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2 왕조의 중요한 국책사업, 사냥
  • 04. 조선시대의 사냥
  • 수렵 방법
  • 1. 덫
정연학

덫을 이용한 수렵 방법은 민간에서 보편적으로 이용하였을 것이나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문집 등은 상류층을 중심으로 기술되다 보니 많은 내용이 누락되었다. 그러나 “사나운 짐승이 사람이나 가축을 해칠 때에는 각 고을에서는 함정을 파거나 덫을 놓아 잡는다.”라는 내용이 『경국대전』에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호랑이 등과 같은 맹수는 함정, 덫을 이용해 잡았음을 알 수 있다.149) 『경국대전』 元仕·別仕 符信. 경기관찰사 이세좌(李世佐)는 함정과 덫을 이용해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을 입법화하였다.150) 『성종실록』 권284, 성종 24년 11월 21일 임자.

확대보기
조선시대 수렵 병풍
조선시대 수렵 병풍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조선시대 수렵 병풍
조선시대 수렵 병풍
팝업창 닫기

정약용은 우리나라에 짐승 관련 부서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탓하는 내용에서 ‘덫’이 보인다. 그는 『주례』에 “명씨(冥氏)·옹씨(雍氏)가 추관(秋官)에 속해, 명씨는 함정과 덫을 만들어 맹수를 잡는 동시에 그 피혁·이빨·털을 공납하고, 옹씨는 함정과 덫을 관할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는 범 잡는 일과 곰·사슴·산돼지·여우·삵 등의 가죽·털·이빨·뿔 등을 주관하는 곳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이와 아울러 이러한 일은 산림에 관한 행정을 맡는 산우시(山虞寺)에서 맡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았다.151) 『경세유표』 제6, 冬官工曹.

덫을 이용해 잡은 짐승은 기러기, 따오기, 새, 매, 호랑이, 토끼, 들개 등이다. 기러기와 따오기, 새 등을 덫으로 잡은 내용은 양녕대 군 관련 기사에서만 보인다. 곧, 양녕대군이 “태종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그 무리들을 거느리고 덫을 놓아 기러기와 따오기[鵠]를 잡았다.”152) 『세종실록』 권19, 세종 5년 2월 16일 정묘. “양녕이 세자로 있을 때, 섬돌에 새덫을 만들어 놓아 두고, 서연(왕세자가 글 배우는 곳)의 빈객(정2품의 벼슬 이름)과 대하고 앉아서도 공부에는 마음이 없고, 덫에 새가 걸리면 뛰어가서 잡았다.”153) 『연려실기술』 권2, 太宗朝 故事本末 讓寧大君의 폐위. 등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새덫인가에 대한 내용은 없다.

확대보기
최근까지 이용한 새덫
최근까지 이용한 새덫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쥐덫인 창애
쥐덫인 창애
팝업창 닫기

매를 덫으로 잡는 모습은 함길도 도관찰사 정갑손(鄭甲孫)의 송골매 사냥의 폐단에 대한 상소 내용에서 볼 수 있다.154) 『세종실록』 권106, 세종 26년 9월 11일 병술.

송골매는 신기하고 준수한 희귀한 새로서, 성질이 꼿꼿하면서 먹이를 탐내므로 오기만 하면 반드시 잡히는데 …… 매덫[機械]을 지키고 있지 아니하면 송골매가 아무리 많이 와서 모인다 해도 잡을 도리가 없다 …… 매잡이꾼은 대부분 가난하고 외로운 자가 많이 뽑히는데, 장정이 많은 호수(戶首)에서는 번을 짜서 매덫을 지키면 되지만, 빈한하고 외로운 자는 높은 산이나 넓은 들판에서 추위와 바람과 눈보라에도 싸늘한 토막 속에서 작은 구멍으로 내다보아야만 한다. 그 고통이 보통의 부역(賦役)보다 갑절이나 되고, 잡지 못하였을 때는 또 벌로 포(布) 5필씩을 바치게 되니, 가난하고 외로운 집들은 혹 가재와 농토를 팔아 베를 사서 바치게 된다.

