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3 권력과 사냥
  • 05. 호환(虎患)과 사냥
  • 호환의 발생과 추이
심승구

조선 건국 이후 최대 과제는 민생 안정을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이었다. 민생 안정과 관련하여 호환은 조선시대말까지 해결해야 할 대표적인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삼국 이래 계속된 호환은 여전히 고려에도 계속되어 수도인 개경에 들어와 사람과 동물을 해칠 정도로 그 피해가 매우 컸다.378) 『태조실록』 권1, 총서58, 65. 고려말 이성계의 명성도 왜구 격퇴와 함께 인마(人馬)에 피해를 주는 호랑이를 잡은 일이 큰 배경이 될 정도였다.379) 이성계의 즉위 전 과정에는 젊은 시절부터 호랑이를 잡아 공을 세운 내용이 여러 차례 발견된다(『태조실록』 권1, 총서31 ; 『태조실록』 권1, 총서48, 신우 원년 10월 ; 『태조실록』 권1, 총서64, 신우 4년 8월).

원래 호랑이는 ‘범’ 또는 ‘표범’ 등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사람과 가축의 피해가 커지자 ‘악수(惡獸)’, ‘해수(害獸)’, 맹수(猛獸) 등으로 불리며 마땅히 제거해야할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다만,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원리를 실천하던 고려시대에는 인명에게 피해를 주는 악수를 제거하는 것은 용납하였으나, 악수를 미연에 방지하는 포획과 살상은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건국 직후 계속된 호랑이의 출몰과 피해로 인한 공포와 두려움은 신왕조의 체제 안정을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해야할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었다. 즉, 태조 원년(1392) 윤12월에 호랑이가 개경 성안에 들어오고,380) 『태조실록』 권2, 태조 원년 윤12월 병신. 이듬해 2월에는 개경 부근의 묘통사에 출몰하는 등 호랑이의 위협은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았다.381) 『태조실록』 권3, 태조 2년 2월 신묘. 또한, 사신이 북경으로 가는 길목인 압록강 서쪽에서 요동 참수참에 이르는 지역에도 도적과 호랑이에게 침해를 당할 가능성이 커서 명나라 요동도사의 호송을 부탁할 정도였다.382) 『태조실록』 권8, 태조 4년 10월 을묘. 태종 2년(1402)에는 겨울에서 봄까지 경상도에서 호랑이 피해를 입어 사망한 자가 수백 명에 이르고, 연해 군현에서는 길을 다닐 수 없을 뿐 아니라 밭 갈고 김매기가 어렵다고 할 정도였다.383) 『태종실록』 권3, 태종 2년 5월 을유. 호랑이는 강화도 부근 모도(煤島) 목장에 마필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384) 『태종실록』 권9, 태종 5년 5월 병신. 밤에 경복궁 근정전 뜰까지 들어왔다.385) 『태종실록』 권10, 태종 5년 7월 무오.

호환은 이미 오래된 사회 불안의 배경이 되었지만, 유독 고려 말과 임진왜란 전 시기, 그리고 18세기에 집중되었다. 호환은 말 그대로 민생은 물론 사회체제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무엇보다도 유교적 인본주의에 바탕한 조선왕조는 호환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적극적인 착호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호환은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다. 그 배경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첫째, 산림정책과 농지개간과의 관계이다. 조선 건국 이후 소나무의 벌채 금지에 따른 산림의 울창이 호표의 번식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건국 초부터 사산식재(四山栽植)와 금송(禁松) 등 양림(養林)정책으로 소나무가 울창해 졌다. 실제로 도성 부근에 호환이 자주 일어난 배경에는 송림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성종 초 하삼 도 지역에 호랑이와 표범의 횡행도 그 같은 산림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소나무의 벌채를 금지한 까닭에 산림이 무성해지자 여러 해를 번식하여 떼를 지어 나타났다. 그 결과 하삼도 지역에 호랑이와 표범이 횡행하여 인마를 해치는 수가 날로 증가하였다. 이에 산림이 울창한 곳을 베어 내고 길가의 나무 숲을 소통하게 하여 그 사이에 호랑이가 서식하지 못하게 하였다.386) 『성종실록』 권44, 성종 5년 윤6월 무신.

