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2. 가람제도라는 최초의 건축 형식
  • 성(聖)과 속(俗)의 세계
서치상

우리 건축사에서 사찰 건축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건축형식이 없었다. 땅 속의 기둥이나 화덕 자리가 드러나는 선사 주거지나 이후의 지상 건축은 문헌에서나 추정이 가능하고, 그나마 고분들이 남아있는 정도이다. 여기서 고도의 체계적인 고안과 계획의 산물이었다는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자연환경에 대한 본능적 대응과 원시적 수준의 재능 정도만 확인될 뿐이다. 이에 반해서 사찰 건축은 불교 교리에 따라 성스러운 부처의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서 고도의 계획 원리와 높은 수준의 기술이 구사된 점에서 차원이 달랐다. 사찰 건축의 가람제도에서 이 땅에 성립된 최초의 건축형식을 보게 된다.

사정은 다르지만 건축사에서 사찰 건축이 갖는 의미는 313년 기독교의 공인과 함께 건립된 로마의 바실리카(Basilica) 교회 건축의 의미와 흡사했다. 교회 건축은 로마 사회가 잡다한 이교도적 신앙에서 벗어나 예수의 가르침에 의해 신성한 사회로 바뀌었음을 보여주 기 위해서 영광을 추구하는 하나의 건축형식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찰들은 원시적 미망에서 벗어나 부처의 가르침으로 이 땅이 성스러운 땅이 되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다라(Mandala)로 장엄되어야 했다.

상상의 이상향인 만다라를 현실세계에 재현한 가람은 세속과는 차별적이며 이례적인 공간으로 꾸며져야 했다. 멀치아 엘리아데(Mercea Eliade)의 말을 빌자면, 가람은 히에로파니(hierophany, 聖顯)를 갖춤으로써 세속과는 다른 초월적 공간이 되어 스스로 신성을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람과 궁궐이 같은 제도인 이유이다. 엘리아데의 또 다른 개념인 크라토파니(kratophany, 力顯)도 주목된다. 크라토파니란 절대 권력에 의한 초월적 존재가 스스로 힘을 현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에로파니는 정신 세계의 유일 교주를 모신 종교건축에서, 크라토파니는 현실 세계의 최고 권력자의 궁궐 건축에 적용된다. 히에로파니와 크라토파니는 건축 구성의 차원에서 동질적이다. 이것이 사찰 건축과 궁궐 건축이 쉽게 습합했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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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다라 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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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 자금성의 히에로파니
북경 자금성의 히에로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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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데는 역사상 모든 종교 건축이 히에로파니를 위한 방법론으로서 높이(height)·거리(distance)·중심(centre)·정형성(formaility) 등을 사용한다고 했다. 높이는 모든 문화권에서 우월적 존재를 나타내는 단어이다. 하늘과 높음(higher와 superior, Brahman)은 모두 height와 같은 뜻이며, 그대로 물리적 높이로 치환된다. 성소나 신역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돔(dome)이나 보올트, 첨탑도 높이를 통해 서 신성을 표현한다.

거리는 머나먼 곳에 도솔천이나 정토와 같은 이상향이 있다는 식의 표현에 이용된다. 그래서 지성소나 신역으로는 긴 연도를 설치했고, 산지가람의 긴 진입로와 삼문, 누각은 세속의 때를 걸러내는 장치로 활용했다.

중심은 가장 높고, 가장 먼 거리에 위치하므로 항상 성스러움을 나타낸다.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세계의 중심은 성스러운 예루살렘이며 수미산은 불교도에게 그와 같은 의미이다. 르네상스 건축가들의 집중식 평면(centrally plan)도 이러한 중심의 히에로파니에 근거한 것이다.

정형성은 앞서 3가지의 방법론이 조합된 결과이다. 남북 중심축상으로 좌우대칭의 정형적인 공간은 주변과는 크게 차별된다. 건축적으로 완결된 적극적 공간(positive space)이자 구심적 공간(centripetal space)이다. 정형성은 강력한 크라토파니나 히에로파니가 요구되는 건축에서 필수적이다. 정사각형으로 표상된 만다라나 복발형의 스투파, 회랑으로 둘러싸인 장방형 가람 일곽은 정형성의 히에로파니를 잘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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