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3. 고려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1. 점복
이용범

고려 이전에 이미 자연의 변화나 기이한 사건의 의미에 대한 해석이나 점복에서 무당의 독점권이 허물어지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무당이 담당한 점복 자료는 더욱 드물어진다. 무당이 행한 일반적인 점복 관련 사례는 거의 발견되지 않고, 병의 원인을 밝히는 점복의 사례가 한가지 나타날 뿐이다.

즉, 인종 24년(1146)에 왕이 병이 들자 무당이 죽은 척준경(拓俊京)의 원혼이 빌미가 되었다고 말한다. 무당의 말에 따라 왕은 척준경을 문하시랑 평장사로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불러 벼슬을 주었다. 여기서 무당의 점복이 죽은 자의 원혼과 관련된 것이 흥미롭다. 이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죽은 자의 혼과 관련된 무당의 역할과 능력이 인정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사례로 이해된다.

물론 원종 때 권신 김준(金俊)은 무당에게 사사로이 국가의 길흉을 점치게 하기도 하였다.

때에 요무(妖巫)가 있어 요방(鷂房)이라 불렀다. 김준의 집에 출입하매 김준이 그 말에 미혹하여 국가의 일은 모두 길흉을 점하니 요부인(鷂夫人)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특별한 경우로 김준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무당의 점복을 활용한 것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이것을 점복을 통해 무당이 국가와 관련된 일이나 정책에 관여한 사례로 보기는 어렵다.

반면, 무당과 무관하게 행해진 다양한 점복의 사례가 발견된다. 일관에 의한 점이나 미래 길흉에 대한 예측은 말할 것도 없고, 왕 자신에 의한 점복, 여러 점구(占具)에 의한 점, 얼굴을 보고 판단하는 관상점(觀相占), 태몽과 같은 꿈으로 미래를 점치는 몽점(夢占), 천문현상이나 기상이변·동물 등 다양한 자연현상을 미래의 징조로 해석하는 점 등 여러 형태의 점이 행해졌다. 그리고 이런 점복행위는 일관이나 승려 같은 관련 전문가 외에 왕, 일반인 등 다양한 주체에 의해 행해졌다.

따라서 고려시대에 점복과 미래를 예측하는 역할은 무당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당에 의한 점이나 미래 예측 행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무당이 종교전문가로서 담당했던 의례 행위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것이 기록을 통해 충분히 확인되지 않는다는 것은, 고려시대에 무당의 점복행위가 여타의 점복행위와 다른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아마도 무당의 점복은 일반적인 점복행위의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당에 의한 예언 사례 역시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무당의 신내림 사례가 발견된다는 점에서 신내림을 통한 무당의 미래 예언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는 국가적인 차원과 개인적인 차원에 걸쳐 다 나타난다.

개인과 관련된 예언은 이규보(李奎報)의 「노무편(老巫篇)」에서 나타나듯이 굿에서 내리는 신의 공수 형태로 나타난다. 무당의 예언 중 국가와 관련된 예언은 국가의 길흉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든지 아니면 이른바 요언(妖言)으로 처리되었다. 무당이 국가 차원의 길흉을 말한 것은 등주(登州) 성황사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함유일(咸有一)이] 삭방도 감창사(朔方道監倉使)가 되었을 때 등주 성황신(城隍神)이 자주 무당에게 강신(降神)하여 기이하게도 국가의 화복을 맞혔다.

등주 성황사는 국행제(國行祭)의 대상이었는데, 이처럼 무당의 신내림을 통해 전달되는 성황신의 예언이 영험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언으로 처리된 예언의 사례는 주로 공민왕 때 발견된다. 공민왕 22년(1373) 4월에 의성고동(義成庫洞)의 무녀는 꿈과 신내림을 통해 공민왕과 관련된 예언을 한다. 역시 공민왕 때 천제석(天帝釋)을 자칭하는 무당이 나타나 사람의 화복과 국가에 대한 예언을 한다.

어떤 요무(妖巫)가 제주로부터 와서 스스로 천제석이라 일컫고 망령되이 사람의 화복을 말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앞을 다투어 그를 받들어 이르는 곳마다 재물이 산처럼 쌓였다. 천수사(天壽寺)에 이르러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들어가면 풍년이 되고 병란이 멈추어 국가가 태평할 것이라 만약 임금이 나와서 맞이하지 않으면 내가 반드시 하늘에 올라갈 것이다.”하니 서울 사람이 모두 혹하여 그에게 귀의함이 저자와 같이 하였다. 이운목(李云牧)이 말 탄 병졸과 어사대의 관속을 데리고 가서 그 무당을 잡아다가 머리를 깎고 거리의 옥에 가두어 곤장을 쳐서 쫓아 보냈다.

유탁(柳濯) 또한 공민왕 때 천제석을 자칭하고 “요언으로 중인(衆人)을 미혹(迷惑)하는” 무녀를 곤장으로 처벌한다. 이 무당이 했다는 말 역시, 그것이 ‘요언’으로 표현되고 천제석이 내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운목이 처벌한 무당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길흉화복을 넘어선 국가 전반에 대한 예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여기서 무당들이 천신인 제석이 자신에게 강신한 것을 내세워 앞날에 대한 예언을 하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불교의 신인 제석이 이미 무당의 몸주신으로 자리잡았음과 동시에 당시 고려사회에서 제석신의 종교적 위상이 높았음을 말해 준다.

신내림을 통한 무당의 이러한 에언에 고려사회는 진지하게 반응하였다. 예컨대 나주 출신의 정가신(鄭可臣)은 금성산(錦城山) 신이 무 당에게 내려 “진도(珍島), 탐라(耽羅)의 정벌에서 내가 실로 힘이 있었는데 장사(將士)에게는 상을 주고 나에게는 녹을 주지 않음은 어찌함이냐. 반드시 나를 정령공(定寧公)으로 봉하라.”고 하자, 왕에게 간하여 정령공(定寧公)에 봉하고 녹미(祿米)를 바친다. 또한, 신이 내린 무당을 두려워하여 영접하고 제를 드리는 다른 사례들 역시 이를 잘 나타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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