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4 지배 정치 이념의 구현: 유교건축
  • 03. 종류별 유교건축
  • 성균관
김지민

성균관(成均館)은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는 한 나라의 최고의 학문기관이었다. 성균관은 고려 992년에 세운 국자감에 그 근원이 있는데 이 또한 태조 이래의 교육기관이었던 경학(京學)을 고쳐 부른 이름이다. 성균관은 학궁(學宮)·태학(太學), 또는 반궁(泮宮)으로도 불렸다. 반궁은 중국 주나라 때 제후의 도읍에 설치한 학교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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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성균관 대성전
개성 성균관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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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성균관 명륜당
개성 성균관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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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 시설에 관하여는 『고려도경』에 그 기록이 있다. 그 내용 을 보면, 전면에 대문이 있고 거기에 국자감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문선왕전(대성전)이 있고 그리고 양무와 재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지금의 명륜당에 해당하는 ‘돈화당(敦化堂)’이란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조선시대 성균관의 구조와 거의 같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성균관은 당시 수도인 개경에 있었으며 이후 조선 개국 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과정에서 성균관도 현재의 위치에 새롭게 조성이 되었다. 그 시기는 1398년(태조 7)이다. 그후 임진란 때 모두 소실된 이후 1606년(선조 39)에 대성전 등 주요 건물이 제자리에 복원되었다. 북한 개성에도 현재 성균관이 있는데 고려 때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새롭게 꾸며진 것이며, 현재 대성전에는 위패가 없고 대신 고려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성균관은 국가의 최고 학문기관이었던 만큼 규모나 배치, 의장 등 여러 면에서 뛰어나다. 성균관 경내는 크게 문묘(文廟)라고 하는 제향 구역과 강학 구역으로 크게 구분되어 있다. 이 두 구역이 성균관의 핵심공간으로서 서로 분리된 것처럼 인식되나, 그 내면은 성현의 가르침을 본받을 수 있는 사당 가까이에 학교가 있는 일체의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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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패봉안의 위계적 질서와 문묘의 배치 개념
위패봉안의 위계적 질서와 문묘의 배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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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향으로 자리한 두 구역은 문묘가 앞쪽에 온 이른바 ‘전묘후 학(前廟後學)’ 형식으로 일축선상에 정연하게 놓여있다. 평탄한 지형에 자리한 성균관의 이러한 배치형식은 지방의 나주·경주·전주 등 큰 고을 향교에서도 보이는 관학건축의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한다. 한편, 개성 성균관을 전학후묘 형식으로 서울 성균관과는 정반대인데 자리한 지형은 평지가 아닌 약간 경사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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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배치도
서울 성균관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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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묘에는 사당 3동이 있다. 정 중앙 안쪽에 문묘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대성전(大成殿)이 있고 그 전면 좌우측에 정대칭으로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다. 대성이란 중국 고대문화를 발전시켜 집대성한 공자의 업적을 기려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공자를 높여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이라고도 했다. 대성전에는 현재 공자를 비롯해 4성인(안자·증자·자사·맹자)과 공자의 뛰어난 제자 10인(공문10철), 송대의 성현 6인, 그리고 설총·이황 등 우리나라의 성현 18인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에서는 석전대제(釋奠大祭)라고 하는 큰 제사를 해마다 2차례, 즉 음력2월과 8월의 첫 정일(丁日)에 지낸다.

대성전은 전면 5칸, 옆면 4칸의 조선 중기 다포양식 팔작집이다. 앞쪽으로 옆면 1칸은 퇴로 개방되어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제례시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공간으로 보통 사당건축에서 자주 쓰이는 형식이다. 동무와 서무는 같은 구조로 된 앞면 11칸, 옆면 1칸 반의 긴 건물이다. 전면 반칸은 대성전과 같이 툇간으로 개방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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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대성전
서울 성균관 대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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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대성전 현판
서울 성균관 대성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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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명륜당
서울 성균관 명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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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명륜당 현판
서울 성균관 명륜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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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동무
서울 성균관 동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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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균관 동재
서울 성균관 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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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학구역에는 문묘과 같은 형식으로 명륜당이 후면 중앙에 있고 그 전면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대칭으로 건립되었다. 명륜당은 강론하는 곳이며, 또한 교관의 거처가 되기도 했다. 건축형태는 중앙으로 정청을 두고 그 양측으로 익사를 둔 객사형으로 건립됐다. 규모는 전체적으로 9칸이 된다. 정청은 대청마루로 되어 있고 양 익사는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유생들이 머물며 생활했던 동재와 서재는 각각 앞면 18칸, 옆면 3칸의 매우 긴 맞배집이다. 당시 이곳에서 공부했던 성균관 유생수는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으나 보통 100∼200명 정도였다.

성균관에는 제향과 교육을 지원하는 제기고·전사청·수복청·존경각 등 여러 건물이 있고, 또한 공자와 사성 부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계성사(啓聖祠)도 경내에 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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