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4 포수와 설매꾼
  • 02. 사냥꾼의 유형과 실제
  • 국가 소속 사냥꾼
  • 1. 매사냥꾼
  • 응사(鷹師)
심승구

응사는 매사냥꾼을 일컫는 말이다. 매사냥을 위해서는 먼저 매를 잡아 길러야 하였다. 매를 잡는 사냥꾼을 포응인(捕鷹人)이라고 하였는데, 일명 ‘응사’ 또는 ‘응인’이라고 불렀다. 응사는 매를 잡는 기술뿐 아니라 매로 꿩을 사냥하는 데도 전문가였다. 응사는 단순히 매를 잡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매를 길들이거나 부리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만일 길들인 매가 도망할 경우에 응사에게 그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또한, 응사 가운데는 매의 종류를 감별하는 감정사(鑑定師)가 있었다.435) 『세종실록』 권54, 세종 13년 10월 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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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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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냥꾼에는 매를 조정하는 수할치, 꿩이 숨어 있는 잔솔 밭을 터는 털이꾼, 매나 꿩이 날아가는 방향을 알리는 배꾼 등 최소한 4∼5명 인원이 한 팀을 이루는데, 많으면 10명이 한 조를 이루기도 한다. 이들은 대개 늦여름부터 시작하고 눈이 많이 내리지 않으면 겨울에도 꿩을 사냥한다. 사냥 기간은 일정하지 않으나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걸렸으며 하루 사냥에서 한 매가 보통 꿩 15마리 정도를 잡는다.

삼국 이래로 이어진 매사냥은 고려의 원 간섭기를 거치면서 더욱 성행하였다. 그 분위기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건국 직후인 태조 4년(1495) 4월에 응방(鷹坊)을 한강가(오늘날 성동구 응봉동)에 만들었다.436) 『태조실록』 권7, 태조 4년 3월 갑오. 태종대 응방에는 응방인(鷹坊人) 16인이 소속되어 있었다.437) 『태종실록』 권6, 태종 3년 11월 경인. 이들은 팔뚝에 매를 받아 말을 타고 다니면서 꿩 사냥을 하였다. 한편, 응방에서 사용하는 매는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진상하도록 하였다.438) 『태종실록』 권12, 태종 6년 윤7월 계해.

당시 매사냥은 국가에서 허락해 준 응패를 소지한 자에 한해서 허락하였다. 그만큼 매사냥은 귀족적인 사냥이자 놀이였다. 응방인 이외에 종친, 부마, 공신, 무관 대신들이 여기에 해당하였다. 응방인 이외에 응패를 소지할 경우에는 반드시 겉에 드러나 보이도록 차게 하였다. 만일 숨겨 차는 자는 응패를 회수하고 처벌하였다.439) 『태종실록』 권14, 태종 7년 11월 갑인. 이러한 조치는 아무나 매사냥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국초부터 매사냥이 중시되자, 유은지(柳殷之)나 문효종(文孝宗) 같이 매를 잘 기르기로 유명한 인물도 등장하였다. 또한, 각지의 포응인이 내응방에 소속되고자 하였다. 응방에 들어온 자들을 ‘시파치[時波赤]’라고 불렀다. 이러한 용어의 등장은 고려 후기 몽골말에서 비롯한 용어였다. 시파치는 몽골어 시바우치(sibauchi)의 음역어로서 매를 기르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였다. 이들은 국왕이 매사냥에 거둥할 때 수레를 따르므로 부역이 면제되었다. 시파치에 정해진 숫자가 없고 각종 특혜가 뒤따르자, 군역을 피하려는 자들이 다투어 입속하였다. 그러자 태종 15년(1415)에는 풍해도(황해도) 각 고을의 응사를 모두 군역에 종사하게 하여 규제하고자 하였다.440) 『태종실록』 권29, 태종 15년 6월 임신. 또한, 세종 2년(1420)에는 각 도에서 올려 보내는 인원과 호수를 200명으로 정하고 해마다 번갈아서 쉬게 하며 자리가 빌 때는 보충하였다. 다만, 평안도의 양덕, 성천 포응인은 40호만 두고 함길도 본궁에 소속된 216호는 그대로 두었다.

