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3. 군사(軍事)와 사냥
  • 강무제의 운영과 실제
심승구

강무란 말 그대로 무사를 강습하는 제도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군사들을 대상으로 한 사냥을 겸한 군사 훈련을 뜻하였다. 강무는 국왕이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군사 훈련을 하는 만큼 참여자가 수 천 명에서 수만 명에 이르렀다. 강무는 참가하는 군졸의 많고 적음에 따라 대강무(大講武), 소강무(小講武)로 구분되었다.

대강무이든 소강무이든 공통적인 점은 군사들을 훈련하는 절차와 과정 등 제반 모든 일이 거의 같았다. 다만, 대강무의 장소는 주로 강원도이고, 소강무는 경기도 양근·풍양 등지였다. 강무보다 군대 규모가 더 작은 규모의 사냥이 바로 타위였다. 타위는 군사들을 동원해 시행하는 하루 내지 이틀 사이에 하는 사냥으로 도성 근교에서 이루어졌다. 타위는 군사로 하여금 몰이사냥을 통해 천금(薦禽)을 한다는 점에서 강무제와 같았다. 답렵은 살곶이에서 호위군사만으로 사냥을 하는 형태였다. 여기서는 『국조오례의』 군례의 하나로 정비된 강무의식의 절차를 통해 강무의 전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강무는 행사 준비과정과 본 행사로 이루어진다. 우선 강무는 그 시행에 앞서 6개월 내지 몇 달 전부터 논의와 준비과정을 거친다. 대규모 군사들과 백성들을 동원하는 데다가 국왕이 도성 밖에 나가 며칠씩 야외에서 묶으며 거행하는 국가적인 행사였기 때문이다. 강무는 먼저 해당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사냥할 장소를 살피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해당 지역의 기후, 짐승의 많고 적음, 평지의 넓고 좁음을 미리 확인하였고 만일 곡식을 파종할 때를 촌로에게 물어 보고하게 하였다.

사전 준비가 끝나면 강무의 장소와 시기를 최종적으로 정한다. 강무일은 춘추의 끝 달인 3월과 9월에 시행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늘 그해 지역의 농사 사정을 고려하여 시기를 조절하였다. 하지만 늘 천재재변·흉년 등으로 인하여 강무가 매년 2차례 시행된다는 점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봄 강무보다는 가을 강무 한차례만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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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란위장조작(木蘭圍場圖猎), 청나라 목란 강무장에서 강무하는 모습
목란위장조작(木蘭圍場圖猎), 청나라 목란 강무장에서 강무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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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은 해당 지역에 도차사원을 임명하여 어가가 행차하는 소재 고을의 수령으로 하여금 준비해야 할 일들을 점검하고 단속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사옹원·사복시·충호위·상의원 관원을 파견하여 해당 고을의 향리와 백성을 부려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향리와 백성을 구타하는 등 문제가 간혹 발생하기도 하였다.

강무는 국왕이 도성을 벗어나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따라서 임금이 거둥을 위해 사전에 주변 지역의 도로를 정비하고 다리를 놓 는 일이 이루어졌다. 다리의 경우는 하천의 물길이 깊어 부득이 새로 놓아야 할 경우에만 건설토록 하였다. 이때 해당지역의 백성들은 시위하는 대소 군사의 말들에게 먹일 건초를 준비해야 하였다. 다만, 임금의 어마를 비롯한 사복시(司僕寺)의 말은 들풀이나 곡초를 먹게 하였다.

본격적인 강무의 준비는 행사 전 7일에 병조에서 여러 백성을 불러서 사냥하는 법을 알려주고 그것을 따르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병조에서 사냥하는 들판에 강무 장소를 표시한다. 원래 춘추강무를 시행하기에 앞서 먼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원칙이었다. 즉, 강무장에 미리 도착한 무관들은 강무가 시작하기 하루 전에 마제(禡祭)를 지낸다. 마제는 원래 군사가 출정하기 전에 군신(軍神)인 치우(蚩尤)에게 지내는 제사였다. 강무 역시 대규모 군사들을 동원한 군사 훈련이었으므로 이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마제에서 황제 헌원(軒轅)을 제사지냈으나, 세종 6년(1424)부터는 『두씨통전』에 의거하여 강무장의 마제를 주나라 제도에 따라 치우만 제사지냈다.296) 『세종실록』 권25, 세종 6년 2월 계축. 이어 마제의주(禡祭儀註)를 마련하였다.297) 『세종실록』 권25, 세종 6년 9월 갑오.

