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 대장 가는 길에는 해와 달이 밝은데
왜적 군대 가는 길에는 눈과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 에헹 에헹야
왜적 군대가 막 쓰러진다.
위 노래는 1900년대 초 함경도 주민들이 의병 홍 대장을 칭송하며 부르던 민요에요. 이 민요에서 ‘홍 대장’은 왜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을까요?
떠돌이 생활을 하다
함경도에서 활약한 의병 대장은 바로 포수 출신의 홍범도예요. 홍범도의 어린 시절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평안도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여져요.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에 영양실조에 걸려 홍범도를 낳은 지 칠일 만에 돌아가셨데요. 그래서 양반집 머슴살이를 하던 아버지는 심청전에 나오는 심봉사처럼 어린 홍범도를 안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동네 아주머니들의 젖을 먹여 키웠어요. 그러나 아버지마저 그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어요.
가난한 삼촌 집에 보내져서 어렵게 자라던 홍범도는 어린 나이에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머슴살이를 시작했어요. 얼마 후 1882년에 구식 군인들이 차별과 부패에 저항하여 일으킨 임오군란이 일어났어요.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는 군사 제도를 개편하고 지방에서도 병사들을 모집했어요.
‘군대에 지원하려면 17살 이상이라고 하지만 난 이번에 한 번 지원해봐야겠다. 힘들고 고된 머슴살이를 벗어나려면 이 길밖에 없을 것 같아.’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었던 홍범도는 나이를 두 살 속이고 군대에 지원해 합격했어요. 몇 년 동안 평양 지방의 군대에서 근무하던 홍범도는 몹시 나쁜 군대 환경에 크게 실망했어요. 그래서 군대를 떠나 떠돌이로 살았어요. 농촌 마을이나 광산 등 여기저기서 품삯을 받으며 일꾼 노릇을 하기도 했어요. 한 번은 종이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3년 동안이나 제대로 임금을 받지 못하자 결국 공장 주인과 크게 다투고 그만두기도 했어요. 그 뒤로는 금강산의 절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지요.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홍범도는 절에서 주지 스님으로부터 글을 배웠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배웠어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 의병과 승병의 활동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애국심이 무엇인지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지요. 이때의 경험은 나중에 홍범도가 일본에 맞서 의병 활동과 독립군 활동을 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어요.
얼마 후 홍범도는 예전에 군대에서 익힌 총포술을 활용해 함경도 북청에서 산포수, 즉 사냥꾼이 되었어요. 그는 총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서 믿음직스럽게 활동하여 산포수들의 대장으로 뽑혔어요. 대장이 된 홍범도는 산포수들을 잘 이끌면서 동료들의 이익을 위해 앞장서는 등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했어요.
항일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
1907년 일제가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 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켰어요. 이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활발하게 활동하자, 일제는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민간인들이 가진 총을 거둬들이는 법령을 시행했어요. 이에 따라 홍범도 등 산포수 생활을 하던 사람들은 생계를 크게 위협받았어요.
“산포수에게서 총을 빼앗아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입에 거미줄을 치려는 술책이다!”
“일본놈들이 위협해도 우리의 목숨과도 같은 이 총만큼은 내어줄 수 없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다. 대한 제국 산포수의 무서움을 일본놈들에게 보여주자!”
이름난 포수였던 홍범도와 그가 이끈 함경도 포수들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어요. 대부분의 의병이 어려움 속에서도 항일투쟁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특히 전라도 지역의 의병과 홍범도가 이끈 함경도 의병들이 뛰어난 활약을 펼쳤어요.
홍범도가 이끈 의병 부대는 포수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산을 잘 타고 기동력이 뛰어났어요. 또한 평민 출신이었던 홍범도 스스로 자신의 군복과 말단 병사의 군복에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전우애가 더욱 끈끈했어요. 홍범도가 이끈 함경도 의병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갔어요.
당시 일본군은 홍범도를 ‘나르는 의병 대장’, ‘비(飛) 장군’ 등으로 불렀어요. 이 이름처럼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덕분에 함경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홍범도를 칭송하는 민요까지 만들어졌어요.
의병들의 뛰어난 활약에 놀란 일제는 의병들을 대대적으로 진압할 계획을 세웠어요. 그리고 의병 대장 홍범도를 잡기 위해 그의 가족들을 인질로 잡았어요. 일제는 인질로 잡은 첫째 아들을 홍범도에게 보내 항복을 권유했어요. 첫째 아들을 본 홍범도는 불같이 화를 냈어요.
“네가 비록 내 자식이지만 일본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일본 놈이 다 되었구나. 너는 일본놈의 말을 듣고 나에게 해를 끼치는 못난 놈이다.”
홍범도의 호통에 잘못을 뉘우친 그의 첫째 아들은 홍범도가 이끈 의병에 가담하였어요. 일제의 인질이 된 홍범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편지를 쓰라는 일본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버텼어요. 그래서 모진 고문을 받다가 감옥에서 죽고 말았어요. 둘째 아들 또한 고문을 받은 뒤 나중에 폐병으로 죽었어요. 첫째 아들 역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했어요.
