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3 정신세계의 통합공간 불교건축
  • 08. 산중 승단과 불교의 중흥
  • 공명첩과 팔도권선문, 그리고 승영사찰
서치상

국가가 사찰조영을 위해서 마련해 준 재원으로는 권선문과 공명첩이 대표적이다. 권선문은 주로 지방 장관인 관찰사나 부사, 현령의 명의로 작성해서 해당 지역의 관아, 마을, 사찰 등에 돌려서 공사비의 희사를 권하는 일종의 사발통문이다. 공사 규모가 큰 경우 중앙 정부가 나서서 전국에 걸쳐 모금하는 「팔도권선문」을 발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789년(정조 14)의 용주사 창건과 1843년(헌종 9)의 송광사 중창 때에 발급된 팔도권선문을 들 수 있다. 17세기 이래의 사찰조영기문에 다양한 계층의 시주자들 이름이 있는 것도 이러한 권선문에 의해서 공사비가 모금되었기 때문이다.

공명첩은 원래 흉년과 같은 재해 시에 진휼자금 마련을 위해서 민간에 발매하던 벼슬 사령장이었다. 이를 예조가 사찰에 발급해서 그 돈으로 공사비에 보태게 했다. 돈을 내고 사는 민간인이나 승려가 빈 칸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을 뿐 실직으로 나아가지는 않 았다. 매관매직의 일종이어서 매번 물의가 있었지만 사찰 입장에서는 더없이 긴요한 재원이었다.

특히, 원당사찰을 조영할 때마다 공명첩이 발급되었다. 대표적으로 1789년(정조 13) 사도세자 무덤인 현륭원의 능침사찰로서 용주사를 건립할 때 250장이 발매된 것을 비롯해서 재릉과 후릉 능사인 연경사 중건 때 150장, 원찰인 유점사(1854)와 귀주사(1879) 중건 때도 150장과 500장씩 발매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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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중흥사 대웅전
북한산성 중흥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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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부왕사지 배치도
북한산성 부왕사지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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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공명첩은 산성축조 때나 산성 내의 승영사찰 건립 때에도 매번 발급되었다. 1684년(숙종 10)에 남한산성을 수축할 때 승통정첩 50장을 발급한 것을 시작으로 1685년(숙종 11)의 강화산성, 1711년(숙종 37)의 북한산성 등에 승영사찰을 건립할 때 100여 장의 공명첩이 발급되었다. 비록 원당사찰과 승영사찰에 국한된 것이지만, 관부에서 발급된 권선문과 공명첩은 조선 후기 불교계가 사찰조영을 이어갈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승영사찰은 산성 축조에 동원된 승군이나 전국에서 차출된 입번승들이 거주하면서 평시에는 성곽을 수리하고 비상시에는 관군과 함께 수비를 맡도록 한 탓에 일종의 관사로 취급되었다. 1907년의 군대해산령 직전까지 남한산성에는 각성이 세운 국청사 등 9개의 승영사찰이 있었고, 북한산성에는 중흥사 등 11개의 승영사찰이 있었다. 이 밖에도 수도방어를 위한 북한산성·정족산성·대흥산성이나 지방의 가산산성·상당산성·금정산성·적산산성 등 거의 모든 산성마다 2∼3개의 승영사찰이 갖춰져 있었다. 승려들로 하여금 사찰을 짓게 해서 주둔하게 하는 이른바 모승건찰 제도에 의한 것이었다.

승영사찰은 일종의 군대조직인 승작대를 편성하고 있었으므로 종지나 법맥은 그렇게 중시되지 않았다. 예컨대 북한산성의 경우 수사찰인 중흥사에 총섭 1명을 두고, 그 휘하 11개 사찰마다 승장 1명, 수승 1명, 번승 3명씩의 지휘부와 일반 승려들이 거주했다. 그러나 가람은 일반 사찰들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최근 발굴 조사에서 북한산성 부왕사지 등은 주 진입로 끝의 대웅전과 그 앞의 중정 좌우에 선당과 승방, 그리고 중정 초입에 누각을 두는 산지중정형 배치였음이 밝혀졌다. 다만, 승군들이 주둔했던 군영이었던 만큼 화약과 무기, 군량 등을 보관하는 창고나 무기제작을 위한 건물들이 지어진 점이 일반 사찰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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