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4. 법화사상과 가람제도
  • 가람연기와 역사적 리얼리티
서치상

가장 오래된 평지 2탑식 배치형식으로는 경주 사천왕사지와 망덕사지가 있다. 특히, 679년(문무왕 19)에 세워진 사천왕사는 최근 발굴조사로 금당지와 2개의 목탑지, 강당지, 중문지 외에도 강당지 앞의 좌·우에서 경루지와 종루지가 확인되었다. 이러한 배치는 일본 나라의 야쿠시지와 배치기법이 흡사하다. 아직까지 금당의 좌우 옆면에서 동서 회랑으로 연결되는 익랑이 형성되지 않은 탓에 평지 1탑식에서 평지 2탑식으로 발전되기 전의 과도기적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사천왕사지는 그 이름과 같이 경주 낭산을 수미산처럼 여겼던 신라인의 불국토(佛國土)사상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 아래에 사방을 관장하는 사천왕이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을 구현한 것이다. 그런 배경으로 명랑이 이곳에서 밀교의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펼쳐서 당나라의 침공을 막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사천왕사는 문두루도량을 여는 호국 사찰로서 운영되었는데, 1074년(문종 28)에도 왜구의 격퇴를 위한 문두루도량이 27일간이나 펼쳐진 적이 있다. 신라의 밀교 문두루도량의 전통이 고려 때까지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무렵의 가람연기에는 치열했 던 역사적 실체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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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은사지 전경
경주 감은사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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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는 682년(신문왕 2)에 건립되었는데, 1959년의 발굴조사로 전형적인 평지 2탑식 배치형식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남북 중심축상으로 중문 → 탑 → 금당 → 강당 순으로 일렬로 서고, 4면을 둘러싼 회랑에 의해서 정방형에 가까운 일곽을 형성한다. 여타 사찰들처럼 장방형이 아니라 정방형에 가까운 것은 급준한 산록을 등지는 지형조건 탓에 남북 방향으로 긴 대지를 확보하기 어려웠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배치형식은 앞서 지어진 사천왕사지나 망덕사지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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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배치도
감은사지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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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목탑이 아닌 석탑이 대신 세워지고, 금당 좌우측에서 동서 회랑으로 연결되는 좌우 익랑이 새로 생긴 것이 큰 차이점이다. 금당 전면의 예불공간과 후면의 강학공간으로 분리된 점이 보다 발전된 가람제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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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금당 하부 구조의 석물
감은사지 금당 하부 구조의 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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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금당의 바닥구조이다. 이는 『삼국유사』 만파식적조의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창건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개요 2년(682)에 공사를 끝냈다. 금당 뜰 아래 동쪽을 향해서 구멍을 뚫었으니 용이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기록에서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금당지 아래에는 남북 직선상으로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다란 석판을 마루 짜듯이 깔았다. 마루 밑 공간을 만들어서 그 위에 건물 초석을 놓고, 기단 바닥 옆으로는 대왕암 쪽을 향해서 구멍을 내었다. 그리고 물고랑과 용당을 거쳐 수중왕릉이 있는 바다로 통하게 했다. 『삼국유사』에 실린 내용에 잘 부합하는 구조이다.

사천왕사와 마찬가지로 감은사 창건연기에는 왜구의 침탈이라는 역사적 실체가 담겨 있고, 이러한 고도의 상징체계가 건축으로 구현되고 있다. 그 무렵의 평지 2탑식 사찰 중에는 왜구의 침탈을 막기 위한 일종의 비보사찰로 운영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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