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1. 머리말
심승구

오늘날 레저스포츠의 하나로 자리 잡은 사냥은 수렵 채취 생활을 하였던 석기시대의 인류에게는 가장 중요한 생존의 한 방편이었다.262) 이융조·조태섭, 「우리나라 구석기시대 옛 사람들의 사냥경제활동」, 『선사와 고대』, 2003. 그 후 농경과 함께 가축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생산 활동으로서의 사냥의 비중은 크게 줄어들었지만,263) J. C. 블록, 과학세대 옮김, 『인간과 가축의 역사』, 새날, 1996. 오히려 국가가 형성되면서 국가운영과 관련하여 다양한 정치·사회적 기능과 문화적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사냥은 단순히 개개인과 국가 경제 활동을 넘어 정치권력을 확립하고 국가체제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였다.264) 전근대사회에서의 사냥은 행위주체에 따라 국가와 개인(민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동아시아 유교사회에서는 고대로부터 나라의 가장 큰 일을 제사와 군사로 인식해 왔다. 제사를 통하여 근본에 감사하고 나라와 왕실의 안정을 기원하며, 군사를 통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사와 군사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분야가 바로 사냥이었다.

원래 사냥과 제사가 관련을 갖는 근본적인 배경은 고대에서 전근대까지가 ‘주술과 종교의 그물망’ 사회라는 데서 기인한다. 권력자들은 하늘의 신[天神], 땅의 신[地祇], 사람의 신[人鬼], 기타 다양 한 신들과 소통에서 현실 질서의 정당성과 합리성, 그리고 안정과 풍요를 보장받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현실 세계를 있게 한 근본에 대한 감사와 보답은 국가 운영에서 항상 우선시되었다. 실제로 사냥은 농경과 어로와 함께 제사의식인 천신(薦新)을 위한 가장 오래된 방법이었다. 사냥과 관련한 의례가 일찍부터 발달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냥은 짐승을 잡는 수단이지만, 무기와 인력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권력의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특히, 국가의 입장에서 사냥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국가체제의 수호와 왕실체제의 안정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이는 곧 사냥이 평상시 군사 훈련의 일환으로 나라의 안정과 체제를 수호하는데 물리적 기반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사냥이 기본적으로 오락성을 띤다는 점에서 지나친 사냥은 많은 폐단을 야기하였다. 일찍이 고대로부터 사냥이 잔치와 함께 사치와 방탕을 조장하는 경계의 대상이었다는 점은 그 같은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실제로 수많은 역사 속에서 사냥은 권력을 조장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때 사냥은 권력의 확보와 상실이라는 이중적 속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사냥을 어떻게 이끌어가는가 하는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인 문제를 넘어 국가체제의 흥망을 좌우하는 문제로까지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나라의 사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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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벽화의 사냥 모습
동굴 벽화의 사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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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이래 국가 주도로 발달해 온 한국의 사냥문화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왕실의 안정과 집권체제를 합리적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제도로 정비된다. 조선왕조의 통치기반이 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1394)에 따르면, 전렵(畋獵)이 ‘강무(講武)’와 ‘천신(薦新)’을 뒷받침하기 위한 국가운영의 원리로 제시되었다.265) 鄭道傳, 『朝鮮經國典』 下, 政典, 敎習 및 畋獵. 사냥이 곧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을 보존하기 위한 주요한 계책(計策)의 하나였던 것이다. ‘사냥이 국가대사다(蒐狩, 國之大事也)’라는 표현처럼, 조선왕조에서도 사냥은 국가의 무비(武備)를 갖추고 종묘(宗廟)를 받드는 행위로써 국가 권력을 수호하고 유지하는 기반으로 기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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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전문돌 경주 사정동 출토
수렵전문돌 경주 사정동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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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조선왕조는 유교적 예법에 의해 사냥을 정례화하고, 강무(講武)·전렵(畋獵)·타위(打圍)·답렵(踏獵)·포호(捕虎) 등 다양한 제도를 통해 국가체제를 수호하고 이끌어 나갔다. 특히, 민본(民本)과 덕치(德治)를 기치로 내건 조선왕조는 가축과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호랑이, 표범과 같은 사나운 짐승[惡獸]을 제거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착호갑사(捉虎甲士)’와 같은 별도의 부대를 운영하고 포상 제도를 실시한 까닭도 ‘호환(虎患)’을 줄여 민생과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와 함께 조선왕조는 국왕이 친림하는 사냥을 군례(軍禮)의 하나로 의례화함으로써, 통치 행위의 절제와 조화를 추구하는 동시에 도덕적 교화를 표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조선왕조가 통치원리를 규정한 『국조오례의』 길례(吉禮) 중 천금(薦禽)의식과 군례(軍禮) 중 강무(講武)의식을 별도로 마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유교이념을 기치로 내건 조선왕조는 사냥에 대한 교훈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결국 국가의 대사인 제사와 군사를 유지하는 근간이라는 점에서 국가권력과 사냥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그 동안 사냥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여러 분야에 걸쳐 진행되어 왔지만 아직 충분한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266) 그동안 사냥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고고학, 역사학, 민속학, 국문학, 종교학, 생태학, 미술사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져 왔을 뿐 종합적인 접근을 시도한 예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사냥을 오늘날의 레저활동이나 생태 환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근대 사회에서의 사냥은 여전히 주요한 생산 경제의 영역으로서 정치·경제·군사·외교·신앙·생태·의례 등 사회 제반 분야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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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오례의』
『국조오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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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선왕조는 천금과 강무를 통해 제사와 군사의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유교적 민본주의를 내세운 조선왕조는 여기에 한정하지 않고 호환 제거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호환의 제거는 곧 민생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로 조선왕조의 국가체제 내지 사회질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는 기반이 되었다. 여기서는 군사와 사냥, 제사와 사냥, 호환과 사냥 등을 중심으로 권력과 사냥의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그에 앞서 ‘사냥의 어원과 뜻’에 대해 먼저 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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