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오. 또 그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두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외다.”
자신의 소원이 오로지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임을 목 놓아 이야기한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소원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일을 했을까요?
동학을 믿는 사람들을 이끌다
이 사람은 바로 독립 운동가인 김구예요. 그는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적에는 창암이라고 불렸어요. 본래 이름은 창수였고요. 몰락한 양반 집안의 후손으로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어요.
김구는 어린 시절에 어땠을까요? 그는 심한 개구쟁이였어요. 아버지 놋숟가락을 분질러 엿을 바꿔 먹고, 어머니가 사다 놓은 염색 물감을 냇가에 풀며 놀기도 했지요. 그는 한때 과거에 급제해 가문을 일으키려는 마음을 품고 서당에서 열심히 공부하기도 했어요.
당시 조선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시기였어요. 서양 세력들이 다가와 문을 두드렸고, 새로운 학문을 공부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이루려는 움직임도 있었고요.
김구가 17살 즈음, 그의 생각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일들이 있었어요. 조선 왕조 마지막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했지요. 이후 관상 공부를 하며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어요.
“나는 동학을 믿는 사람이오.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차별하여 대하지 않을 것이오.”
김구는 동학을 믿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게 되었어요. 그리곤 해주지방 동학 교단의 책임자인 접주가 되었어요. 1894년에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동학군을 이끌고 해주성을 공격했어요. 하지만 청과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자기 나라 백성들을 진압하는 조정의 모습을 본 김구는 깊은 절망에 빠졌어요. 이때 그는 고능선이라는 사람을 만나면서 마음을 다잡게 되지요.
“왜놈들이 임금님이 사시는 궁궐까지 들어와 신하들을 마음대로 하니, 조선을 제2의 왜국으로 만들려는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죽음으로 나라에 충성해야 한다네.”
이후 김구는 그를 스승으로 섬겼어요.
두 차례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다
1895년, 왕비(후의 명성 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참혹하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어요. 1896년 2월 만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김구가 황해도 치하포 나루터 주막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때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한 사람이 그의 눈에 들어왔어요. 왕비를 살해한 일본인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를 죽였지요.
김구는 몇 달 뒤 체포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고 재판을 받았어요. 결국 그에게 사형이 내려졌지만, 다행히 고종이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사형 집행을 막아 주었어요. 고종의 사면을 받고도 풀려나지 않자, 김구는 감옥을 탈출했지요. 그 뒤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다녀야 했지요.
1905년에 일제가 을사늑약을 맺고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어요. 곳곳에서 을사늑약을 반대하며 의병들이 들고일어났지요. 김구 역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여러 활동을 펼쳤어요. 그 후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러던 중 1911년 김구는 또 감옥에 갇히게 되었어요.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이후 민족 운동가들을 잡아들였거든요. 105인의 민족 운동가들을 죄인으로 판결한 이 사건을 105인 사건이라고 해요. 15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하면서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어요. 그곳에서도 그는 죄수들을 가르쳐 깨우치게 만들고 이름도 김구로 바꾸었어요. 호는 백범이라고 했지요. 백범은 천하고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그는 1914년 일본의 특별 사면에 의해 풀려났지요.
어려움 속에서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어요. 수많은 사람이 일제의 총칼에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우리의 만세운동을 벌이며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어요.
3·1 운동 직후 김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어요. 일제의 심한 탄압에 더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기 어려웠거든요. 그즈음 국내외 다양한 임시 정부가 세워졌는데, 임시 정부를 통합해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세웠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 제도를 택했어요. 또한 독립운동을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했어요.
임시 정부를 찾아간 김구는 임시 정부의 뜰을 쓸고, 문지기가 되어 지키겠다고 했어요. 이후 그는 임시 정부 사람들의 생각이 나뉘어 어려움을 겪을 때도, 독립 운동가들이 하나 둘 떠나갈 때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임시 정부의 중심이 되어 독립 운동을 이끌었어요.
일제는 1931년 만주 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상하이까지 탄압의 손길을 뻗쳐왔지요. 활동이 쉽지 않았던 임시 정부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활동을 모색해야 했어요.
김구는 침체된 임시 정부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한인 애국단을 조직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어요. 윤봉길 등 한인 애국단원들의 활동에 중국 국민당 정부는 박수를 보냈고, 일제는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어요. 어마어마한 현상금도 내걸었지요.
일제의 탄압으로 한 곳에만 머물 수 없었던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이곳저곳 옮겨 다녀야 했어요.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났고, 일제의 공격은 더욱 거세지며 임시 정부는 어려움이 더해 갔지요. 광저우 등을 거쳐 충칭까지 옮겨가야 했어요.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일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 한국광복군도 만들었어요.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한국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국내에 침투하려는 진공작전도 계획했어요.
광복 이후 조국으로 돌아오다
1945년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함으로 우리는 광복을 맞게 되었지요. 하지만 김구는 기쁘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심정이었어요. 우리 힘으로 광복을 이루지 못해 너무 안타까웠지요.
광복 직후 한반도에는 미군과 소련군이 들어왔어요.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킨다는 이유에서였지요. 김구는 곧 조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어요. 미군과 소련군이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거든요. 그는 임시 정부의 대표임에도 미국의 반대로 개인 자격으로 11월 23일이 되어서야 조국에 돌아왔어요.
조국에 돌아온 김구는 분주했어요. 그는 남북으로 나누어진 조국에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여러 정치 세력과 의논을 하기도 했지요. 모든 게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삼국 외무 장관 회의가 열렸어요. 한반도에 민주적인 정부를 세우고, 미국, 영국, 소련, 중국 4개의 나라가 일정 기간 대신 다스려주는 신탁 통치를 하겠다고 했어요. 김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지요.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다
한반도에 정부를 세우는 문제를 놓고,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미국과 소련이 연 회의에서 결론이 나지 않자 이승만은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으니, 우리는 남쪽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물러나도록 세계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의견을 발표한 것이지요. 이에 비해 김구는 다른 입장이었어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나 하나의 편안함을 위해 갈라진 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한반도 문제가 유엔으로 넘겨졌고, 유엔에서는 남북한 총선거를 하도록 결론을 내렸어요. 하지만 소련과 북한이 유엔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엔에서는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할 것을 결정했어요. 그러자 이승만은 환영했고, 김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지요.
김구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북에 있는 김일성을 만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을 벌이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이런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어요.
결국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가 시행되었어요. 남북 분단을 염려하여 남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던 김구는 5·10 총선거에 참여하지 않았어요. 1948년 8월 15일 남한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1948년 9월 9일 북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어요. 이제 남과 북에는 사실상 서로 다른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답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에서 총탄 소리가 들려왔어요. 김구는 안두희(육군 포병 소위)라는 사람이 쏜 총탄에 머리를 맞고 숨을 거두었지요. 그의 죽음 소식에 많은 사람이 경교장으로 몰려와 눈물을 흘렸고, 온 국민도 안타까워했어요.
안두희는 왜 김구를 죽인 것일까요? 지금도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친일파 등 김구와 정치적인 생각이 달랐던 사람들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아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세상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북은 분단된 채 살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그가 했던 말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답니다.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무너뜨릴 수 있다.
[집필자] 황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