위의 내용을 통해 매를 잡을 때는 매가 보이지 않는 토막 속에 숨어 있다가, 매가 오면 덫을 움직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매를 잡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적고 있다.

앞의 상소문에서 나타나듯이 송골매 잡이와 관련한 상벌은 엄격하였다. 매잡이를 관리·감독하는 감고와 매잡이꾼[捕採軍]에게는 베나 벼슬을 주었고, 매를 진상하지 못한 자에게는 벌로 포를 받아들였다. 또한, 마을의 수령도 매를 2마리 이상 잡은 자에게는 상으로 옷을 주었지만, 한편 실적이 없는 자에게는 벌을 내렸다.

그러나 매잡이의 실상은 무척 어려워 함경도의 경우 1년에 송골매의 포획이 많으면 8∼9마리, 아주 많을 때에는 16∼17마리에 불과하다. 비록 함경도 내 매잡이꾼이 22고을 4백호이지만, 1년에 송골매 4백 마리를 보기가 어렵고 모든 고을에 골고루 나타나지도 않는다. 각 고을의 수령이 송골매 포획을 독촉하지만, 오히려 매잡이꾼의 가호(家戶)가 도망가는 일이 빈번하였다. 또한, 함경도는 무명의 생산지가 아니고 양잠하는 집도 없어 벌로 포까지 내는 것은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이었다.

확대보기
각종 덫
각종 덫
팝업창 닫기

세종 때는 매[海靑]를 진상할 호수를 함경도는 4백호, 평안도는 2백호, 강원도·황해도는 각 50호로 정하고 부역을 면해 주었다. 그러나 매를 잡는 수가 전보다 감소되자, 의정부에서 매 잡는 호수를 폐지하고 부역을 도로 매기고, 도내의 민가로 하여금 덫을 놓아 매를 잡게 하였다.

매를 잡은 민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포상을 정하였다.155) 『세종실록』 권107, 세종 27년 1월 13일 정해.

○ 옥송골(玉松骨)을 잡은 자는 몸체가 크고 작건 면포 30필을 상으로 준 다. 벼슬하기를 원하면 벼슬 없는 자에게는 토관(土官) 종7품을 주고, 9품이면 정7품을, 8품 이상이면 4급을 더해 준다. 1년 안에 2련(連) 이상을 잡은 자는 위의 예에 의하여 경직(京職)을 준다.

○ 잡송골(雜松骨)을 잡은 자에게는 면포 15필을 상으로 준다. 그 중에서 몸체가 크고 특이한 것이면 한 필을 더 주고, 벼슬을 원하는 경우 벼슬 없는 자는 토관 정8품을 주고, 9품이면 종7품을, 8품 이상은 3급을 더하여 주며, 1년 안에 2련 이상을 잡는 자는 위의 예에 의하여 경직을 준다.

○ 각호를 빈약한 집과 풍성한 집으로 나뉜 뒤 3, 4호씩 혹은 5, 6호씩 한 패를 만들어 덫을 설치하게 하되, 만약 더 설치하기를 원하면 들어준다.

○ 만약 사사로이 자기 능력으로 매를 잡아서 관에 바치는 자에게는 면포 또는 관직을 자원에 따라 우대하여 준다.

○ 청렴하고 조심성 있는 자를 감고로 정하고, 각호의 덫 놓는 것과 성실 여부를 단속하고, 그곳의 수령도 엄중하게 조사하고 살펴보게 한다.

○ 감고에게는 각각 그 관할 안에서 잡힌 매의 1련에 면포 2필씩을 상주고, 3련까지 잡으면 벼슬을 원하는 자는 가자(加資)하여 임용할 것이며, 수령에게는 1∼2 련인 경우에 옷 1벌을 주고, 3련 이상인 경우에 옷 1벌을 더 준다.

