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 04. 조선시대 무속의례
  • 무속의례의 유형
  • 1. 점복
이용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도 국가적 차원의 일에 공식적으로 무당의 점복이 활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비공식적이거나 개인적인 차원에서 무당의 점복은 미래의 일을 점치고, 이미 일어난 사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정당화하는데 활용되었다. 이런 점에서 무당의 점복은 여전히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공양왕 4년(1392)에 이성계가 해주에 사냥하러 갔다가 다치게 되는데, 무당은 이를 만인에 의해 추대되는 계기로 해석한다.

3월 세자 석(奭)이 중국에 조현(朝見)하고 돌아오니, 태조가 황주(黃州)에 나가서 맞이하고, 드디어 해주에서 사냥하였다. 장차 길을 떠나려 하매 무당 방올(方兀)이 강비(康妃)에게 말하기를, “공의 이번 행차는 비유하건대, 사람이 백 척의 높은 다락에 오르다가 실족하여 떨어져서 거의 땅에 이르매, 만인이 모여서 받드는 것과 같습니다.” 하니, 강비가 매우 근심하였다. 태조가 활을 쏘아 사냥하면서 새를 쫓다가 말이 진창에 빠져 넘어졌으므로 드디어 떨어져 몸을 다쳐 가마를 타고 돌아왔다.

태종 역시 태종 7년(1408)에 왕위의 선위(禪位)를 미룬 것을 무당의 점으로 정당화한다.

또 어느 날 밤에 산올빼미[鵩鳥]가 침전 위에서 울기에 그 이튿날 내가 다른 침실에서 잤는데, 또 그 위에서 울기를 3, 4일이나 계속하였다. 내가 진실로 괴이하게 여겼었다. 또 들으니, 정비(靜妃)가 신에게 제를 드린바 무당이 신의 말을 전하기를, “내가 이미 전위(傳位)하면 안 된다는 뜻을 서너 차례나 일렀는데, 왕이 알지 못하는구나!” 하였다 한다. 내가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누가 와서 일렀단 말인가? 무당의 말은 믿을 만한 게 못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되풀이하여 이를 생각해 보니, 속으로 그것이 산올빼미인 것을 헤아리고, 이에 선위(禪位)하는 일을 실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비공식적이지만, 중요한 일이 발생하였을 때 그 일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무당에게 묻기도 히였다. 정종 3년(1400) 2차 왕자의 난이 났을 때, 이방원(李芳遠)의 부인은 무당을 불러 그 승패 여부를 묻는다.

처음에 난이 바야흐로 일어날 즈음에 이화(李和)와 이천우(李天祐)가 정안공(靖安公)을 붙들어서 말에 오르게 하니, 부인이 무녀 추비방(鞦轡房)·유방(鍮房) 등을 불러 승부를 물었다. 모두 말하기를, “반드시 이길 것이니 근심할 것 없습니다.” 하였다.

또한, 태종의 넷째 아들인 성녕대군(誠寧大君) 이종(李褈)이 완두창(剜豆瘡)으로 위독할 때도 병의 치유 여부를 점쳤으며, 단종 복위 사건 때에도 단종의 앞날을 점쳤다.

그런데 이때 점복을 행한 것은 맹인무당, 즉 맹격(盲覡)인 판수였다. 이 두 사례는 판수 역시 넓은 의미의 무당의 범주에 속하지만, 점복 행위가 좁은 의미의 무당에 한정된 활동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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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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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수는 조선시대에 점복을 담당한 전문가 중의 하나였다. 세종 23년 11월 3일의 사례를 통해서도 점복에서 판수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알 수 있다.

판수[盲人] 김학루(金鶴樓)가 경상도 하양현(河陽縣)에 사는데, 사람의 수요화복(壽夭禍福)을 말하되 매우 증험이 있으며, 명경(明鏡)으로 수(數)를 점친다고 스스로 말하매, 전지(傳旨)하여 불러서 서울로 오게 하여 인견(引見)하고는 특별히 집을 하사하였다.

점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사대부의 생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6세기 중반의 사대부인 이문건(李文楗)이 남긴 『묵재일기(默齋日記)』에는 다양한 삶의 계기에서 점복을 한 사례가 발견된다. 이문건은 스스로가 주도하여 자식들의 사주팔자, 며느리의 출산 일시, 태어날 아이의 수명, 가족과 이문건 부부의 액, 자식들의 병 등 다양한 가정사에 대해 점복을 하고 있다. 이때 그는 무녀는 물론이고 맹인무당인 판수, 점술인, 승려 등 다양한 전문가들에게 문복(問卜)을 하였다. 이 중 점복은 무녀보다는 맹인판수와 점술인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문건은 단골 무녀와 단골 점술인을 두고, 필요에 따라 점복도 하고 무속의례도 하였다.