마제단(禡祭壇)은 서울의 동북쪽 교외에 있었는데, 성종 5년(1474)부터는 단을 폐지하고 현지에서 터를 다듬어 제사를 지냈다.298) 『성종실록』 권40, 성종 5년 3월 28일 계축. 무복(武服)을 입은 무관들이 주관하되, 곰 가죽으로 만든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치우 신위를 설치하고 좌우로 갑주와 궁시, 그 뒤에 삼지창을 세운 후 제사를 지냈다. 남문 밖에는 깃발을 벌려 놓았다. 마제는 『국조오례의』 길례 가운데 소사(小祀)의 하나로 정비된다.299) 『국조오례의』 권1, 서례, 변사.

어가가 출발하는 당일에는 먼저 종묘에 강무행사를 알리는 고유제를 지냈다.300) 『세종실록』 권25, 세종 6년 9월 기해. 이때 국왕은 종묘에 고하는 제사에 쓸 향과 축문을 친히 전하였다.301) 『세종실록』 권34, 세종 8년 10월 계해. 아울러 강무를 하기에 앞서 종묘와 사직에도 맑은 날씨를 기원하는 기청제(祈請祭)를 지냈다. 다만, 세종 13년(1431)부터는 고제(古制)와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에 없는 의식이라 하여 폐지하였다.302)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2월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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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제단(禡祭壇)
마제단(禡祭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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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가 출발하는 날에는 도성에 남아있을 왕세자와 백관들이 성문 밖까지 나와서 지송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303)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3월 신묘. 이때 서울의 도성민도 함께 참여하였는데, 국왕의 강무 행차는 장대한 규모의 행차였다. 강무 행차는 국왕의 행차 규모 가운데 가장 작은 소가(小駕) 노부를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에 해당하는 시위군사가 반차도에 따라 움직이는 임금의 행렬은 국왕의 위엄과 권위를 드러내는 국가적인 행사였다. 여기에는 왕비나 세자, 그리고 왕자들도 참가하였는데, 행렬은 엄격한 제도와 절차에 따라 움직였다. 만일 신하가 강무에 참가하는 세자의 행차를 추월할 경우에는 처벌할 정도로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었다.304)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2월 정사. 국왕의 수레 앞뒤에는 가전찰방(駕前察訪)과 가후찰방(駕後察訪)이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전체 행차의 전체 인원과 말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305)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2월 무오.

국왕의 거가(車駕)가 출궁한 후에 서울 도성은 비상체제에 놓이게 되는데, 무엇보다 도둑과 화재를 경계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를 위해 한성부로 하여금 방호소(防護所)를 설정하게 하고, 금화도감(禁火都監)으로 하여금 순찰과 적발을 전담토록 하였다.306)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2월 계묘. 강무하는 날짜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짧게는 대체로 8일에서 13일 가량 소요되었다.307) 『세종실록』 권7, 세종 4년 2월 경진. 하지만 어디까지나 어느 지역으로 강무를 떠나느냐에 따라 일수가 크게 달라졌다.

강무에 참가한 인원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적게는 수 천 명에서 많게는 수 만 명이었는데, 심지어 6만 명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컨대 국왕으로부터 의정부·육조·대간·군사·각사의 관원과 서리,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동원되었다. 다만, 의정부의 대신들 가운데 70세가 넘거나 노환이 있을 경우 강무의 참여를 면제하였다.308)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1월 갑술. 강무에는 간혹 왕비가 동행하기도 하였는데, 이 때는 온천의 행차를 겸한 경우였다. 또한, 세자나 대군들이 동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세자가 강무를 동행할 때면 늘 신하들의 반대가 뒤따랐다. 사냥이 놀이라는 인식 아래 임금이 도성 밖을 나갔을 때, 세자가 국왕을 대신하여 나라를 관리해야 하고 또한 세자 학업에 방해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입장에서는 세자에게 군대를 통솔하는 경험을 쌓게 해준다는 명분 아래 강무에 참가하게 하였다.309)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2월 경자.

