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39권 삶의 공간과 흔적, 우리의 건축 문화
  • 5 왕권의 상징, 궁궐 건축
  • 03. 고려 왕조의 궁궐
  • 개성의 도성 체제
이강근

고려는 개경에 도읍한 뒤 34대 475년 동안 한 번도 천도를 하 지 않았다. 고려의 도성은 궁성·황성·내성·외성 등 4겹의 성으로 이루어졌다. 건국 초기에는 후삼국시대에 태봉이 쌓았던 발어참성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그 자리에 궁궐을 창건하였다. 그러다가 3차례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인 현종 때에 이르러 수도를 방어할 도성이 필요하게 되었고 강감찬의 요청을 받아들여 도시 전체를 둘러막은 도성으로서 나성(외성)을 쌓았다. 현종이 즉위한 해(1009)부터 현종 20년(1029) 사이에 장정 238,938명과 기술자 8,450명을 동원하여 쌓았는데 성 둘레에는 큰 문 4개, 중간 문8개, 작은 문 13개를 설치하였고 성안은 도시를 5부 35방 344리로 구획하였다. 그런데 개성의 이방(里坊)은 지형 조건에 맞추어 구획되었기 때문에 앞 시대의 정연한 정(井)자형 도시와는 기본적으로 큰 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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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남대문
개성 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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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 안쪽에 다시 내성을 쌓은 것은 1391년부터 1393년 사이인데 이때는 고려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고 왜구의 침입이 극성한 시기였기 때문에 수도의 방어를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내성은 평면이 반달 모양이라는 이유로 ‘반월성’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성 둘레에는 남대문을 비롯하여 동대문·동소문·서소문·북소문·진언문 등 7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문루는 대개 없어지고 남대문만 1954년에 복원한 모습대로 남아 있다.

황성은 궁성을 한 겹 더 둘러싼 성으로 축성 시기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태조가 궁궐을 창건할 때 궁궐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았거나 광종 11년에 개성의 이름을 황도(皇都)로 고치고 독자적인 연호인 광덕(光德), 준풍(峻豊)을 쓰며 스스로를 황제로 칭했을 때 새로 쌓아 황성이라고 불렀을 것으로 여겨진다. 곧, 현종 때 나성을 쌓기 전에는 궁성과 이를 둘러싼 황성만이 있었고 시가지는 황성 밖에 조성되었다. 궁궐과 관청만을 보호하는 성곽이 있었을 뿐 왕경인을 보호할 도성은 고려 건국 이후 100여 년 뒤에야 완성되었던 것이다.

송나라 사신인 서긍이 고려에 왔을 때는 이미 나성이 축성된 뒤였으므로 개경은 궁성·황성·나성을 모두 갖춘 도시였다. 그는 『고려도경』에서 나성을 왕성, 황성을 왕부 또는 내성, 궁성을 왕궁으로 부르며 애써 황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는 둘레 2,600칸에 성문 20개를 설치한 황성을 갖추고 그 안에 여러 관청과 궁궐을 배치하여 고구려의 장안성에서 궁궐을 내성·중성·외성 3겹으로 두른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또 당의 장안성 이래로 새로 정립된 형식과 제도를 따라서 궁성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관청, 동쪽에는 동궁, 서쪽에는 왕과 왕비의 침전, 북쪽에는 후원을 배치하였다. 송(宋)의 변경성에서 오히려 당나라 이래의 황성제도(皇城制度)를 쓰지 않은 점은 고려와 달라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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