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2 왕조의 중요한 국책사업, 사냥
  • 03. 고려시대의 사냥
  • 매사냥
정연학

매사냥은 삼국시대 민간에서도 즐겼다. 그런데 『고려사』의 매사냥 기록은 충렬왕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하는데, 왕들은 매사냥을 구경하거나 직접 즐겼다. 충렬왕은 그 가운데에서도 매사냥을 가장 즐겼다. 그가 덕수현 마제산으로 원나라 공주와 홀치(忽赤), 응방(鷹坊) 등을 거느리고 매사냥을 나갔을 때, “친히 활과 화살, 매와 새매를 다루며 가로 세로 뛰고 날리고 하니 부로(父老)들이 보고 모두 다 탄식하였다.”라는 기록은58) 『고려사』 충렬왕 2년 8월 갑술일. 이를 반영한다. 또한, 1279년 9월 한 달 사이에 증산(甑山)·적전(籍田)·묘곶(猫串) 등 3차례나 매사냥을 다녔다.59) 『고려사』 충렬왕 5년 9월 병오일, 갑자일, 을축일.

왕들의 매에 대한 사랑도 대단하였다. 충숙왕은 덕수현(德水縣)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보라매(海靑)와 내구마(內廐馬)가 죽자 왕이 노하여 성황당(城隍神祠)을 불살라 버리라고 명령을 내렸으며,60) 『고려사』 충숙왕 6년 11월 임자일. 충렬왕은 금원(禁苑)에 큰 집을 짓고 장공(張恭), 이평(李平)을 시켜 매를 기르게 하고, 날마다 두 번씩 와 보았다.61) 『고려사』 충렬왕 8년 5월 갑술일. 그러다 보니 매를 키우는 자들의 위세도 대단하였다. 장공과 이평은 성안의 닭과 개를 매 밥으로 무수하게 죽였고, 왕이 매사냥을 갔을 때 마을의 닭과 개를 모두 약탈해도 그 누구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62) 『고려사』 충혜왕 임오 후 3년 2월 계해일.

고려시대에는 매사냥을 위한 관청인 ‘응방’이 설치되었다. 응방에는 별감·부사·응방사 등의 관직을 두었는데, 충렬왕 4년(1278)에 낭장 김흥예(金興裔)를 경상도 응방심검(鷹坊審檢) 별감으로 임명하였고,63) 『고려사』 충렬왕 4년 9월 갑자일. 그 다음해에는 윤수(尹秀)를 전라도 응방사로, 원경(元卿)을 경상도 응방사로, 이정(李貞)을 충청도 응방사로, 박의(朴義)를 서해도 별감(王旨使用別監)으로 임명하였다.64) 『고려사』 충렬왕 5년 3월 기미일. 충렬왕 9년(1283)에는 응방의 규 모를 확대하여 ‘응방도감’을 설치하고, 김주정(金周鼎)을 사(使)로, 원경과 박의를 각각 부사로 임명하였다.65) 『고려사』 충렬왕 9년 7월 무오일. 원나라에서는 자국의 응방 관리를 고려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충렬왕 2년(1276)에 응방 미자리(迷刺里) 등 7명을 파견하였는데, 왕은 그들에게 사택과 노비를 주는 등 융숭한 대접을 하였다.66) 『고려사』 충렬왕 2년 8월 계미일.

충렬왕의 매에 대한 사랑은 응방의 직원까지도 이어졌다. 그는 응방 직원들에게 녹봉을 주지 않은 좌창 별감 배서(裵瑞)를 순마소에 가두기도 하였다.67) 『고려사』 충렬왕 11년 9월 을해일. 그러나 응방 관리들이 왕의 세를 등에 업고, 주민들을 괴롭히는 폐단이 날로 커지자 충렬왕은 중랑장 원경 등을 각 도에 파견하여 규찰하고 치죄하도록 하였다.68) 『고려사』 충렬왕 2년 3월 기묘일.

1277년에는 응방에 속한 205호를 절반인 102호로 줄였으나69) 『고려사』 충렬왕 3년 7월. 실제로 응방에 속한 호수는 상당히 많아 102호를 줄여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결국, 충렬왕은 지방 고을들의 응방을 폐지하였으나 며칠 후 다시 설치할 정도로70) 『고려사』 충렬왕 14년 8월 계해일. 매사냥에 대한 애정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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