잇따른 가족의 비극 속에서도 홍범도는 일본에 맞서 무장 투쟁을 계속 이어나갔어요. 당시 홍범도 부대가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는 37회나 되었고, 이는 의병 부대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약이었어요.
그러나 이러한 활약 속에서도 홍범도는 큰 고민에 빠졌어요. 그것은 바로 일본에 맞서 싸울 무기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어요. 아무리 용맹스러운 홍범도 의병 부대였지만 부족한 탄약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어요. 결국 홍범도는 무기를 구해 새로운 무장 항일 투쟁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1910년 고국을 떠나 망명길에 올랐어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다
홍범도는 간도를 거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정착했어요. 그는 무기를 사고 군대를 운영하기 위한 돈을 마련하고자 부두와 광산에서 일했어요.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상황은 홍범도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어요. 러시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나라 안에서 군대 만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어요.
결국 홍범도는 연해주를 떠나 간도로 이동하였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독립군을 길러내는 데 힘썼어요. 이후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활동이 부쩍 활발해지자, 그동안 기회를 엿보던 홍범도는 대한 독립군이라는 부대를 만들고 대장이 되었어요.
1919년 10월 대한 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 접경 지역에서 일본군을 공격해 7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실로 오랜만에 전과를 거두었어요. 이어 계속된 여러 소규모 전투에서 홍범도는 승리를 거두었어요.
몇 차례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대한 독립군을 진압하기 위해 대대적인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어요. 일본군은 홍범도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봉오동을 공격했어요.
“대규모 일본군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답니다!”
“각자의 소규모 병력만으로는 맞서기가 힘드니 함께 연합해 일본군을 공격합시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우리가 뭉쳐야 일본군에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던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 안무 등이 이끈 독립군 부대들과 연합해서 작전을 펼쳤어요. 봉오동 주변 야산에 숨어있던 독립군 연합 부대는 일본군을 기습하였고, 3∼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450여 명의 사상자를 내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어요.
봉오동 전투는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로 평가받고 있어요. 당시 이 소식을 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특별 신문을 발행하여 봉오동 전투 승리 소식을 널리 알렸어요.
봉오동 전투에 크게 패한 일본군은 가만히 있지 않았어요. 일본군은 대규모 병력을 더 보내서 독립군을 탄압하고자 했어요. 당시 30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끈 홍범도는 대한 독립군만으로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기 힘들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김좌진이 이끈 북로 군정서 등의 여러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백두산 일대로 이동했어요. 마침내 일제는 1만 5천여 명의 대규모 일본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백두산 인근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6일 동안이나 전투가 이어졌어요. 치열한 전투 끝에 독립군 연합 부대는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를 청산리 대첩이라고 해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독립군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의 마을을 불태우고 우리 동포들을 잔인하게 죽였어요. 이를 간도 참변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일제의 잔인한 보복을 피해 독립군은 어쩔 수 없이 이동할 수밖에 없었어요.
결국 여러 독립군은 연합 부대를 결성해 러시아의 자유시(오늘날의 스보보드니)라는 곳으로 이동했어요. 러시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레닌이 한국인 독립군들을 도와준다고 약속했거든요. 그러나 러시아의 배신과 독립군 내 갈등으로 인해 독립군은 오히려 러시아 적군(러시아 혁명 이후 만들어진 사회주의 노동자 군대)의 공격을 받았어요. 이때 많은 독립군이 사망하거나 무장 해제를 당했는데, 이를 자유시 참변이라고 해요.
당시 홍범도는 독립군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려고 노력하였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어요. 이미 가족도 모두 잃고, 자유시 참변으로 부하들마저 거의 다 잃은 홍범도는 결국 러시아의 군대에 들어갔어요. 홍범도는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러시아의 군인이 되었지만 그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레닌에게 독립군 활동을 지원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독립군 지도자들과 함께 국제회의에 참가하기도 했어요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다
홍범도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소련의 연해주에서 꾸준히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어요. 그러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찾아왔어요. 1937년 소련은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연해주 지역에 있던 우리 한국인들을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어요.
당시 강제 이주당한 한국인들 사이에 칠순의 홍범도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홍범도는 그의 처지를 딱하게 여긴 동포들의 배려로 크즐오르다 시(현재의 카자흐스탄에 있는 도시)의 극장에서 수위를 하였어요. 홍범도는 그곳에서 작가로 일하던 태장춘에게 자신의 일생을 이야기하였고, 태장춘은 홍범도를 위한 희곡을 썼어요. 그리고 드디어 1942년 홍범도의 생애를 다룬 연극 ‘의병들’이 크즐오라다 시의 고려인 극장에 올려졌어요.
1943년 76세의 나이로 홍범도는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어요. 그의 묘지는 지금도 크즐오르다 공동묘지에 있으며, 그의 생애를 존경한 동포들은 모금 운동을 펼쳐 홍범도의 동상을 그의 묘 앞에 세웠어요.
한평생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던 홍범도는 머나먼 타국에서 쓸쓸히 눈을 감았지만, 그의 독립정신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벅찬 감동을 주고 있답니다.
[집필자] 방대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