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사
  • 40권 사냥으로 본 삶과 문화
  • 4 포수와 설매꾼
  • 02. 사냥꾼의 유형과 실제
  • 사복렵자
  • 3. 엽저군(獵猪軍)
심승구

국가 소속 사냥꾼 가운데 엽저군이라고 불리는 멧돼지 사냥꾼이 있었다. 멧돼지는 돈(豚)·시(豕)·저(猪) 등으로 표현되었는데, 번식력이 좋고 곡식을 망칠 뿐 아니라 사람을 들이받아 살상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왕릉을 파헤치기도 하였다. 이처럼 멧돼지 사냥은 사냥 자체의 목적뿐 아니라 농작물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도 자주 시행되었다.

병조에서 강원도 감사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회양부(淮陽府)의 남곡(嵐谷) 등지는 강무장과 가까우므로 사냥을 금하였기 때문에, 멧돼지가 번식하여 곡식을 해침이 더욱 심하오니 금하였던 사냥을 풀어 주소서.”하니, 지금부터 멧돼지 잡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명하였다.494) 『세종실록』 권53, 세종 13년 8월 임인.

위의 기록처럼 사냥이 금지된 강무장 근처에는 멧되지 피해가 매우 컸다. 그러자 세종 때부터는 강무장 근처에서 멧돼지 사냥을 허용하였다. 이에 따라 강무장 내에 사는 백성들은 노루와 사슴 외에 곰·멧돼지·호랑이·표범 등을 잡을 수 있었다. 이처럼 멧돼지는 사나운 짐승[惡獸]으로 취급되어 포획해야 할 대상이었다.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멧돼지는 청계산, 광교산을 비롯해 서울 주변에서도 노루·사슴·토끼와 함께 가장 많이 잡히는 짐승이었다. 다만, 연산군 때에는 궁궐 후원에 호랑이와 멧돼지·사슴 등을 들여 기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멧돼지는 꿩, 토끼와 함께 12월에 바치는 진상품 이었는데, 이를 ‘납육(臘肉)’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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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근, 『조선풍속도』 멧돼지
김준근, 『조선풍속도』 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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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한 마리는 광해군 때를 기준으로 정목 6필에 해당하였다. 당시 노루 뿔의 가격은 면포 10여 필, 사슴 가죽은 1령이 60필이었다. 그런데 함경도에서 섣달에 바치는 멧돼지는 방물의 폐단보다도 더 심하였다. 그러자 인조 때에는 경기도의 다른 물건으로 바꿔 배정하여 먼 지방에서 수송해 오는 폐단을 줄이도록 하였다. 당시 한 도에서 가장 큰 신역은 ‘납육을 진어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왜냐하면 멧돼지와 사슴은 꿩·토끼·노루보다는 잡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꿩, 토끼, 노루도 연군(烟軍)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나 멧돼지 사냥은 더 어려웠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총이 일반화된 뒤에는 숲이나 늪이나 바다의 섬에서 여러 짐승들이 남은 것이 없었다. 이는 멧돼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멧돼지 사냥을 위해 한 경내의 군중을 다 동원하여 먼 산속이나 바다까지 찾아 다니며 날짜를 기한하지 않고 잡도록 하였다. 만일 잡지 못하면 민력만 허비하며 수십 일이나 허탕을 치는 경우도 있고, 결국 몇 배의 값을 쳐주고 사서 바치는 일이 많았다. 여기에다 사옹원 관원이 받는 뇌물까지 겹쳐 납육의 부담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그리하여 현종 때에는 대비전 외에 납육 진상을 중지시키도록 하였다.495) 『현종개수실록』 권23, 현종 11년 11월 계해.

조선 후기에는 경기도 일대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 맷돼지 사냥꾼, 즉 엽저군을 정해 잡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정조 12년(1789)에는 멧돼지를 비롯해 꿩·노루·사슴 등을 여름철에 바치지 말게 하였다.

전교하였다. “사냥한 꿩을 여름철에는 바치지 말라고 이미 명하였는데, 하물며 사냥한 멧돼지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경기 고을의 멧돼지 사냥으로 인한 폐단을 익히 들었다. 앞으로는 사냥한 멧돼지도 여름 꿩·노루·사슴에 대해 새로 정한 규식(規式)에 따라 본색(本色)으로 봉진(封進)하지 말라.”496) 『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7월 16일 병자.

이러한 조치는 여름철 사냥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서였고, 이와 아울러 이를 법으로 정하였다.

한편, 정조 때에는 장용영을 설치하면서 향군(鄕軍)으로 하여금 별도의 사냥부대를 두었다. 장용내영 5사가 가운데 하나인 후사 5초에 해당하는 이들은 숙위의 임무와는 거리가 먼 엽공(獵貢)으로서의 엽치사냥을 하였다. 경기 산골지역 백성들이 가장 지탱하기 어려운 일은 여름철의 꿩사냥이었다. 공인들은 여름철 매일 바칠 꿩을 준비하기 위해 경기 감영과 사옹원의 공문을 받아 엽치군을 파견하였다. 그런데 엽치군이 처자를 거느리고 촌락을 출입하면서 국가의 명령을 빙자해 토색질하고 약탈하는 등 폐단이 매우 컸다.

