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토함산 기슭의 불국사는 가장 완비된 평지 2탑식 가람으로서 신라 불교 문화의 걸작품 중에서도 으뜸이다. 536년(법흥왕 27) 창건된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쳐 751년(경덕왕 10) 김대성의 중창에 의해서 지금의 가람 일곽이 완성되었다. 『삼국유사』와 「불국사고금창기」에는 “빈곤한 집에 태어난 김대성이 품팔이로 얻은 밭을 보시하고 죽은 뒤 재상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사를, 현세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는 내용의 가람연기가 실려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불국사가 종전의 왕실이 운영했던 호국 사찰이 아니라 개인의 복을 비는 일종의 원당사찰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국사가 중창될 무렵에는 이미 화엄종을 비롯한 다양한 종파의 산지가람들이 건립되고 있었다. 이곳도 토함산 산간인 탓에 산지가람처럼 지었을 법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사대지에 석단을 쌓아 평탄하게 조성해서 정형적인 평지 2탑식 가람으로 지었다. 산지가람들이 전국 각처의 산간에 왕성하게 모습을 드러내던 시기에 이곳에서는 여전히 만다라의 도형에 맞춰서 불국정토를 구현하기 위한 마지막 노력이 펼쳐지고 있었다. 산지가람이라는 새 유행을 따르지 않은 것은 6세기 초의 창건가람의 제도를 계승한 때문일 것이다. 어떻든 불교가 전파될 때부터 건립되던 평지가람이 불국사에서 완연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불국사는 종파불교시대의 다양한 신앙형태를 보여준다. 크게는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모니불의 사바세계,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이다. 각기 대웅전, 극락전 및 비로전을 중심으로 하는 세 일곽이 그것들이다. 그 중에서 대웅전 일곽의 금당원이 먼저 조성되고, 이후 김대성의 중창 때 극락전 일곽과 비로전 일곽이 조성되었던 것 같다. 「불국사고금창기」의 복장기문에 대웅전 불·보살상들의 낙성시기가 김대성의 중창 이전인 681년으로 기록되고, 대웅전 일곽과 극락전 일곽의 석단 축조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웅전 일곽이 536년에 조성된 창건가람으로 본다면 당시의 가람제도였던 평지 1탑식 배치였을 것이다. 751년 중창 때 석가탑과 다보탑을 비롯해서 불전과 회랑 등을 개조해서 지금과 같은 배치가 이뤄진 것이다.
불국사의 세 일곽이 경전들에 근거했듯이 탑·계단·문루 등에도 다양한 상징들이 표현되고 있다. 예컨대 대웅전 일곽으로 오르는 청운교·백운교는 33단이다. 중생의 욕심이 아직도 완전히 끊 기기 전, 욕심치고는 악의가 없는 천상의 욕심 단계인 33천을 같은 단수로 상징했다. 극락전 일곽으로 오르는 연화교·칠보교와 안양문도 마찬가지이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인 극락세계는 칠보로 장식되고 구품연지에 피어난 연꽃을 타고 극락왕생하므로 두 다리를 연화·칠보라 했고, 일곽으로 드는 문을 극락정토의 다른 이름인 안양(安養)이라 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756년에 건립된 석가탑과 다보탑은 법화경의 이불병좌사상을 고도의 조형미를 통해서 구현한 점에서 주목된다. 그 무렵의 신라 불교는 대승불교 경전들에 대한 소화가 완전히 이뤄진 상태였다. 법화경은 김대성과 같은 귀족계층으로부터 크게 환영받았다. 두 탑은 법화경에 근거해서 가람을 구현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즉, 법화경의 견보탑품에는 법신불인 다보여래와 보신불인 석가여래와 나란히 앉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보여래는 석가여래 이전에 나온 부처로서 석가여래가 그 경의 진리를 설하는 것을 보고 찬양한 후 그를 다보탑 안 자신의 자리를 반쪽 비워서 나란히 앉도록 하는 것이 골자이다. 그 내용대로 석가 탑과 다보탑을 나란히 세워서 각기 사바세계의 석가여래와 보정세계의 다보여래로 구현한 것이다.
불국사의 평지 2탑식 배치는 7세기 후반의 사천왕사지나 감은사지에 비해서 한층 진화된 양상이다. 같은 형상의 두 탑이 아니라 석가탑과 다보탑이란 다른 명칭과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대웅전의 좌우측에서 각기 동서 회랑으로 연결되는 좌우 익랑도 갖춰졌다. 또한, 중문인 자하문 좌, 우로 연결되는 남회랑이 동서 회랑과 만나는 좌우측 모서리에는 평지 1탑식 가람에서는 없던 경루와 종루가 세워졌다. 일곽 좌측에 세우는 경루에는 법사리로서의 경전을 모시고, 우측의 종루에는 법구사물을 비치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법음을 들을 수 있게 했다. 흔히 좌우로 그 위치가 일정해서 ‘좌경루 우종루’라 일컫는다. 최근의 체용설에 근거한 가람제도 연구에서 부처의 말씀인 경전은 체(體)에 해당하고, 중생들에게 법음을 전하는 범종 등은 용(用)에 해당한다는 이른 바 좌체우용설(左體右用說)과도 부합한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사상과 이념이 불국사의 조영원리로 작용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불국사는 이후 여러 차례의 중수와 중창을 거쳐서 존속하다가 임 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100개의 방과 2천여 칸이 불타 없어지는 참화를 입었다. 전란 후 몇 차례의 중건으로 경루와 범영루, 남행랑을 복구하고, 이어서 자하문·무설전·대웅전 등을 복구했지만 예전 모습을 갖추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일제강점기의 사진에서 보듯이 청운·백운교나 칠보·연화교는 거의 허물어지기 직전이고 회랑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동안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가 1973년에 이르러 국가적 차원의 복원사업으로 면모를 완전히 일신했다. 다만, 복원의 기준시점을 조선시대로 설정함으로써 통일신라의 석단과 기단 위에 조선시대 건축형식이라는 모순도 지적된다. 조선시대에 없어진 동·서 회랑을 복원하면서 익공식 공포를 짜 올린 것이 그 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국사는 통일신라 불교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최고의 걸작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