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2. 고대 국가의 궁궐
  • 삼국시대
  • 2. 백제(기원전 18년∼기원후 663년)
  • 한성시대(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 서울 한성과 풍납토성(사적 제11호)
이강근

한성에 도읍했던 시기는 기원전 18년(온조왕 1)부터 서기 475년(개로왕 21)까지 493년간이다. 이 시기에 백제는 연맹 왕국 단계를 거쳐서 중앙집권적인 귀족 국가로 성장한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때에 이르러서는 영토가 최대로 넓어지고 동진(東晋), 왜(倭)와 교류하여 국제적인 지위도 확고해짐에 따라서 왕권이 전제화된다. 부자상속에 의한 왕위 계승이 시작되는 것도 이때부터이다. 근초고왕 26년(371)에는 도읍을 한산(漢山)으로 옮겼으며, 30년에는 강화된 왕권과 정비된 국가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하여 국사책인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였다.

이 시기 도읍의 명칭으로 사서에 등장하는 한산, 하북 위례성, 하 남 위례성, 한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하북 위례성으로부터 하남 위례성·한산·한성 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은 궁성 위치를 옮긴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몽촌토성·이성산성 등의 발굴 조사에서 밝혀진 건축 유적 가운데 『삼국사기』에 보이는 궁실터로 여길 만한 집터가 보이지 않았으나 1997년부터 2000년에 걸쳐 발굴·조사한 풍납토성에서는 백제 초기의 궁성 유적으로 여길만한 유적이 확인되고 공공건물의 존재를 증명하는 기와와 전이 많이 출토되었다. 풍납토성 성벽에 대한 발굴조사도 처음으로 진행되었는데 최대 폭이 43m, 높이 11m, 둘레 약 3.5㎞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토성으로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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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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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성벽
풍납토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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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토 유물 대부분이 심발형토기·경질무문토기·타날문토기·회(흑)색무문토기라는 사실로 보아 늦어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축성이 완료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된 수막새의 초화문, 수지문 문양은 웅진시대나 고구려 또는 중국 한나라 기와의 드림새 문양과 구별되는 독창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주거지·저장공·구(溝) 등 220기의 유적이 확인되었으며 토기·와전·금속기·구슬 등을 비롯하여 중국 서진(西晉, 265∼316)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 는 유약 바른 도기가 다량 출토되었다. 발굴조사의 성과에 힘입어 풍납토성이 백제 초기의 궁성으로 밝혀졌으므로 토성과 성내 22만 평의 토지를 보호, 보전하기로 결정하였다.

4세기말인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를 받아들여 고대 국가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는 등 발전을 계속해 간 백제는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에 천도한 고구려가 끊임없이 침략해 오자 신라와 동맹을 맺는 한편, 중국의 북위(北魏)에까지 사신을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그러나 결국 475년 장수왕의 침략을 받아 개로왕은 전사하고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게 된다. 개로왕은 흙을 구워 성을 쌓고 성안에 궁실, 누각, 대사를 장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국력을 낭비한 결과 고구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한성을 빼앗기게 되었다고 전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 궁 안에는 회나무를 심고 우물과 연못을 두었으며, 궁의 서쪽에는 활 쏘는 대를 조성하고 궁의 남쪽에는 못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건축에 대해서는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상투적 설명만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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