정조는 백성들의 고통을 깊이 염려하여 공물로 바치는 꿩을 잡는 엽치군을 특명으로 혁파하고, 여름철에 바치는 꿩을 다른 것으로 대신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멧돼지를 사냥하는 한 가지 일은 서울 군문(軍門)과 경기 고을에서 반드시 납향(臘享) 10일 전에 맞추어 바치도록 하였다. 당시 사냥처는 동으로는 지평·양근·가평이고 서로는 장단·마전·적성이기 때문에 사냥꾼이 산골에 사는 백성들을 징발해서 ‘멧돼지 사냥몰이꾼[獵猪驅軍]’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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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렵도 멧돼지 사냥
호렵도 멧돼지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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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은 모두 각종 환곡과 역을 진 농민들로서 몰이꾼으로 징발되어 산을 에워싸고 수십 일 동안 짐승을 찾아 두루 찾아다니며 가산을 탕진하고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1∼2년을 지나는 사이에 10집에 9집은 빈 집이 되어 버려, 그 폐단이 엽치군보다 자못 심하였다. 이에 각 해당 고을이 몰이꾼들에게 식량을 넉넉하게 주어 사냥하도록 하였다. 또한, 경기 감영으로 하여금 멧돼지를 사냥해 바치는 것을 꿩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 밖에 경군문(京軍門)이 사냥할 때의 몰이꾼에 대한 폐단을 고쳐 나갔다.497) 『정조실록』 권26, 정조 12년 7월 기묘.

18세기말 당시 엽치와 엽저의 폐단은 경기도 내의 2대 민폐로 지적되고 있었다. 엽치의 폐단은 공인배들이 여름철에 바치는 생치를 확보하기 위해 봄철에 경기 병영과 사옹원으로부터 기민 동원을 허락하는 공문을 받아 아무런 댓가도 없이 장기간 동원하는 것에 있었다. 엽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동절기에 경군문과 기읍(畿邑)에서 기민을 마음대로 동원하고 이를 기화로 하여 향리와 조례(皂隷)의 토색질이 심해 기민의 유리 현상까지 초래되었다. 경기도 내 군사를 최대한 동원하여 하나의 군문을 만드는 구상을 가지고 있던 정조로서는 이러한 페단부터 먼저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 12년(1788) 7월에 정조는 엽저의 관례는 일단 혁파하고 보다 쉬운 엽치만 행하게 하되, 그 행렵을 전담할 군사를 장용영 소속으로 따로 정하여 그것을 각 읍의 향군으로 삼았다. 엽치구군은 당초 3초였는데, 이들은 전담의 대가로 둔전을 배당받았다. 장용영으로부터 생계보장책으로 둔전을 지급받고 매년 필요한 수의 공치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다만, 둔전은 장용영에서 독자적으로 마련하지 않고 수어청의 것을 가져왔다. 엽치구군 3초에 대한 둔전을 마련하기 위해 수어청 소속의 둔아병을 줄이는 대신, 그들이 경작하던 둔전을 엽치구군에 주었다. 즉, 둔아병 총 15초 중 매초 25명씩을 감하여 확보된 3초 몫의 둔전을 행렵이 행해지는 지평·양주·가평·장단·마전·적성 등 6개 읍의 군사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이에 지평 154명, 양근 50명, 가평 50명, 파주 127명의 군사(총 375명)가 구군으로 뽑혀 둔전을 배당받았다. 그 중 파주는 행렵처인 장단·마전·적성 등지에 둔전 설치가 부적당하여 그 인근 읍으로 배당된 곳이었다.498) 이태진, 『조선 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1983, pp.279∼280.

이와 같이 장용영 가운데 사냥부대인 향군은 수어청의 군사로 이 루어졌다. 그러나 일부는 장용영 자체의 둔전으로 군사를 확보하여 고양·양주 등 읍에서 각 1초(哨)씩 향군을 두었다. 이것은 행렵의 주 대상지가 축령산과 용문산 두 산이어서 사방에서 포위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결국 행렵구군은 모두 5초로서 1사를 이루었다. 이처럼 정조 19년(1795) 이전의 3군의 후사는 호가의 임무와는 거리가 먼 꿩사냥를 위한 것으로서, 그것은 앞으로 있을 보다 많은 기내군사의 동원을 위한 선결책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정조 19년(1795)에는 장용영을 3군 15초의 내영제에서 5사 25초의 제도로 바꾸었다. 이때 증설된 10개 초는 좌우 양사와 후사의 일부로서, 좌사(진위·양성·용인·광주)·우사(안산·과천·시흥·고양·파주)는 대부분 한강 이남의 수원을 중심으로 한 인근 읍의 8개 초이고, 후사(지평·양근·가평·양주·장단)는 양주 장단 양읍의 2개초로서 이들 역시 향군으로 불렸다.

한편, 정조 13년(1789)에는 여러 도에서 바치는 멧돼지·노루·사슴의 납육(納肉)을 꿩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다만, 경상도에서는 꿩 대신 사슴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경기 고을은 멧돼지·노루·사슴을 꿩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호남 고을의 납육도 경기의 예에 따라 대신 꿩으로 바치게 하였다. 경상도 경주·안동·상주·함양·안의·창원·진주·김해·거제·남해 등은 꿩이 없어 사슴으로 대신하도록 하였다.499) 『정조실록』 27권, 정조 13년 윤5월 병술. 다만, 전라도 무주부에서는 납일(臘日)에 잡은 멧돼지 한 마리를 2년마다 바치게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산돼지 한 마리 대신 총이든 매사냥이든 가리지 않고 생꿩 80마리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쉽지 않자 종전대로 되돌렸다.500)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2월 을축.

이와 같이 정조대에 와서 전국적으로 멧돼지 사냥은 꿩으로 대신하게 하되, 꿩이 없으면 사슴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멧돼지 사냥에 따른 폐단을 줄이기 위한 방편이었고, 그 결과 멧돼지 사냥은 점차 관주도의 엽저군에서 민간 사냥꾼에게 일임되는 방 향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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