강무에 참가하는 인원은 거의 대부분 군사들이었다. 군사들은 사냥하는 군사와 몰이꾼, 즉 구군(驅軍) 또는 구수군(驅獸軍)으로 구성되었다.310)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3월 기미. 몰이꾼은 별시위 절제사와 같은 장수의 명을 받으며 기병은 말을 타고 보병은 짐승을 몰아 임금이나 관리들이 짐승 잡는 일을 보조하였다. 그 대가로 군사나 각사의 관원과 서리들은 강무 기간 동안에 참가 일수에 따라 급료를 지급받았다.311) 『태종실록』 권7, 태종 4년 2월 경진, “給軍士及各司員吏三日料 初講武限八日 至是定爲十三日故也.” 하지만 해당 지역 백성의 경우에는 강무에 참여하는 관리나 군사들의 소나 말이 먹는 꼴을 베어 바치는 어려운 역을 감당해야 하였다.312) 『태종실록』 권11, 태종 6년 2월 신사, “議講武之所…上曰 予之此行 無乃有弊於民乎 思修曰 今之行幸不如古 民之所供 但芻蕘耳 更無他弊.” 당시 군사들은 사냥을 위해 그물을 치면서 ‘애여장’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풀을 베어 그물을 치니 / 艾如張

촘촘하기 베와 같은데 / 密如織

황작은 어찌하여 낮게 날아서 / 黃雀何翂翂

날다가 날개를 꺾어뜨리는고 / 飜飛折其翼

봉황은 단산에 있고 / 丹山有鳳

학은 청전에 있거늘 / 靑田有鶴

어찌하여 여기에 있는고 / 胡爲乎此中

슬프다 황작이여 / 噫乎黃雀.

‘애여장’은 사냥하는 일로 인하여 무사를 훈련하는 것을 읊은 노래로 풀을 베어 그물을 친다는 뜻이다. 군사들은 강무의 수고로움을 이 노래를 부르며 달랬던 것 같다. 국왕의 행차였던 만큼 강무 행차가 있을 경우에는 해당 지역의 감사,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 및 목사·현감·현령 등의 수령들이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즉, 국왕의 임시 숙소인 행재소(行在所)에 차사원(差使員)을 파견하여 사후에 진알(進謁)하는 동시에 토산물을 헌납 또는 선물을 진상하는 예를 갖추었다. 강무 때에 국왕에게 진상하는 것을 ‘방물진상(方物進上)’이라고 하였다.313)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5, p.91. 그런데 진상하는 방물에 따른 폐단도 뒤따랐다. 그러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어가 수행 찰방을 두고 감사나 수령들의 비리를 적발하였다.

중국 황제가 사냥터인 원유(苑囿)를 갖고 있었던 반면, 조선의 왕은 별도로 만들어진 원유가 없었다. 원유는 왕이 금수를 기르던 야외 동물원이자 사냥터이다. 원유가 없던 조선왕조에서는 원유라고도 불렀다. 따라서 강무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매우 큰 일이었다. 옛 제도에 따라 도성 근교로 정하면 금수가 드물고 멀리 정하면 폐단이 커지자 그해 풍흉에 따라 정하였다.314) 『태종실록』 권28, 태종 14년 8월 경오. 세종 9년(1427)에는 황해도와 경기도 일부의 강무장을 혁파하였다.315) 『세종실록』 권38, 세종 9년 10월 임신. 그 결과 강무장은 경기의 영평·철원·삭녕·광주·양근과 강원도의 평강·회양 등지에 한정되어 설치되었다.316) 『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 5월 정축.