한편, 세종 2년(1420)에는 중국에 금·은 진상의 면제를 청하는 방안으로 송골매를 진상하게 하였다.441) 『세종실록』 권8, 세종 2년 5월 기사. “송골매를 진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하니, 상왕이, “그것은 얻기가 가장 어렵고, 그 물건됨이 才品이 특히 날래어서 사랑스럽지만, 하루에 꿩을 한 마리씩이나 먹으니, 기르기도 어렵고 또 잘 길들여지지 않아서 혹시 날아가면 응사들이 매양 찾아 잡음을 핑계 삼아 촌락을 침노하고 소동하게 하여, 그 폐해가 막심한 까닭으로 이미 다 놓아 버렸노라.” 그 결과 평안도와 함길도에 채방(採訪)별감을 파견하여 송골매를 잡는가 하면, 아예 해동청 잡는 방법을 가르치고 잡은 자들에게 포상하였다. 원래 해동청 잡는 방법은 매가 왕래하는 요지에 그물을 쳐서 잡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평안도와 함길도 감사에게 송골매 잡는 기계를 마련하도록 한 것으로 보아 기계를 이용해 잡는 방법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조치가 효과를 보인 탓인지, 세종 9년(1427) 이후에는 진응사(進鷹使)가 응사(鷹師)와 함께 해청(海靑)·아골(鴉鶻)·조응(皂鷹)·진응(陳鷹)·농황응(籠黃鷹) 등 을 꾸준히 진헌하였다. 세종 13년(1431)부터는 조선 정부가 명나라에 해동청을 진헌한 대가로 금·은의 세공을 아예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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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도」 내 매사냥 모습
「경직도」 내 매사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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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이후 매년 송골매를 명나라에 진헌해야 하였다. 당시 매[鶻]의 종류로 이름이 드러난 것이 세 가지로 첫째는 송골(松鶻), 둘째는 토골(兎鶻), 셋째는 아골(鴉鶻)이었다. 세 가지 매 속에서 잡교(雜交)해 낳은 것을 서골(庶鶻)이라 하였다. 매 이름은 비록 각각 다르지만 실은 한 종류였다. 진헌을 위해서 세종 19년(1437)에는 송골매를 기르기 위해 창덕궁 내에 별도로 응방을 마련하였다.442) 『세종실록』 권76, 세종 19년 2월 경오. 이어 인원을 확대하는 등 응방의 조직을 확대하였다.443) 『세종실록』 권97, 세종 24년 8월 계사. 문종 또한 중국의 요구에 대비하기 위해 채방별감을 보내 송골매를 잡게 하였다. 또한, 문종 1년(1451)에는 내응방 외에 별도로 좌응방과 우응방을 나누어 설치하였다.444) 『문종실록』 권10, 문종 1년 11월 무술.

당시 응사는 내응사와 외응사로 구분된다. 대궐 안에서 매를 기르고 부리는 일을 맡은 내응사는 장번 근무를 맡았다. 대궐 밖에 매를 잡아 기르는 외응사는 3패로 나누어 패마다 정원 내 30인과 정원 외 50∼60인이 번갈아 번상하였다. 그러다가 문종 2년(1452)에 는 정원 외의 인원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응사의 중요성이 커지자 세조 때부터는 아예 시취를 보아 응사를 뽑았다. 즉, 세조 6년(1460)에 응사는 보사, 기사, 기창 중 한 가지 취재에 합격하면 선발하였다.445) 『세조실록』 권20, 세조 6년 5월 을유. 응사는 모두 90인으로 모두 3패로 나뉘어, ‘삼패응사(三牌鷹師)’라고도 불렀다. 1패는 30명으로서 별시위의 체아직을 주어 녹봉을 삼게 하였다. 하지만 곧바로 내응방을 혁파한 데에 이어446) 『세조실록』 권22, 세조 6년 10월 경오. 세조 13년(1467)에는 좌우응방을 혁파하였다.447) 『세조실록』 권42, 세조 13년 4월 병신. 그 이유는 명나라에 보내는 해동청의 진헌이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세조대 해동청의 진헌이 폐지된 후 응사의 역할은 매를 이용하여 꿩을 잡아 바치는 천신이나 진상에 초점이 맞춰졌다. 물론 응사가 강무에 함께 참가하여 수행하는 매사냥은 지속되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매 진헌이 폐지됨에 따라 매 진헌을 위한 종래의 응방 정책을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선 전국에 진상하는 매의 숫자를 감하였다.448) 『성종실록』 권102, 성종 10년 3월 정사. 또한, 매 사육의 비용을 위해 마련된 율도(栗島)의 응방 위전(位田)을 공전(公田)으로 환속하고, 호조가 대신 지급토록 하였다.449) 『성종실록』 권211, 성종 19년 1월 을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국대전』에는 응방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에 따르면 내시부 소속의 종4품 상책(尙冊) 3명 가운데 1명이 응방을 맡아 관리하고, 정5품 상호(尙弧) 4명이 대전의 응방, 궁방 등을 담당하였다.450) 『경국대전』 권1, 이전, 내시부. 내응방은 천신 및 대전과 각전의 일용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환관이 맡도록 한 것이다.