○ 감사와 도절제사는 수시로 수령을 살펴보아 수령이 매잡이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경우 율문에 의하여 죄를 논한다.

○ 위에 말한 벼슬은 모두 5품까지로 제한하고, 토관이 없는 각도에는 1련에 대하여 다른 예에 의하여 면포를 상주고, 2련 이상으로서 벼슬을 자원하는 자는 역시 다른 예에 의하여 면포를 상주고, 3련 이상으로서 벼슬을 자원하는 자는 역시 다른 예에 의하여 경직을 제수한다.

위의 기록을 통해 매 포획은 중앙 정부의 감사와 도절제사, 지방 정부의 수령 등이 동원될 정도로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또한, 좋은 송골매를 잡는 경우 관직과 부상으로 포가 지급될 정도로 국민들에게 매 포획은 유혹이자 강요이기도 하다.

행부사용(行副司勇) 유양춘(柳陽春)이 성종에게 올린 상서에서도 남방에서 매를 덫으로 잡는 내용이 간략하게 나타난다.156) 『성종실록』 권45, 성종 5년 7월 24일 정축. 매가 적은 남방에서는 감사와 절도사가 백성들을 독촉하여 매를 잡는데, 농민들이 덫을 놓고 그물을 펴서 잡는 모습을 적고 있다.

호랑이는 함정을 파고 덫을 설치해서 잡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호랑이 수렵은 일반적이지 않아 상대적으로 민가의 호랑이 피해가 컸다. 이익(李瀷, 1681∼1763)은 호랑이 피해가 증가하는 것에 대해 백성들이 그물을 만들어 호랑이를 수렵하면 농사를 짓지 않아도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는데, 고기보다도 비싼 가죽을 관가에서 빼앗기 때문으로 보았다.157) 『성호사설』 권13, 人事門 獵猛獸. 실록에서도 호환으로 덫을 이용해 호랑이를 포획하는 사례들이 보인다.158) 『국조보감』 권42, 숙종조 4년 무오 ; 申翊聖 찬, 『延平日記』 임술년 ; 『중종실록』 권66, 중종 24년 9월 12일 갑진. 호랑이를 포획하는 방법은 길목에 함정을 파고 덫을 놓거나159) 『해동잡록』 권3, 本朝 曹伸. 덫이 설치된 곳으로 몰이를 통해 잡았다.

들개도 덫을 설치하여 잡은 기록이 보인다. 정약용(丁若鏞, 1762∼ 1836)은 해산도에서 유배를 당하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들개를 잡는 방법 보고 이를 상세하게 적고 있다.160) 『다산시문집』 20권, 서, 「중씨께 올림 신미」(1811 겨울).

이곳에 어떤 사람이 하나 있는데, 개 잡는 기술이 뛰어납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식통(食桶) 하나를 만드는데, 그 둘레는 개의 입이 들어갈 만하게 하고 깊이는 개의 머리가 빠질 만하게 만든 다음 그 통(桶) 안의 사방 가장자리에는 두루 쇠낫을 꼽는데 그 모양이 송곳처럼 곧아야지 낚시 갈고리처럼 굽어서는 안 됩니다. 그 통의 밑바닥에는 뼈다귀를 묶어 놓아도 되고 밥이나 죽 모두 미끼로 할 수 있습니다. 그 낫은 박힌 부분은 위로 가게하고 날의 끝은 통의 아래에 있게 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개가 주둥이를 넣기는 수월해도 주둥이를 꺼내기는 거북합니다. 또 개가 이미 미끼를 물면 그 주둥이가 불룩하게 커져서 사면으로 찔리기 때문에, 끝내는 걸리게 되어 공손히 엎드려 꼬리만 흔들 수밖에 없습니다.

정약용이 기록한 들개를 잡는 덫이 섬뜻한 생각이 들지만, 덫 설명 가운데 가장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한편, 토끼는 근래처럼 올무[蹄]를 설치하여 잡았다.161) 『목민심서』.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