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 02. 무당의 생활사
  • 무당의 결혼과 거주
이경엽

무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한결같지 않은 까닭에 이들의 일상은 일반인과 다른 측면이 있다. 갑작스럽게 신을 받아 무당이 된 경우나 내림으로 무당을 하는 경우 모두 하대 받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강신무이건 세습무이건 스스로 원해서 무당이 된 사례는 별로 없다. 존경받지 못하는 삶을 누가 기꺼이 나서 받아들이고자 하겠는가. 그렇지만 무당이 되거나, 또는 무당 집안에서 태어나면 그것이 숙명이 돼버리기 때문에 일반인과 다른 삶을 살기 마련이었다.

무당과 그들의 가족들은 사회적 하대를 받으면서 살아온 남다른 내력을 갖고 있다. 그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보면 어린 시절 주위의 천대를 받으며 서럽게 자랐던 일, 놀림 받기 싫어 학교에 가지 않게 되었던 일, 비무계의 이성과 사귀려다 폭행 당했던 일, 무업을 선택한 이유로 가족들과 인연을 끊게 되었다는 얘기들을 들을 수 있다. 어떤 무녀는 아들이 서울에서 교회 목사로 있다면서 며느리가 자신이 굿하러 다니는 걸 알면 큰일 난다며 신분 노출을 꺼려했다. 또 어떤 무녀는 자신이 굿하는 걸 주변 사람들이 모르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부탁하는 일도 있었다. 이처럼 자식들의 반대에 부딪쳐 굿을 안 하는 경우이든, 숨기면서 몰래 하는 경우이든, 아니면 내세우며 당당히 하는 경우이든 모두 남다른 삶의 내력을 안고 있다.

이들은 삶 속에 문신처럼 박혀 있는 사연들을 안고 있다. 보통 사람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지만 가슴 속에 묻어둔 사연은 예사롭지 않다. 무당이라는 특별한 역할로 인해 사회의 바리데기로 살아온 한이 있다. 그 사연과 한으로 인해 삶의 굴곡을 더욱 간절하게 담아낼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갖가지 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대할 수 있고, 그래서 신에게 더욱 간절하게 인간들의 소원을 고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직자로서의 신분과 직능의 불일치가 불합리해 보이지만 그것이 지금까지의 현실이었다.

한편, 무당의 생활사가 일반인과 다르지만, 그것이 역사적으로 고정된 실체는 아니다. 앞에서 무당의 신분을 천인이라고 단정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설명했듯이, 무당은 일반 양인과 구별되는 천민 신분의 남녀들도 충원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무당은 양인의 딸과 결혼하는 것이 가능했고 일반적이었다. 무당의 신분이 노비인 경우도 있고 양인인 경우도 있었으며, 양인 무부가 노비와 결혼하기도 하고 노비 무부가 양녀와 결혼하기도 했다.

엄격한 신분제가 적용되던 조선시대에 천인끼리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양인과도 결혼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약간의 혼란을 준다. 그렇지만 이것이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라면 우리의 막연한 추측이 맞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양인이 무당을 기피해서 무당끼리만 결혼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실상과 다르다. 어쩌면 고정 관념이 지속되고 확대되면서 실상과 다른 추측을 일반화해 온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와 다르게 막연하게 무당을 천민으로 고정화하였듯이, 그들의 삶도 특수한 범주로 특화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근대에 들어 무당에 대한 고정 관념이 오히려 확산되었지만, 그 사실이 무당을 대하는 사회적 인식을 교정해 주지는 않는다. 무당으로 살아가는 삶과 일반 사회와의 순탄한 조화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무당 아이들의 성장과 학교 생활 등에서도 사회와의 갈등이 나타나지만 결혼을 둘러싸고 그것이 가장 첨예하게 나타난다. 무당들의 삶에서 사회와 부딪치는 가장 큰 사건은 자식들의 결혼과 관련된 일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신의 명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무당이 되었는 데도 그것이 업보처럼 작용해서 자식들의 결혼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한다. 무당 집안이라는 사실이 사회 생활과 결혼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숨기거나 인연을 끊는 경우까지도 있다. 그만큼 무당의 생활이 순탄하지 않은 것이다.

세습무계 사람들은 무계끼리 통혼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일반인이 당골 집안과 혼인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같은 계통끼리 통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피해의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전혀 다른 논 리가 여기에 개입돼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같은 계통끼리 혼인하는 것이 무업 승계에 유리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와 같은 방식을 선호했을 것으로 본다. 무속 은어 중에 ‘동관(同關)’ 또는 ‘동간네’라는 말이 있는데,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동관끼리 통혼함으로써 기예 전승이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짜임새 있는 굿의 체계나 악기 연주, 사설 등의 학습은 일반인이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기예를 갖춘 예술가 집안의 후예가 계승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또한, 무당들의 활동 구역인 ‘당골판’ 또는 ‘당주권’을 갖고 있어야 무업을 할 수 있는데, 친인척으로 연결된 사회적 연결망이 있어야 그것을 승계하거나 확보하는 것이 유리했다. 이렇게 본다면 무당끼리의 결혼은 무속 사회의 남다른 구조적 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무당들의 통혼권은 일반인의 그것보다 권역이 넓게 나타난다. 일반인의 통혼권은 같은 마을이나 인근 지역 또는 5일 시장권을 크게 넘어 서지 않는다. 물론 양반가의 경우 명문가를 찾아 통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당히 광역화되어 있다. 무당의 경우는 양반가와 다른 이유로 일반인보다 더 넓게 나타난다. 결혼 대상자가 상대적으로 한정돼 있으므로 인접 시군 단위까지 통혼권이 확장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남 고흥 무당들의 통혼권은 고흥 관내뿐만 아니라 여수나 순천까지 연결돼 있고, 진도 무당들의 통혼권도 진도에 그치지 않고 신안과 영암까지 확장되어 있다. 무당들의 통혼권은 비슷한 무속 전통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남의 동부와 서부지역 굿이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다. 동해안의 무속권은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권과 경북 영덕을 중심으로 한 중부권, 그리고 부산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권으로 나누어진다. 이것은 단순한 지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해당 지역을 거 점으로 활동해 온 무당들의 통혼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모와 동거하던 자식들이 결혼을 하면 분가해서 살았다. 이때 부모와 같은 마을에서 거주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 다른 마을로 이주해서 살았다. 강신무의 경우 그 자식들의 결혼 후 분가 형태가 일반인과 다르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세습무는 자식이 무업을 승계하므로 결혼 후 분가의 형태가 특수하게 나타난다. 이것은 조선시대 호적에서도 확인된다. 앞의 임학성의 사례 분석 결과에 따르면, 무당 아들은 부모와 함께 동거하다가 성장·성혼하면 다른 마을로 분가하고 이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부모로부터 무업을 습득한 아들 무당 부부가 독자적인 활동 구역을 확보해 독립해 나가는 모습을 말해 준다. 세습무의 경우 당골판 또는 당주권을 갖고 있어야 원활하게 무업을 수행할 수 있으므로 마을 내에 여러 무당이 사는 것은 보편적이지 않았다. 세습무당의 분가와 거주 형태는 무당 사회의 특징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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