1996, pp.182∼186.

또 지배층의 무속 신앙으로는 경주 출신의 이의민이 자신의 집안에 경주 지역의 신인 두두리를 모신 신당을 채려두었다든지,50)『고려사』 권128, 열전41, 반역2, 이의민. 김준이 요방(鷂房)을 신뢰하여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모두 길흉을 점쳤다든지,51)『고려사』 권130, 열전42, 반역3, 김준. 정가신이 무격의 말에 따라 나주 금성산신을 정령공(丁寧公)으로 봉하자고 주장한 것52)『고려사』 권105, 열전18 정가신. 등을 들 수 있다.

고려 말∼조선 초에는 위호(衛護)라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은 조상의 혼령을 무격의 집안에서 모시게 하고, 그 대가로 무격에게 신노비(神奴婢) 등을 바치는 것이다.53)金鐸, 「朝鮮前期의 傳統信仰-衛護와 忌晨祭를 중심으로」, 『宗敎硏究』 6, 한국종교학회, 1990, pp.46∼55. 이것도 일정 이상의 경제력을 갖춘 지배층의 무속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이 시기에는 공장무(空唱巫)가 있었는데, “공중에서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지어 내었고 그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오는 것이 길을 비켜라고 호령하는 것 같았다.”54)『고려사』 권105, 열전18, 안향.라든지, “귀신을 부려 공중에서 소리를 내는데 사람의 말과 비슷하다.”55)『세종실록』 권72, 세종 18년 5월 정축.고 한다. 이로 미루어 공창무란 자신은 입을 다물고 있지만 공중에서 소리가 나게 하여 마치 귀신이 말하는 것처럼 하는 일종의 복화무(腹話巫)로 추측된다.56)孫晋泰,「朝鮮及中國의 腹話巫」, 『朝鮮民族文化의 硏究』, 을유문화사, 1948, pp.324∼329. 그런데 복화술이 신기한 탓에 공창무에 대한 신앙은 열광적인 것이었으며 지방의 수령들까지 다투어 공창무를 받들 정도였다고 한다.57)『고려사』 권105, 열전18, 안향.

이렇듯 왕실에서부터 지배층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양재초복을 위해 무격을 숭상했던 까닭에 서민들 사이에서도 무풍은 대단히 성행했다. 이규보(1168∼1241)의 「노무편(老巫篇)』(『동국이상국집』 권2)은 이웃에 살면서 소란을 피우던 노무가 국가의 무격 축출령으로 쫓겨나게 되자 이를 기뻐하여 지은 시이다. 이에 의하면, 평소 노무의 집에는 “남녀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문 앞엔 신발이 가득하고 어깨를 부딪치며 문을 나오고 머리를 나란히 해서 들어 간다”고 할 정도였던 것이다.58)『고려도경』 권17, 사우의 “高麗素畏鬼神 拘忌陰陽 病不服藥 雖父子至親不相視 唯知詛呪壓勝而已”란 기사도 당시 무풍의 성행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고려 후기부터는 사회적·개인적 기능만을 유지하던 무속에 대해서도 배척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고려시대 무속 배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 인종 9년(1131)에 처음 등장한다.59)『고려사』 권16, 세가16, 인종 9년 8월 병자. 그리고 배척의 초기 단계에는 지방관의 취향 등 개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으나 고려 후기로 가면서 점차 국가적 차원의 배척으로 수위가 높아진다.

무속의 배척과 탄압은 고려 말 유교로 무장한 신흥사대부 계층의 집권,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교국가 조선왕조의 건국으로 강도를 더해 간다. 이 시기 배척의 이유로는 무속의 비합리성과 비윤리성이 지적되고 있으며 경제적 이유도 한몫한다. 비합리성이란 무속의 효능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무속 의례는 올바르지 못 한 제사, 즉 음사(淫祀)라는 것이다. 비윤리성이란 위호처의 풍습처럼 조상의 영혼을 무격의 집에서 모시기 때문에 불효를 조장한다든지, 남무가 여무로 변복해서 다님으로써 풍기를 문란케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앙과 의례에 많은 비용을 낭비하기 때문에 경제적 궁핍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도 배척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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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격을 배척하고 탄압하는 방법에는 직접적인 방법과 간접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직접적 방법이란 무격에게 직접 제재를 가하는 것인데, 문제를 야기한 요무(妖巫)를 처벌하는 것도 있었고 무격의 거주지를 도성 밖으로 제한한 것도 있었다. 직접적 방법은 여러 차례 논의를 거친 후 마침내 『경국대전』을 통해 법제화되기에 이른다.

『경국대전』 형전의 다음 조항이 그것이다.

○ 도성 안에서 야제(野祭)를 행한 자, 사족의 부녀로서 야제·산천·성황의 사묘제를 직접 지낸 자는 장 100에 처한다.

○ 사노비나 전지를 무격에게 바친 자는 논죄 후 그 노비와 전지를 국가에 소속시킨다.

○ 경성 안에 거주하는 무격은 논죄한다. 또 간접적 방법이란 무격의 활동을 직접적으로 제한한 것은 아니지만, 무격에게 상당한 부담을 줌으로써 무속 배척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무녀들을 국립의료기관인 동서활인서에 배속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것은 무격의 치병 기능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빈민 환자의 간호를 담당하게 함으로서 부담을 주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각종 무세(巫稅)를 징수하는 방법도 동원되었다.60)임학성, 「조선시대 巫稅制度와 그 실태」, 『역사민속학』 3, 역사민속학회, 1993, pp.90∼126.

○ 무업세: 잡세의 일종으로 무격의 영업세이다.

○ 신포세(神布稅): 함경·강원도에만 있는 무세로, 굿에서 신에게 바친 포(布)의 일부를 징세하는 것이다.

○ 신당퇴미세(神堂退米稅): 신당에 올린 쌀의 일부를 징세하는 것이다.

이밖에 고려 말 사전개혁을 단행할 때에도 무격은 국가의 급전(給田) 대상에서 제외했는데,61)『고려사』 권78, 식화지1, 전제 녹과전. 이것도 일종의 간접적 배척 방법이라 하겠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무격은 점차 천시되기 시작했고,62)李能和는 「조선무속고」, 『啓明』 19, 계명구락부, 1927, p.8에서, 고려시대에는 지배층 출신의 무격도 있었다고 하면서 충선왕 때 첨의좌정승 판삼사사를 지낸 姜融의 누이의 경우를 예로 들었다. 그러나 강융은 원래 官奴 출신이므로, 강융의 누이를 가지고 이러한 주장을 펴기는 어렵다. 마침내 무속 자체가 사회적 기능마저 상실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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