그러다가 연산군 3년(1497)에는 대비전에 생치(生雉)를 드리기 위해 다시 응방을 확대 설치하고 응방제조를 두었다.451) 『연산군일기』 권21, 연산군 3년 2월 갑신. 이러한 관행은 연산군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내응방은 혁파되었고 그 결과 외방에서 바치는 매는 외응방에 속하였다. 응방에 속한 매의 수가 적어 꿩을 많이 잡지 못함에 따라 진상을 빠뜨리는 경우가 발생하자 함경도와 강원도에서 매를 잡는 대로 올려보내되, 다만 매를 잡는 사람의 수는 20인에서 6인으로 줄였다.452) 『중종실록』 권6, 중종 3년 9월 을사. 당시 매가 산출되는 곳이 양계와 강원도뿐이었는데 매가 부족하자 하삼도까지 매를 잡아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대에는 하삼도에서 잡아 올리는 것을 중지하도록 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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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호귀응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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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사냥에는 무엇보다도 사냥개가 필수적이었다. 꿩을 쫓기도 하지만 매가 잡은 꿩을 물어다 주인에게 갖다 주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매의 진상뿐 아니라 사냥개를 진상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8도에서 진상하는 사냥개가 많아지자 응방과 종실에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중종 7년(1512)에는 개의 진상을 모두 폐지하였다.453) 『중종실록』 권62, 중종 23년 7월 병술. 또한, 중종 36년(1541)에는 응방을 폐지하되 하패(下牌)만 두었다. 이때 하패는 곧 외응방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중종은 각도에서 바치는 매의 수량을 줄이는 한편, 매가 생산되지 않는 곳은 진상하는 숫자를 줄였다.454) 『중종실록』 권94, 중종 36년 2월 계해. 그러다가 명종 1년(1546)에는 하삼도가 매의 산지가 아닌 데도 공납하는 폐단이 크자 민폐를 덜기 위해 공납을 아예 폐지하였다.455) 『명종실록』 권3, 명종 1년 1월 기사.

응사는 체아직을 받음에도 『경국대전』은 물론 『대전속록』에 기록되지 않았다. 성종은 다시 수교를 내려 응사를 임명하였다. 신하 들은 내응사는 그대로 둔다 해도 외응사는 체아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응사를 두는 것은 유희를 위한 것이 아니고 천신과 두 대비전의 진상을 위해 짐승을 잡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456) 『성종실록』 권279, 성종 24년 6월 갑자.

성종 20년(1489)에는 부마들이 응사를 데리고 경기도에서 꿩을 잡아 두 대비전에 올리도록 하였다.457) 『성종실록』 권234, 성종 20년 11월 병진. 매사냥은 연산군대에 들어와 더욱 성행하였다. 대전과 대비전은 물론 각종 연회와 잔치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연산군 3년(497)에는 내응방내의 좌우응방에서 정원 외 응사를 매번 8명씩 증원시켰지만 곧 신하들의 반대로 철회하였다.458) 『연산군일기』 권22, 연산군 3년 4월 병자. 그러나 연산군 6년(1500)에는 내응방의 응사가 다시 부족하자, 삼패의 응사 12인을 좌우응방에 나누어 속하게 하였다. 또한, 응방제조가 요구한 응사를 병조에서 보내지 않자 제조가 정하는 대로 보내도록 명하였다.459) 『연산군일기』 권36, 연산군 6년 2월 무술. 이는 응방을 관장하는 병조보다도 응방제조에게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매사냥을 확대하려는 조치였다.

