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2. 고대 국가의 궁궐
  • 삼국시대
  • 3. 신라(기원전 57년∼기원후 935년)
  • 월성과 금성
이강근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혁거세 21년(기원전 37)에 금성(金城)을 쌓고 경성으로 삼았으며, 제5대 파사니사금 22년(101)에 월성(月城)을 쌓고 왕이 이곳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또 기원전 32년에는 금성 안에 궁실을 지었는데 이때 지은 궁실은 143년, 196년, 314년에 수리되었다. 314년에는 궁실이라 하지 않고 처음으로 ‘궁궐’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금성은 둘레에 동서남북 4문을 둔 궁성으로 성안에는 그 시기에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등으로 불린 지배자가 거처한 궁궐이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138년에는 신하들과 정치를 의논하는 곳으로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였으며 249년에는 궁 남쪽에 동일한 기능을 가진 남당(南堂)을 지었다. 이때의 궁궐은 그 시기 지배자의 권력에 대응하는 소규모의 건물들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시기에는 시조묘(始祖廟)와 함께 사릉원(蛇陵園)이라는 왕릉 구역이 정해져 있기도 하였다.

혁거세 때부터 쌓았다고 하는 금성에 대해서 금성이 곧 월성이라는 주장과 금성이 다른 곳에 있었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는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는 경주 평야 일대로 고정되지만 궁성은 읍락 집단 사이의 세력 균형 관계에 따라 경주 안에서 여러 차례 이동되었다고 보고 있다. “487년에 월성을 수리한 뒤 이듬해에 금성에서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다.”거나, “496년에 궁실을 중수(重修)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소지마립간이 월성과 궁실을 수리하고 월성에 거주하면서 처음으로 시장을 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경의 규모와 범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후 법흥왕(514∼540)이 즉위한 자극전(紫極殿), 진덕여왕이 651년 정월 초하루에 백관(百官)들의 신년 축하를 받았다는 조원전(朝元殿) 등은 월성 내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월성 동쪽에 진흥왕(539∼575)이 새로운 궁인 자궁(紫宮)을 지으려다가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절로 바꾸어지었다는 기록이 있어서 월성을 대신할 새로운 궁궐 건설에 착수한 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평왕(579∼631) 때에는 왕성 주변인 남산과 명활산의 산성을 보완하여 왕경 방어를 강화하였다. 가뭄이 들자 정전을 피하여 남당에 나아가 정사를 펼쳤다는 기록 또한 진평왕 때의 궁궐 이용 실태를 보여준다. 진평왕 7년(585) 이래 대궁(大宮)·양궁(梁宮)·사량궁(沙梁宮)에 각각 관리를 두었다가, 622년에 이르러 한 사람이 3궁을 모두 관리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왕권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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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
경주 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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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은 현재 경주시 인왕동에 남아 있는데, 동문터 일부와 성 북면 해자 전면 발굴 등의 조사가 이루어진 뒤, 동문터가 정비되고 해자가 복원되었다. 월성 내부에는 주춧돌을 비롯한 유구가 지상에 일부 노출되어 있으며, 현재 발굴조사를 실시하지 않은 상태이다. 현재 사적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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