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2. 사냥의 어원과 뜻
심승구

흔히 사냥은 야생의 짐승을 잡는 행위를 일컫는다. 사냥을 뜻하는 용어로는 엽(獵)·전(田)·전(畋)·전수(田狩)·전렵(田獵)·전렵(佃獵)·전렵(畋獵)·산렵(山獵)·유렵(遊獵)·유전(遊田)·타렵(打獵)·타위(打圍)·답렵(踏獵)·수렵(狩獵)·수(蒐)·묘(苗)·선(獮)·수(狩)·요(獠)·산행(山行) 등 매우 다양하다. 일찍이 『주례(周禮)』에 의하면, ‘전(田)이 병사를 훈련시킨다’는 뜻이고, ‘전(畋)이 짐승을 잡는다’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통상은 ‘엽(獵)’이라 하였다. 이처럼 사냥에는 군사 훈련을 겸하는 사냥이 있는가 하면, 순수한 사냥이 있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강무·타위·답렵·산행 등이 있고, 후자의 경우는 수렵·전·유렵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엽(獵)은 수렵을 뜻하는 용어 가운데 대표적인 용어이다. 수렵의 엽(獵)은 본래 ‘犭(견)’자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이 개를 풀어 사냥하는 형태였다. 또한, 렵은 일찍이 제사를 위한 제물과 관련을 갖는다. “납(臘)이란 엽(獵)이다. 금수를 사냥하여 잡아서 제사에 이바지하기 때문에 이름을 납(臘)이라고 한다.”라는 기록처럼267)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11월 경술. 엽(獵)은 ‘납(臘)’과 같이 사용하였다. 그 까닭은 금수를 사냥하여 제사에 올렸기 때문이다. 아울러 들에서 사냥하는 법을 ‘전법(田法)’, 사냥을 위해 내리는 영을 ‘전령(田令)’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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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사냥 모습을 잘 묘사한 고구려 수렵도
산 속의 사냥 모습을 잘 묘사한 고구려 수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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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사냥은 계절에 따라 그 명칭과 사냥법이 달랐다. 『주례』에 따르면, 봄에는 ‘수(蒐)’라 하여 유사가 표(表)를 세워 맥제(貉祭)를 지내며 백성과 맹약하고 북을 쳐 드디어 금하는 구역을 둘러 쌓아 불을 붙인 후 꺼지면 잡은 짐승을 사직(社稷)에 제사하는 방식이다. 즉, 봄 사냥은 들이나 산에 불을 놓아 짐승을 잡는 ‘화전(火田)’이다. 여름 사냥인 ‘묘(苗)’는 새끼를 배지 않은 짐승을 가려서 잡되 수레를 써서 몰이하는 방식으로써, 얻는 것이 적으나 종묘에 제사하는 방식이다. 여름 사냥은 곧 ‘수레사냥’이다. 가을 사냥인 ‘선(獮)’은 그물을 치거나 그물을 던져 잡는 방식이다. 가을 사냥은 곧 ‘그물 사냥’이다. 그물을 쓰는 것은 잡는 짐승이 많아 사방에 제사함으로써 만물의 풍요로움에 보답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겨울 사냥 ‘수(狩)’는 사냥감 취하기를 가리는 것이 없고 깃발 정(旌)으로써 좌우의 화문을 만들어 보졸(步卒)과 수레로 진을 치는데 험한 들판에는 사람이 주가 되고 평평한 들판에는 수레가 주가 된다.268) 柳馨遠, 『磻溪隧錄』 권23, 兵制攷說 講武.

이와 같은 계절별 사냥은 원래 고대 중국의 왕실에서 행한 사냥 법이었다. 그러한 계절별 사냥법이 우리나라에 똑같이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서 사냥할 때 수레를 사용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대신 봄·가을·겨울·겨울 사냥은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사냥의 어원은 ‘산행’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한 사실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50여 년이 지난 문종대의 기록을 통해 처음 확인된다.

세속에서 엽(獵)을 산행(山行)이라고 불렀다. 엽을 통하여 군사를 훈련시키고자 하였기 때문이다.269) 『문종실록』 권8, 문종 1년 7월 임술, “兵曹啓 今旣合三軍十二司爲五司 上大護軍護軍 各領率軍士 然無勸戒之法 則怠惰者或有之 請自今 本曹同三軍都鎭撫 考其巡綽仕日及巡綽時捕盜多小﹑領率能否 錄褒貶等第 啓達陞黜 又領率護軍入直 與軍士晝夜同處 旗麾指點金鼓進退之節 常講習曉諭 其軍士都目遷轉時 仕到亦令考察磨勘 大小行幸 鍊軍士山行習陣放火之時 常令率領 俗謂獵曰 山行 因獵以鍊軍士 又行幸時 銃筒衛領率護軍 帶弓箭 侍衛 銃筒衛 如有失伍離次者 隨卽糾察 從之.”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15세기 초 세간에서 ‘수렵’을 ‘산행’이라고 불렀다. 그 까닭은 조선왕조가 산에서 수렵을 통해 군사들을 훈련시켰기 때문이다. 원래 산행은 ‘산길을 걷다.’ 내지는 ‘산으로 가다.’는 의미 이외에도 ‘산행수숙(山行水宿)’이라 하여,270) 『정종실록』 권1, 정종 1년 3월 갑신, “語大司憲以擊毬之故 上謂趙璞曰 寡人本有疾 自潛邸 夜則心煩不能寐 及晨乃睡 尋常晩起 諸父昆弟 謂予爲怠 卽位以來 心懷戒謹 不知有疾 近日更作 心氣昏惰 皮膚日瘁 且予生長武家 山行水宿 馳騁成習 久居不出 必生疾病 故姑爲擊毬之戲 以養氣體耳 璞唯唯.” ‘풍찬노숙(風餐露宿)’과 유사한 뜻으로 자주 사용하던 용어였다.271) 山行이 산을 오르는 의미의 범칭이라면, ‘登山’ 은 좀더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세종실록』 권52, 세종 13년 4월 갑진, “兵曹據咸吉道都節制使報啓 本年三月 鏡城郡十二人 因採進獻海菜 就古慶源地下陸 (中略) 七人登山行七晝夜 到不知名地面 忽有兀狄哈二人追至 射殺得萬 衆伊等二人 仲彦等五人 來至兀狄哈豆稱介幕 豆稱介欣然供饋 令其孫古乙道介護送慶源 上曰 死人復戶致賻 賞首謀仲彦 餘四人 分其功勞以啓.” 그런데 조선왕조에 들어와 수렵을 위한 산행이 잦아지면서, 산행은 수렵을 뜻하는 용어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는 중앙군과 지방군의 군사체제가 정비되는 가운데 군사들의 훈련을 위한 산행이 크게 성행하였다. 그러자 ‘산행’ 또는 ‘산행출입(山行出入)’은 이제 군사 훈련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져 갔다.272) 『세종실록』 권22, 세종 5년 11월 병술, “一 監司統察一方 凡軍民之事 無不管攝 往往都節制使以職秩相等 不顧體屬之義 處事自專 出入自如 誠爲未便 自今都節制使應敵動軍外 軍兵點考 山行出入 雖一日之役 必報監司 然後施行 以存體統.”

