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8. 산중 승단과 불교의 중흥
  • 임진왜란과 불교계의 의승활동
서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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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점사 전경
유점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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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직전까지 불교계는 가혹한 억불정책으로 크게 황폐화된 상태였다. 왕실원당이라 해도 도성 내의 원각사·개경사·흥천사·흥덕사·정업원 및 인수궁 등은 이미 철거된 지 오래였다. 그나마 신륵사·연경사·용문사·봉선사와 같은 도성 근처의 능침사찰이나 멀리 떨어진 선왕대의 석왕사·회암사·유점사·신계사 등이 존속하는 정도였다. 문정대비 윤씨가 죽은 뒤로 불교계의 입지는 더욱 약화되었다. 대비가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불교를 완보하라는 유교를 내렸지만, 이내 보우를 요승으로 몰아 능지처참하고, 선·교 양종도 없애버 렸다. 『명종실록』에는 이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머리를 길러서 환속했다고 한다. 잠시 중흥을 맞이했던 불교계가 다시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이제 일부의 왕실 원당사찰과 깊은 산중의 산지가람들 외에는 명맥을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나마 유지되는 산지가람들도 경제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사찰은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를 몰수당함으로써 사원 경제는 극도로 고갈된 데다 지방 관아와 각 궁방, 그리고 유생들에 의한 가렴주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마침내 1623년(인조 1) 5월 승려의 도성출입마저 금지되면서 신분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태에 처해졌다. 그 무렵 불교계는 뚜렷한 종단조차 형성하지 못한 채 산중승단으로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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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 각성의 영정
벽암 각성의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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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592년(선조 25)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2백여 년 간 이렇다 할 전쟁을 겪지 않고 지내던 한반도에 미증유의 참혹한 상처를 남겼다. 전쟁 동안 주된 전장이었던 삼남지역은 물론이고 서울과 서북로의 모든 영읍들도 거의 초토화되었다. 불교계의 사정도 마찬가지로 가뜩이나 억불정책으로 고통을 받던 터여서 전란의 피해는 더욱 심했다. 경주나 개성 등 옛 도읍에 장려하게 건립되었던 삼국시대 이래의 큰 사찰들을 비롯해서 깊은 산중의 사찰들까지 왜병의 방화로 하루 아침에 잿더미로 변했다. 불국사·범어사·송광사·화엄사와 같은 큰 사찰들의 문헌에는 한결같이 왜군의 방화로 수천 칸 또는 수백 방의 건물이 불탔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불교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임진왜란 와중의 의승활동을 계기로 오랜 질곡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중흥을 맞이했다. 자발적으로 조직된 승군들이 왜군과의 전투에 참여하거나 지원활동을 펴는 한편, 산성 축조공사에서 큰 공을 세운 때문이다. 이 가운데에서 각성(1575∼ 1660)은 의승활동뿐 아니라 전란 후에는 삼남지역 사찰들의 복구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직접 전투에 참여했고, 병자호란 때는 항마군을 조직해서 청군과 호각의 형세를 이뤘을 정도로 활약이 컸다. 또한, 1624년(인조 2)에는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어 휘하 승려들을 이끌고 남한산성을 축조하고, 이어 성곽 내에 10개의 승영사찰을 세워서 승군들로 하여금 성곽을 방어하고 수축하는 임무를 맡게 했다. 이는 승려들을 모아서 산성을 축조하고 사찰을 지어서 지키게 하는 모승건찰(募僧建刹)과 의승입번(義僧立番) 제도의 선례가 되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의승활동은 승려란 놀면서 국역을 기피하는 유수지도(遊手之徒)로 보던 종래의 부정적인 인식을 바꿔 놓았다. 승려의 활용 가치를 확인한 집권층은 불교계의 존재를 묵인하고, 때로는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까지 했다. 이름난 문장가들 중에 사찰 불사의 시주자로 참여하거나 승려들의 행장이나 비문, 사찰 사적기 등을 집필해 주는 이들도 있었다. 여기다가 유교적 이념에 배치되는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탄압도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 전란의 상처가 아물고 경제력이 회복되면서 많은 이들의 적극적인 시주와 함께 왕실이나 관부에서도 재정 지원을 해주는 분위기였다. 임진왜란 전과 비교하면 사찰 조영여건은 한층 호전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불교계는 전란 때 피해를 입은 가람을 복구하는 등 새로운 중흥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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