이러한 이문건의 사례 외에 다른 사례를 통해서도 조선시대에는 점복에서 맹인무당인 판수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촌집(象村集)』을 보면, 이항복(李恒福) 경우에도 갓 태어나 젖도 빨지 않고 울지도 않으므로 놀라 이상하게 여기고 판수를 불러 앞날을 점쳤다고 한다. 또한,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조선시대에 판수들이 길거리에서 문복행위를 하는 것이 나타난다.

이문건의 사례를 비롯해서, 영조 5년(1729) 10월 28일의 다음 사례 역시 무당이나 판수와 같은 민간 종교전문가를 통해 점복하는 것이 양반들에게도 낯선 일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다.

함경남도 안집어사(安集御史) 이종성(李宗城)이 아뢰기를, “예조좌랑 진재박(陳在搏)은 함흥 사람인데, 덕원(德源) 객사에 와서 무당을 불러다가 자기가 친히 문복(問卜)하는 짓을 하여 체모를 손상하고 진신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으니, 파직하시기 바랍니다.”하니, 윤허하였다.

『점필재집(佔畢齋集)』에 실린 김종직(金宗直)의 시에도 자신이 아프자 아내가 몰래 점을 치려한다는 구절이 있다 이로 미루어 특히 질병과 같은 위기상황에서는 양반가에서도 점복을 행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에 무당이나 판수 같은 전문가들에 의해 행해진 점복에는 쌀점[擲米占], 글자점[擲字占], 관상점, 명경점(明鏡占), 사주점 등이 있다. 쌀점은 소반 위에 쌀을 집어 던져 쌀이 흩어진 모양으로 점을 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선조(宣祖) 32년(1599) 3월 25일에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무녀를 불러 쌀점 치는 것을 비 판하는 기사가 나타난다.

아, 무당의 설은 삼척동자도 다 그것이 괴탄(怪誕)하다는 것을 안다. 유정은 삼군의 생명을 맡고 곤외(閫外)의 중책을 받은 사람으로서 도리어 요망한 무당이 쌀을 던지는 설을 믿어 자신의 길흉을 점치려고 하였으니 어찌 비루하지 않다 하겠는가.

이러한 쌀점은 현재에도 무당들에 의해 즐겨 사용되는 점복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글자점은 파자점(破者占)이나 호자점(呼者占), 척자점(擲字占)처럼 글자를 가지고 점을 치는 것이다. 파자점은 특정 글자를 회의문자(會意文字)처럼 쪼개어 해석하는 방법이다. 호자점은 특정 글자를 불러 그 글자를 가지고 길흉을 점친다. 척자점은 쌀점에서 살을 던져 점을 치듯, 글자를 던져 그 결과로 점을 치는 방법이다. 이문건의 『묵재일기』에는 이러한 글자점은 판수나 점술인에 의해서 행해진다.

관상점은 얼굴 상을 보고 점치는 것이다. 이숙번(李叔蕃)이 일곱 살 때 어머니와 무당집에 갔었는데, 무당은 이숙번의 상을 보고 그의 앞날을 점친다.

공[이숙번]은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 윤자당(尹子當)과 어미는 같고 아비는 다른 형제이다. 윤자당의 어머니 남씨가 젊었을 적에 과부가 되어 함양에 있었는데, 자당이 일곱 살 때에 어미를 따라 무당 집에 가서 운수를 물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 아기는 귀히 될 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아우의 힘으로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남씨가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 어찌 아우가 있을 것이오.” 하였더니, 뒤에 남씨가 이씨 집에 가서 아들을 낳은 것이 공이었으며, 윤자당도 또한, 공의 힘으로 공신을 봉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용재총화』).

명경점은 위에서 소개한 세종 때의 판수 김학루처럼 거울을 가지고 점을 치는 것이다. 사주점은 태어난 해, 날, 달, 시를 간지로 계산하여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민간의 여러 전문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법에 의한 점복이 행해지고 있었으며, 무당 역시 그 일익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편, 무당의 신내림에 의한 예언 역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국가에서는 그들을 서둘러 처벌하거나 분리시킴으로써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태종 5년(1405) 12월 28일에 이른바 청주의 관비 출신의 요망한 무당에게 신이 내려 점치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자 곤장의 처벌을 가하도록 한다. 또한, 성종 21년(1490) 8월 5일에 군역으로 서울로 번상(番上)한 보은 출신의 정병(正兵) 김영산(金永山)에게 신이 내려 도성안의 사녀가 다투어 문복을 하러 오자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결정한다.

세종 25년(1443) 8월 25일 의정부에서 올린 음사 금지조례의 하나에 무당들이 “혹은 고금(古今)에 없는 신이라고 칭하든가 혹은 당대에 사망한 장수나 정승의 신이라고 칭하면서 별도로 신호(神號)를 정하고 제 스스로 이르기를, ‘신이 내 몸에 내렸다’고 하여, 요망한 말로 여러 사람을 혹하게 하는 자는 요망한 말, 요망한 글을 조작한 율에 의하여 처참하게”하라고 규정한 것이나, 이른바 공창무(空唱巫)를 사회적으로 더 문제시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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