강무장에는 벌목과 개인 사냥이 금지되었다. 그러자 강무장을 금원(禁苑) 또는 상림원(上林園)이라고도 불렀다.317)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1월 기사. 경기와 강원 등지의 강무장은 해당 고을 수령이 관리하고 별도의 12명으로 구성된 수장인(守場人)을 두어 관리하였다.318)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3월 무신. 이들은 강무장의 사렵(私獵)을 금지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는데, 사렵으로 짐승이 없어질 경우 처벌을 받 았다. 이와 함께 감시 감찰을 위해 별도의 무관를 감고(監考)로 파견하였다.319)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3월 임자. 만일 민간인이 금원(禁苑)에 허가없이 들어오면 장1백, 미리 살피지 못한 관리는 3등을 감하도록 하였다.320) 『세종실록』 권51, 세종 13년 1월 기사.

그런데 해당 관리가 사사로이 이익을 취하기 위해 사냥개로 강무장 짐승을 몰래 잡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사렵자와 해당 수령을 모두 처벌하였다.321)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1월 갑진. 또한, 강무장 내의 사냥을 막기 위해 해당 지역 근방의 사냥개를 모두 거두어 서울로 올려 보냈다.322)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3월 경인. 그러나 강무장 보호를 위해 사냥과 방화는 금지하면서도, 백성의 삶을 위해 산전(山田)을 벌목하여 경작하고 개간하는 일은 금하지 않았다.323) 『세종실록』 권34, 세종 8년 1월 계유 ;『세종실록』 권40, 세종 10년 5월 정축.

조선왕조에서는 강무를 할 때마다 임시관청인 원유도감을 설치하고 원유제조(苑囿提調)를 임명하였다. 이때의 원유란, 곧 강무장을 뜻하였다. 원유의 안쪽을 위내(圍內)라고 하는데, 이 원유 안쪽에서 몰이하여 짐승을 잡는 장소를 ‘사장(射場)’이라고 불렀다.324) 『세조실록』 권29, 세조 8년 9월 경신, “命右贊成具致寬爲主將 駕至江原道鐵原府境 觀察使李諴長來迎 至加乙麿峴射場 觀打圍 夕次馬山 中宮遣宦官崔玉來問安.” 강무장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에 깃발로써 경계를 표시하였다.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들은 처음에는 초기(抄旗)로서 부대를 구분했으나, 세종 12년(1430)부터는 표장을 만들되 ‘아무 군’ ‘아무 번’ ‘아무’라고 써서 의복의 등에 붙이게 하였다.325) 『세종실록』 권47, 세종 12년 3월 갑자.

이를 위해 표장절목을 만들었는데 3품 이하 군사에게 모두 표장을 주되, 중군은 붉은 표장을 써서 가슴에, 중군은 붉은 표장을 등에, 좌군은 푸른 표장을 왼쪽 어깨에, 우군은 흰 표장을 오른쪽 어깨에 각각 붙이되 모두 명주나 베로 꿰매어 네모진 표장으로 만들었다. 표장의 길이는 4치 4푼, 넓이 3치로 각각의 위호는 전서로 병조 도장을 만들어 표에 찍었다.

강무에 참여하는 군사는 삼군(三軍)이 참여하였다. 따라서 군사들은 소속에 따라 홍초기·청초기·백초기를 사용하였으며, 각각 직명과 성명을 써서 표식을 삼았다. 응사(鷹師)의 초기는 홍초기를 쓰고, 취라치 이하는 소속 군의 빛깔을 쓰되, 각각 직명과 성명을 썼다. 대군(大君)은 4개, 1품 관리는 3개, 2품 이상 관리는 2개, 첨총제 이상에게는 1개씩 표장을 주되, 표장없이 활과 화살을 차는 자는 논죄토록 하였다.326) 『세종실록』 권48, 세종 12년 4월 임진.

강무행사 당일에는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사냥하는 구역 밖 인근 장소에 깃발을 나누어 세운다. 여러 장수들은 각각 군사들을 거느리고 깃발 아래에 집합시켜 떠들지 못하게 하였다. 날이 밝으려 할 때 기를 내리고 그 뒤에 오는 사람은 처벌하였다. 강무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날이 밝기 전에 강무장으로 모여야 하였기 때문이다.

