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2. 무당의 생활사
  • 사회의 ‘바리데기’로 살아온 사람들
이경엽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된 ‘왕꽃선녀님’이란 드라마가 있었다.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그 드라마는 극적 재미나 스토리의 전개, 미모의 탤런트 등이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무당을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더 특별한 관심을 모았다. 당시 방송국 홈페이지에는 시청자들의 반응과 댓글이 줄을 이었는데 신선하고 재미있다는 평가와 더불어 무당을 소재로 삼은 것에 대한 비난도 많았다. 비난 중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는 저녁 시간대에 무당이 등장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는 것부터 왜 하필 무당이냐, 무당을 미화하고 미신을 조장하느냐는 불만과 무당 자체가 싫다는 의견이 많았다. 드라마를 둘러싼 여러 논란 속에는 무당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이 잘 담겨 있다.

‘왕꽃선녀님’이 방영될 무렵 서울에서 활동하던 무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서울굿에 관한 질문을 하다가 무당 입장에서 그 드라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을 했다. 바빠서 드라마를 챙겨보지 못하지만 몇 번 봤다고 하면서 “무당도 어머니이고 여자라고 해줘서 고맙더라.”고 했다. 무병이 들어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게 되고, 시간이 흘러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긴 딸마저 무병을 앓게 되는 상황 때문에 고통받는 어머니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것에 관한 소감을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충격을 주었다. 일반 시청자는 한복 잘 입는 단정한 무녀와 미모의 딸에 주목하고, 그들이 품위 있고 잘생긴 상대 배우와 펼쳐가는 러브스토리에 주목하고 있었지만, 드라마 밖 무당들은 상식적인 상황 설정에 눈길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당도 사랑을 하고,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고 고통을 겪는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줘서 고맙고, 또한, 딸에게 닥친 운명을 대신 막아보고자 목숨을 거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줘서 고맙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우리는 무당을 이상한 부류로 취급하는 데 익숙해서 무당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무당에게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리고 또 고민하는 지극히 소박한 삶의 모습마저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당은 종교 성직자인데도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왜 그럴까? 불교나 기독교의 성직자는 해당 종교 신도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존경을 받는다. 특히, 신도들에게는 각별한 경외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독실한 이들의 경우 신념을 갖고 성직자의 길을 걷고자 나서는 이들이 적지 않고, 주변에서도 그것을 특별하게 인정해 준다. 유명한 목사나 신부, 스님들을 지도층 인사로 각별하게 대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당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사람들은 중요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무당을 찾는다. 마을의 평안과 풍년, 풍어를 빌고자 할 때 무당을 청해 굿을 한다. 또 집안 어른이 죽어 그 영혼을 좋은 곳으로 천도하고자 할 때, 객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영혼을 맞이하고 건져 올리고자 할 때, 까닭 없이 아프고 우환이 있어 걱정이 끊이지 않을 때 무당을 찾아 간다. 그리고 굿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편으로 무당을 천하고 낮게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굿을 의뢰한 사람도 주변의 시선을 꺼려해 비밀스럽게 진행되기를 원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므로 무조건 일반화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빛과 그림자 중에 음영이 훨씬 짙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삶의 굴곡 속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할 때 상담하는 상대이며, 그를 통해 신에게 소원을 빌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면서도, 무당을 천대하는 이유가 뭘까?

물론 무당을 따르고 무교를 믿는 신도들은 무당을 대접하고 그들을 존중한다. 집안의 사소한 일까지 무당에게 상담하고 철따라 공을 들이는 이들도 많이 있다. 어떤 이들은 무당과 더불어 살아간다고 생각될 만큼 무당을 의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종교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므로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과 별개로 성립할 수 없다. 무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거나 단일하다면 모순되는 현상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굿을 의뢰한 사람들마저도 앞뒤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굿판에서는 조상을 위해 빌어 달라고 하고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해결해 보고자 매달리면서도 일상적인 영역에서는 정반대의 대접을 하는데, 이는 사회적 인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무당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은 역사적 산물이다. 무당 자체에 흠결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인식이 그렇게 돼 있다는 것이다. 문화권에 따라 성직자를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상층 문화를 주도해 온 지배이념의 의도에 따라 그것이 달라져왔고, 긴 기간 부침을 거치면서 무당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도 지금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일상적인 영역에서 무당은 하대를 받아왔다. 같은 마을 젊은 사람들이 아저씨나 할아버지뻘 되는 무당에게 하대하는 언어를 사용 하는 것이 보통이고, 또래 아이들은 무당의 아이들을 별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래서 무당의 아이들은 정상적인 환경에서 성장하기 어려웠고 운명처럼 덧씌워져 있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치기도 했다.

무당은 오랜 세월 동안 사회의 바리데기로 살아왔다. 바리데기는 무속 신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이다. 바리데기는 주인공 이름이면서 신화 제목이기도 하다. 바리공주라는 별칭이 있지만 바리데기란 이름이 더 일반적이다. 바리데기 신화는 죽은 이를 천도하는 굿에서 빠지지 않고 불려진다. 전국적으로 널리 전하고 다양한 버전으로 연행되지만 대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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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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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데기 부모가 혼인한 후에 연이어 딸을 낳는다. 일곱 번째도 딸을 낳아 밖에 버린다. 부친이 중병에 걸린다. 병을 낫게 할 약수가 서천서역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섯 딸에게 약수를 구해오라고 부탁하지만 모두 핑계를 대고 거절한다. 바리데기가 약수를 구하러 길을 떠난다. 약수를 지키는 이를 만나 일정한 대가를 치르고 약수를 구해와 죽은 부친을 살려낸다. 바리데기가 부친 살린 공을 인정받아 저승 세계를 지키는 신으로 좌정한다.

바리데기는 일곱 번째 딸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버려진다. 버려진 아이란 뜻의 바리데기는 이렇게 해서 얻어진 이름이다. 아버지가 병들어 죽게 되었음에도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며 살던 여섯 언니들은 온갖 핑계를 대고 약을 구해오라는 부탁을 거절한다. 하지만 바리데기는 쑥대밭에 버려져 죽을 위기에 처하고 부모 없이 자랐음에 도 다른 사람들이 못 간다고 회피하는 서역국에 가서 온갖 고초를 겪은 후에 약수를 구해와 아버지를 구하게 된다. 버려지고 구박받는 존재가 절박한 상황에서 구원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바리데기는 어쩌면 무당의 자화상 같다는 느낌을 준다. 서울 무당들은 바리공주를 일러 무당의 조상이라고 여기는데, 바리데기의 처지가 무당과 다를 바 없어서 무조신(巫祖神)이라는 설명이 예사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바리데기와 무당은 버려지고 소외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무당은 성직자이지만 사회적 하대를 받는 바리데기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바리데기가 버려진 존재로 살지 않고, 누구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저승문을 지키는 신으로 자리잡았듯이 무당도 사람들의 온갖 소원을 신에게 고하는 중대한 소임을 맡고 있다. 사회의 바리데기임에도 그 역할은 결코 버려질 수 없는 존재로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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