이와 함께 농지개간의 확대에 따른 호랑이의 서식지 침탈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호랑이 출몰이 농지개간에서 비롯됐다는 기록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그동안 버려둔 거친 땅이나 노는 땅의 개간은 호랑이 서식조건의 악화를 가져와 호환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다. 숲을 사이에 두고 공존하던 호랑이와 인간과의 관계가 토지개간으로 급속히 깨어지면서 호랑이의 민가 출몰로 나타났던 것이다.

둘째, 호환과 착호 활동과의 관계이다. 호랑이 사냥의 활성화는 호환을 줄이는데 기여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착호 활동이 소홀히 되거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호환이 극성을 부렸다. 하지만 15세기까지는 계속된 강무와 전렵(畋獵), 착호갑사(捉虎甲士)의 설치, 함기(檻機)의 설치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호환이 점차 줄어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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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점차 착호 활동이 줄어들면서 호랑이와 표범의 개체 수가 늘어났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선조 4년(1571)에는 호랑이가 많아 사람과 가축을 해를 입는 일이 많아졌다. 한 해 팔도에서 잡아 올린 것이 겨우 1백마리에 그쳤으나 호환은 이로부터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387) 『星湖僿說』 권15, 인사문, 포호. 16세기말 호환 발생은 그 이전부터 강무와 착호 활동의 소홀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발발은 호랑이의 개체수를 확대시켜 도성의 궁궐 안까지 호랑이가 출몰하였다. 즉, 선조 36년(1603)에 ‘창덕궁 소나무 숲에서 사람을 물었다.’는 기록과388) 『선조실록』 권159, 선조 36년 2월 13일. 함께 선조 40년(1607) ‘창덕궁 안에서 어미 호랑이가 새끼를 쳤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니 이를 꼭 잡으라는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확인된다.389) 『선조실록』 권214, 선조 40년 7월 18일 무신.

물론 전쟁 중 왜군이 호랑이를 잡는 일이 있었지만 그 숫자가 그리 많았던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래서인지 전란이 완전히 끝난 선조 33년(1600) 호남과 영남의 양남의 경계에 수 백명이 피해를 입는 등 호환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후 전후 복구와 함께 대내외적인 정세의 불안으로 인해 호환은 다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에 이어 인조대까지 호환이 커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셋째, 서식지의 이동으로 한반도 내의 호랑이 개체 수를 크게 증가시킨 경우이다. 18세기 초·중반에 연해주와 만주 지역으로부터 호표가 한반도로 대규모로 이동해 왔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보인다.

지난 해에는 범 몇 만 마리가 잇달아 북도의 강을 건너와서 온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 사람을 수없이 물어 죽이고 가축을 없애 그 화가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다.390) 『星湖僿說』 권5, 鬼物驅獸.

당시 갑자기 호랑이 몇 만 마리가 우리나라로 넘어 들어온 까닭은 청나라 사람들이 늘 사냥을 일삼기 때문에 우리나라 경계로 피해서 왔기 때문이었다.391) 『숙종실록』 권37, 숙종 28년 11월 정묘. 실제로 청나라 강희제(1661∼1722)는 1719년 8월 목란 지역에 가을 사냥을 통하여 호랑이 135마리, 곰 20마리, 표범 25마리, 이리 96마리, 멧돼지 132마리, 사슴 100마리 등을 잡았다. 또한, 건륭제(1735∼1796)는 재위 50년간 40번이나 목란 위장을 찾았는데, 1752년에는 악동도천구(岳東圖泉溝)에서 호랑이를 잡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호신창기(虎神槍記)를 써 비석을 세웠다.392) 웨난, 심규호·유소영 옮김, 『열하의 피서산장』, 일빛, 2005. pp.29∼50 참조. 이때도 호랑이 53마리, 곰 8마리, 표범 3마리 등을 기록하였다. 이처럼 청나라에서 18세기 초중반에 대대적인 강무 활동과 함께 민간에서의 착호 활동은 만주 지역의 호랑이가 한반도로 이동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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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중반에 대규모로 만주 지역의 호랑이가 이동해 옴에 따라 국내에는 전라도 변산지역까지 호랑이가 확산되었다. 호랑이는 보통 70∼80㎞를 이동하지만, 멀리는 수백 ㎞까지 가능하였다. 반면에 조선에서는 호랑이 사냥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호환이 국내에 퍼졌다.393) 『星湖僿說』 권5, 人事門, 鬼物驅獸. 실제로 호랑이가 남으로 내려오는 배경에는 서북만큼 사냥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실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경도 지역에서는 숙종 11년(1685)에 월경한 호인을 총으로 쏴 죽인 사건이 생긴 이래로 총포 연습을 중지시킨 상태였다. 이는 북방의 호랑이가 남쪽으로 확산되는 배경이 되었다.