강무는 병조에서 사냥하는 영을 내려 군사들로 하여금 사냥터를 에워싸는 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그 양쪽 날개를 맡은 장수가 모두 기를 세우고 에워 싸는데 그 앞은 사냥을 하기 위해 띄워 놓는다. 어가가 사냥터에 도착하면, 일단 임시 거처인 차(次)에 들어가 잠시 쉰 후에 모든 준비가 끝났다는 보고를 받고 나온다. 이어서 어가는 사냥하는 장소에 이르러 북이 울리는 가운데 군사들이 에워싼 곳으로 들어간다. 유사가 북을 어가의 앞에 벌여 놓는다. 동남쪽에 있는 사람은 서쪽을 향하고, 서남쪽에 있는 사람은 동쪽을 향하여 모두 말을 탄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북을 치면서 사냥터로 나아가 몰이하는 기병을 준비시킨다. 임금이 말을 타고 남쪽을 향하면 유사가 뒤따르고, 대군 이하의 관원이 모두 말을 타고 궁시(弓矢)를 가지고 어가의 앞뒤에 진열하였다.

임금이 사냥하는 의식은 3번의 몰이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유사가 짐승을 몰이하여 임금 앞으로 나온다. 처음에 한 번 몰이하여 임금의 앞을 지나가면 유사가 활과 화살을 정돈하여 임금의 앞으로 가지고 나온다. 두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병조에서 활과 화살을 임금에게 올린다. 세 번째 몰이하여 지나가면 임금이 그제서야 짐승의 왼편으로 따라가면서 쏜다. 몰이할 때마다 반드시 짐승 3마리 이상으로 하였다. 임금이 쏜 뒤에 여러 군(君)들이 쏘고, 그 다음에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차례로 쏘았다. 모두 마치면 몰이하는 기병이 그친 뒤에야 백성들에게 사냥하도록 허락하였다.

강무 사냥에는 짐승을 잡는 기준에 따라 등급으로 나누었다. 짐승을 쏠 적에는 왼쪽 표(膘, 어깨 뒤와 넓적다리 앞의 살)에서 쏘아 오른쪽 우(腢, 어깨 죽지 앞의 살)를 관통하는 것을 가장 좋은 것으로 삼는데, 건두(乾豆)로 만들어 종묘에 올린다. 오른쪽 귀 부근을 관통하는 것이 다음으로 치는데, 빈객(賓客)을 접대한다. 왼쪽 비(脾, 넓적다리 뼈)에서 오른쪽 연(䯚, 어깨 뼈)을 관통하는 것을 하(下)로 삼는데 나라의 주방(庖廚)에 충당한다.

또한, 사냥법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정해져 있었다. 강무장 내에서 여러 짐승을 쫓아 잡지만 다 죽이지 않으며, 이미 화살에 맞은 짐승은 다시 쏘지 않는다. 또 짐승의 얼굴은 쏘지 않고 그 털을 자르지 않으며 경계 표시인 표(表) 밖에 나간 짐승은 쫓지 않는 것 등이었다.

사냥을 마칠 때에는 병조에서 깃발을 사냥 구역의 안에 세우고 어가의 북과 여러 장수들의 북을 크게 친다. 이에 사졸(士卒)들이 함성을 지르고 잡은 여러 가지 짐승을 깃발 아래에 바치면서 크기를 재기 위해 왼쪽 귀를 든다. 이에 큰 짐승은 관청에 바치고 작은 짐승은 사사로이 사용하였다. 임금은 사자(使者)를 보내 잡은 짐승을 곧바로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로 보내 종묘에 올렸다. 이때 잡은 짐승을 종묘에 올리는 의식을 ‘천신종묘의(薦新宗廟儀)’ 또는 ‘천금의(薦禽儀)’라고 하였다. 종묘에 올리는 짐승은 노루·사슴·꿩 등이었지만, 가마우지와 같은 특별한 짐승을 잡을 경우에도 천금을 하였다.