연산군 때는 각도에서 진상하는 매가 재주와 품질이 떨어지고 병이 나서 모두 죽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자 연산군 8년(1502)에는 응사를 함경도와 평안도에 파견하여 좋은 매를 구하도록 하였다.460) 『연산군일기』 권45, 연산군 8년 7월 병신. 연산군 9년(1503)에는 함경도와 평안도 감사에게 매년 바치는 매와 타위할 때 별도로 바치는 매를 좋은 매로 받치게 하였다.461) 『연산군일기』 권46, 연산군 8년 10월 신유. 그러나 상정청에서는 오히려 응사의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응사가 늘어나자 점차 군역이 줄어드는 폐단이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내응방은 그대로 두고, 외응방에서 60명을 줄여 군액을 채우도록 하였다.462) 『연산군일기』 권47, 연산군 8년 11월 경오. 그러다가 곧이어 좌우응방에 대졸 3명씩을 추가로 뽑았다.463) 『연산군일기』 권47, 연산군 년 12월 경술. 결국 내응방의 응사는 종전대로 변동시키지 말도록 하였다.464) 『연산군일기』 권50, 연산군 9년 8월 을묘.

내응방의 응사는 국왕의 비호 아래 사냥의 여러 가지 특권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내응방을 사칭하는 자들이 발생하였다. 그러 자 연산군 10년(1504)에는 둥근 응패를 만들어 내응방의 응사를 구별하였다.465) 『연산군일기』 권52, 연산군 10년 4월 계묘. 즉, 내응사의 응패 1천 개와 몰이꾼인 구군패·대졸패를 표신으로 만들어 음식으로 병을 치료하기 위한 사냥, 즉 ‘식치산행(食治山行)’을 할 때마다 사용하였다. 당시 내응방의 응사들은 파루에 나가 인정에 돌아왔는데, 응패를 증거로 야간통행을 할 수 있었다.466) 『연산군일기』 권53, 연산군 10년 윤4월 정해.

연산군대에 매사냥의 성행으로 병조에 소속된 전국의 응사가 크게 늘어났다. 그 가운데 강원도와 황해도가 특히 많자 중종 10년(1515)에는 내응사를 폐지하고 3패응사 외에 그 나머지는 군액에 충당하도록 하였다.467) 『중종실록』 권22, 중종 10년 6월 신사. 조선정부는 매사냥을 위한 전문군사들로서 삼패응사를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삼패응사는 타위할 때도 상군(廂軍)에 속하게 하지 말고 자유롭게 사냥하도록 하였다.468) 『중종실록』 권60, 중종 23년 2월 정사.

응방은 천신 및 대비전과 수라간의 일용, 즉 어공(御供)을 진상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원래 응사는 사복시 소속이지만 사옹원에 진상물을 바치는 일을 담당하였으므로 응사가 오히려 사옹원에 소속되어 있는 셈이었다. 그리하여 농사철로 인해 응사의 공물이 제대로 진상되지 않자, 사옹원이 처벌을 요구하였다. 어공을 위한 응사의 활동은 임진왜란 중에도 계속되었다.

이처럼 임진왜란 이전까지 응사는 사복시의 취재를 통해 뽑혀 매를 잡거나 길들이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은 체아직이지만 군직을 제수받고 매를 사육하여 명나라에 진헌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또한, 강무나 타위에 참여하여 꿩사냥을 하였다. 그러다가 세조 13년 이후 명나라의 진헌이 폐지되고, 명종대 이후 강무나 타위가 사라지면서 응사는 천신이나 어공, 그리고 각궁의 공상, 제향에 이바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결과 응사는 사옹원에 소속되어 어공을 바치는 일에 치중하게 되었다. 응사는 서울을 비롯해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었으나 16세기 이후 지위는 갈수록 낮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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