어떻든 한꺼번에 수 만마리가 왔다는 사실이 18세기 이후 호환 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숙종 27년(1701) 이전 6∼7년 사이에 강원도에서 호랑이에게 물린 수가 3백여 명에 달하고, 영조 10년(1734) 한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전국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자가 14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심지어 영조 30년에는 경기도에서만 한 달 안에 호랑이에 물려 죽은 자가 120여 명이나 되었다. 호랑이의 침습은 인명뿐 아니라 돼지나 염소 등 가축의 피해로 이어졌다. 영조 46년 경기도 양주 고을의 해유문서(전임 수령이 후임 수령에게 이관하는 문서)에는 관청의 염소 88마리 가운데 31마리, 양 10마리 가운데 5마리, 돼지 156마리 가운데 1마리가 호랑이에게 물려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결과 18세기는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에게 베푸는 구휼이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또한, 호랑이와 싸워 부모, 남편 등의 생명을 구하거나 원수를 갚다가 물려 죽은 경우에 정려를 세워 주는 등 갖가지 포상과 이야기가 발생하였다.

특히, 악호의 조짐은 여역과 병란(兵亂)의 조짐이 뛰따르는 징조로 간주되어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실제로 18세기 경기도 안산에 살던 이익이 “요즘 호환이 날로 심하니 인명뿐 아니라 목장도 큰 걱정이다. 경기 어느 고을에서는 호랑이에게 물려간 백성을 셀 수 없다 하니 외적의 침공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말하는 것은394) 『星湖僿說』 권4, 萬物門, 馬政. 당시 호환에 따른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였는 지를 잘 말해 준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경우에는 호환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지방의 수령들과 민간의 착호(捉虎) 기피는 계속되었다. 그러자 삼남지역에 영장(營將)으로 토포사(討捕使)를 겸임하게 하여 착호 활동을 수행하게 하였다.

토포사의 직책은 도적과 호랑이를 잡는 것인데 …… 호서(湖西)의 호환이 타도에 비하여 심하여 호랑이를 잡으면 상을 주겠다는 칙령이 하달되었는 데도 단지 사람이 죽었다는 보고만 있으니, 호랑이를 잡는 일도 엄히 수행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호랑이를 잡는 것도 이와 같으니 이런 사람을 어찌 토포사로 쓸 수 있겠습니까. 전 청주 영장 정여증을 잡아 문책하여 엄히 처리했으면 합니다.395) 『비변사등록』 권128, 영조 31년 정월 22일.

위의 기록은 삼남지역에 파견된 영장 가운데 토포사의 임무에 대한 이야기이다. 당시 호랑이의 포획은 도적을 잡는 일과 함께 영장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영장들은 호랑이 사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당시 착호 활동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에는 총포사용 금지, 호랑이와 표범 가죽의 회수, 호랑이를 잡아 백성의 피해를 줄이면서도 아울러 가죽을 진상하여 방물에 쓰려는 호속목(虎贖木) 제도 등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호환의 마지막 기록은 고종 20년(1883)에 삼청동 북창 근처에서 호환이 있어 포수를 풀어 잡게 하였는데, 인왕산 밑에서 작은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는 내용이다. 결국 조선 후기 계속되는 각종 포상책에도 불구하고 착호 활동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호환의 공포와 불안은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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