종묘에 잡은 짐승을 보내고 나서는 악전(幄殿)에서 연회하고 강무에 참가한 관리들에게 술을 3순배(巡盃)를 내리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잔치는 오랫동안 궁궐을 떠나 지방에 머물며 강무에 참가한 국왕과 관료, 그리고 군인들의 노고를 위로한다는 의미로 이루어졌다. 잡은 사냥감은 강무에 따르지 못하고 도성에 머물러 있는 대신들에게 노루 각 한 마리씩, 의정부와 육조에 멧돼지, 사슴 각 한 마리와 술을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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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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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강무에는 여러 가지 행동규칙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냥할 때 여러 장수들이 소속된 병사들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여 질서를 유지하였다. 또한, 어가 앞에 국왕을 상징하는 기를 세워서 우러러보게 하되, 어가를 호위하기 위해 내금위와 사금(司禁) 이외에 모든 잡인들을 일절 금단하게 하였다. 삼군(三軍)이 차례대로 열을 지어 배치하여 에워싼 속으로 짐승을 모두 몰아 들이는데, 포위망을 빠져 나가는 놈은 군사들이 쫓아가서 화살로 쏘되 포위망을 벗어나면 쫓지 말게 하였다.

강무에 참가하는 모든 잡인들은 포위망 앞으로 먼저 가게 하고, 포위망 안에서는 화살을 쏘게 하되 매와 개를 내놓지 못하게 하였다. 무릇 영을 어긴 2품 이상의 관원은 계문하여 죄를 주고, 통정대부(정3품) 이하의 관원은 병조에서 바로 처단하게 하였다. 도피한 사람은 죄 2등을 더하며, 비록 에워싼 포위망 밖이라도 앞 다투어 화 살을 쏘아 사람의 생명을 상해하거나 개와 말을 상해한 사람은 각각 본률(本律)에 의거하여 처벌하였다.

강무에서의 사냥방법은 기본적으로 군사들의 몰이에 의한 활 사냥이었다. 하지만 사냥에 참가한 왕자들이나 관리들은 사냥개와 매를 데리고 참가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매사냥과 개사냥이 강무 때에도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강무에는 처음부터 사냥개와 매를 데리고 갈 수 있었으나 개와 매의 숫자를 제한하지 않자 여러 가지 폐단이 뒤따랐다. 그러자 세종 7년(1425)부터는 대군들과 좌의정·우의정·부원군, 병조·대언 등은 각기 사냥개 2마리씩을 데리고 가고, 매의 경우는 평상시 응패(鷹牌)를 가진 자를 제외하고는 가져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사냥터에서 마음대로 사냥할 수 없도록 반드시 화살에 이름이나 표식을 하도록 하였다. 이를 위해 화살을 점검하는 부서와 관리를 임명하여 만일 표식도 이름도 없는 화살을 휴대한 자는 처벌하도록 하였다.327) 『세종실록』 권27, 세종 7년 2월 경오.

강무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냥을 했으므로 국왕의 행차시에는 지역의 감사와 수령들이 조복(朝服)을 입고 국왕을 맞이하였다. 대군과 신료들이 입시한 가운데 진행되는 알현의식이 끝나면 왕의 거가(車駕)를 수종하는 당상관에게는 친히 술잔을 내리고 3품 이하로부터 군사는 물론 미천한 백성에게도 술과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강무는 사냥을 위주로 한 군사 훈련이기 때문에 짐승 잡는 것의 많고 적음을 크게 상관하지는 않았다.328) 『세종실록』 권32, 세종 8년 4월 을해. 강무에서 잡은 짐승은 먼저 종묘에 천신하고, 다음에 나이든 신하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나라에 받치는 것은 1∼2마리에 불과하고 모두 개인 소유가 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세종 12년(1430)부터는 군사가 잡은 짐승을 모두 진무소(鎭撫所)에서 이름 밑에 수량을 적어 규제하였다. 또한, 국가가 사용하거나 하사품 외에 사사로이 사냥물을 가져간 자들은 병조가 규찰하여 2품 이상은 보고하고 치죄하며, 3품 이하는 곧바로 처단하게 하였다.329) 『세종실록』 권50, 세종 12년 10월 무진. 그리고 사사로이 잡은 꿩과 토끼를 제외하고 잡은 사냥물은 모두 관아에 바치도록 하였다.330) 『세종실록』 권47, 세종 12년 3월 갑자.