군사 훈련을 위한 산행은 오래전부터 이미 시행되어 오던 사냥법이었다. ‘산을 에워싸고 들에 늘어 둘러서서 이어지기가 끝이 없다.’라는 표현처럼273) 『高麗史節要』 권15, 고종 기축 11월, “崔瑀 閱家兵 都房馬別抄 鞍馬衣服 弓劍兵甲 甚侈美 分五軍 習戰 人馬多有顚死傷者 及其終 習田獵之法 籠山絡野 循環無端 瑀悅之犒以酒食.” 군사를 동원하여 몰이사냥을 하는 방식이었다. ‘산행’이 오랜 수렵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에 들어와 ‘산행’이 유독 성행한 까닭은 수렵을 통해 대규모 군사 훈련을 정례화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새로운 중앙군인 5위제(五衛制) 와 함께 강무제도를 정비하였다. 전국에서 군역의 의무를 지고 중앙으 로 올라오는 번상병(番上兵)을 총동원하여 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인 강무제도를 산에서 시행하였다.

그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산행’은 자연스럽게 ‘수렵’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또한, 당시 군사들의 산행은 군사 훈련뿐 아니라 호랑이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도 이루어졌다. ‘군사산행(軍士山行)’ 이외에 새로이 ‘착호산행(捉虎山行)’의 용어가 등장한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274) 『세종실록』 권109, 세종 27년 7월 경인, “議政府據兵曹呈啓 伏承敎旨 二品以上子孫壻弟姪 京官實行三品外官三品守令子孫及曾經臺省政曹者之子 仕宦之路 磨勘後錄…捉虎山行及鍊軍士山行巡綽等事 勿使爲之.” 이 외에도 산행은 세자의 강무 행차를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즉, 국왕의 강무 행차를 ‘행행(行幸)’이라 한데 비해, 세자가 강무 행차를 ‘산행’이라고 불렀다.275) 『세종실록』 권78, 세종 19년 9월 무술, “予欲以世子代行 遂書世子講武之制以示曰 行幸稱山行 動駕稱上馬 下輦稱下馬 隨駕稱隨行 駕前稱馬前 還宮稱歸宮 敬奉敎旨稱奉令旨 啓稱申 波吾達晝停通稱 軍士三分之二隨行 兵曹鎭撫所減半 出納公事 書筵官主之 賓客一書筵官四 司禁稱司導 以四品軍士八人爲之 執烏杖 軍中之事 皆取令旨施行 歸宮後啓聞 外官二品以上勿祗迎 至幕次行禮 世子答拜如常 晝停 世子在東西向 大君以下西壁向東 交龍旗代以孤靑龍旗 司僕官 減半 翊衛司盡行.” 다만, 이 용어는 세자의 강무행차가 그리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화되지는 못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는 중앙군의 정비와 강무제의 확립, 그리고 호환을 줄인다는 목표 아래 군사들의 산행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산행’이란, 곧 ‘군사 훈련을 겸한 수렵’을 뜻하게 되었다.276) 『세종실록』 권124, 세종 31년 4월 병인. 그 사실은 중종대에 최세진이 편찬한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년)에 수(狩)를 ‘산행 슈’, 엽을 ‘산행할 렵’이라고 기록한 내용에서 뒷받침된다.277) 崔世珍, 『訓蒙字會』(1527). 이처럼 16세기 초반에 ‘산행’이 아예 수렵을 뜻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다만, ‘산행’이라는 용어가 ‘사냥(山行)’으로 바뀐 것은 아마도 18세기 이후로 짐작된다. 즉, 산행 → 산앵 → 사냥으로 모음 변화가 일어났다.278) 李晩永, 『才物譜』(1798?)에는 ‘打圍’를 ‘산항하대’로 기록하여 사냥이 조선 초기 이래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산행’ 또는 ‘산항’이라는 말에서 사냥으로 바뀐 시기는 18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한편, 유만근은 오늘날 山行을 ‘등산’의 뜻으로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산행→산앵→사냥으로 모음이 ㅐ→ㅑ로 바뀐 것으로 보고 있다(兪萬根, 「山行(사냥)誤用과 북남동서 語順」, 『어문연구』 93, 1997).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사냥이라는 용어는 18세기 이후에 정착된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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