강무할 때는 금령조건을 만들어 질서를 유지하였다. 수령이 날마다 숙소와 낮참을 고찰토록 하며 사복시 말 먹이는 들풀과 곡초를 막론하고 받도록 하였다. 중앙 관서에서 쓰는 잡물은 물주에게 돌려주되, 지체하더라도 처벌하지 않았다. 마초(馬草)는 민간에서 거두어 쓰지 말며, 금군과 말구종 등에게 신·버선은 주지 말게 하였다. 이밖에 강무할 때 바치는 진상품, 다리 보수, 월경금지 등의 조건을 마련하였다.331)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2월 임진.

낮에는 강무를 한 국왕은 저녁이 되면 넓은 들판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노숙을 하였다. 이를 임금이 도성 밖에 행차하여 자는 것을 경숙(經宿)이라고 하였다. 다만, 겨울 사냥 때에는 반드시 온돌이 있는 행궁에 거쳐하였다.332) 『세종실록』 권29, 세종 7년 9월 경술. 처음에는 악차를 만들기 위해 값비싼 물품으로 실내를 장식하였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검소하게 바꾸었다.

국왕이 악차에 당도하여 머무르면 해당 지방의 감사는 말과 매, 특산물, 술과 과일 등을 진상하였다.333) 『세종실록』 권27, 세종 7년 3월 기묘. 다만, 세종 8년(1426)부터는 강무로 행행할 때 말을 바치지 말도록 하고,334) 『세종실록』 권33, 세종 8년 8월 임술. 제주 안무사도 강무 때 방물을 바치지 말게 하였으며335) 『세종실록』 권33, 세종 8년 9월 무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방물을 그만 두게 하였는데, 그 이유는336)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정월 신축. 방물은 많은 민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방물 가운데는 이리 꼬리인 낭미(狼尾)를 사들여 화살주머니인 시복(矢服)을 꾸미는데, 꼬리 하나의 값이 면포 60필이나 되어 폐단이 적지 않았다. 이에 세종 11년(1429)에는 이리를 요행으로 잡으면 바치기만 하고 사지는 말라고 하였다.337)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2월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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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순력도 내의 교래대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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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옷을 어복이라 하는데, 강무에 입은 어복은 융복(戎服)이었다. 그런데 시위하는 관리들의 옷도 임금의 옷과 비슷하여 헷갈리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세종 8년(1426)부터는 대소 관원들이 반소매 옷을 입지 못하게 하였다.338) 『세종실록』 권34, 세종 8년 11월 병신. 원래 군사들은 군복으로 사용된 철릭을 입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세종 8년부터는 강무할 때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말을 달리며 활을 쏘면 훈련의 의미가 클 것으로 판단하여 갑주를 입게 하였다.339) 『세종실록』 권33, 세종 8년 8월 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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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 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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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무의 기간은 짧아도 7∼8일 이상이 되었지만 흉년의 경우에는 5일에 그치기도 하였다.340) 『세종실록』 권39, 세종 10년 3월 경인. 강무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어 사냥을 한 만큼 각종 사고와 함께 간혹 사고로 죽는 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341) 『세종실록』 권42, 세종 10년 10월 병오. 강무 기간에는 음식과 함께 술 소비도 적지 않았다. 술은 주로 쌀로 빗어 만들었는데, 세종 10년(1428)부터는 해당 고을에서 쌀 40석으로 하여 나라의 쌀로 매년 춘추로 술을 빚게 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342) 『세종실록』 권42, 세종 10년 10월 기해. 임금이 강무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에는 풍정(豊呈)을 받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다가 세종 11년부터는 환궁할 때 풍정을 금지시켰다.343) 『세종실록』 권43, 세종 11년 2월 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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