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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일제의 심장부에 수류탄을 던지다

<효창공원(서울 용산구)>   

“자네 소식 들었는가? 도쿄 한복판에서 수류탄이 터졌다는군.”

“그렇다네. 일왕에게 수류탄을 던졌다는데 어찌 되었는지.”

“속 시원한 일일세. 그렇지 않아도 일제의 괴롭힘에 속상했는데.”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누구라 하던가? 참으로 훌륭한 분일세.”

일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일본 도쿄에서 수류탄을 던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는 왜 일본 왕을 향해 폭탄을 던졌을까요?

조선 사람에 대한 차별 대우를 느끼다

이봉창은 어린 시절 서울 용산에서 자랐어요.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문창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일자리를 찾아야 했어요.

이봉창은 과자 가게에서 열심히 일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주인의 심부름을 갔다가 오는데 가게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 왔어요.

“우리 집 녀석 순진하지? 다른 쓸 만한 놈 생기면 내보낼 생각이야. 조선놈은 그저 무식한 게 제일이야. 그래야 부려먹기가 쉽지.”

순간 이봉창은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하였어요. 일본인이지만 양심 있고 친절한 주인인 줄만 알았거든요. 받는 돈은 적지만 언젠가 과자 만드는 기술도 알려주고 월급도 올려 주리라 생각하였지요. 그동안 마음을 다해 일한 자기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후 이봉창은 기술을 배워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그러다 철도국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기차선로도 살피고 기계도 고치는 일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철길에서 놀며 기차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열심히 즐겁게 일을 하였어요. 조선놈이라고 괴롭혀도 꾹 참았어요.

“하나, 둘, 셋, … 어, 이상하네! 돈이 부족해!”

이봉창이 받은 봉투 속의 추석 떡값은 일본인 나카무라가 받은 떡값의 반도 채 되지 않았어요. 이봉창은 뭔가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윗사람에게 항의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지요. 이봉창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어요. 하지만 그는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차별 대우를 받았던 것이에요.

승진에서도 조선 사람에 대한 차별 대우는 마찬가지였어요. 이봉창은 자신이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에 더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다고 믿고 있었어요. 하지만 번번이 떨어지고 말았지요.

“조선 사람은 열심히 일해도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없구나.”

이봉창은 깨달았어요. 조선 사람은 기술이 좋고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본 사람의 반쪽밖에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아예 일본 사람처럼 살기로요.

“그래, 일본에 가서 일본 사람으로 살아야겠어. 그러면 여기처럼 설움을 당하지 않고 사람 대접받고 살 수 있을 거야.”

일본 사람처럼 살다

1925년 11월, 일본 오사카에 도착한 이봉창은 일자리를 구하러 여기저기 돌아다녔어요. 하지만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퇴짜를 맞았어요. 그러다 가스 회사에 취직하면서,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었어요. 그러나 곧 그만두게 되었어요. 간장 가게에서도 일하게 되었지만 여의치 않았어요.

이봉창은 할 수 없이 오사카 항구에서 하루 품삯을 받는 부두 노동을 하였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부산과 일본의 시모노세키를 왕복해 운항하던 여객선과 항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   

“형님, 오늘 품삯 얼마 받았소? 내 품삯이 저번의 반밖에 안 돼.”

“자네가 일본 사람이 아닌 조선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나 보군.”

“아니, 이런 데서도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을 차별한다는 거예요?”

이봉창은 생활하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 대우를 실감했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사람 대접받고 살길은 일본 사람으로 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어요. 이봉창은 일본 사람과 똑같은 말과 행동을 몸에 익히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했어요. 그러던 1928년 어느 날, 한 일본인 친구가 그에게 말했어요.

“기노시타, 천왕폐하 즉위식이 있다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나?”

이봉창은 일본인 친구와 함께 식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어요. 일본 경찰들은 한 사람씩 훑어보며 꼼꼼히 검사했어요. 일본인 친구는 검사를 끝내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일본 경찰은 이봉창의 몸 구석구석을 뒤졌어요. 그의 몸에서 나온 것은 오사카로 돌아갈 차비와 조선에서 온 편지 한 장뿐이었어요.

그런데 일본 경찰은 편지를 보더니 무작정 이봉창을 경찰서로 끌고 갔어요. 그리고 아무런 설명도 없이 경찰서 유치장에 가두어 버렸어요. 이봉창은 당황했어요. 이상한 편지도 아니고 서울에서 온 순수한 안부 편지니까 괜찮을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날 왜 잡아 온 겁니까? 그 이유나 좀 압시다.”

이봉창은 답답한 마음에 쇠창살을 두드리며 하소연해 보았어요. 하지만 경찰은 그저 한번 노려보고 윽박지를 뿐 소용이 없었어요. 열흘이 지나서야 이봉창은 유치장에서 겨우 풀려났어요. 자신이 유치장에 갇힌 이유는 주머니에 있던 편지가 단지 조선어로 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봉창은 분통이 터졌어요.

이 일로 조선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주변 사람들은 이봉창과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사상이 좋지 않아서 경찰서에 잡혀간 거라고 소문이 퍼진 것이었어요. 자기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어요.

이봉창은 아예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몰려 사는 곳을 떠나 일본 사람들만 사는 곳으로 이사를 했어요. 일본에 와 있는 조카딸과도 만나지 않았어요. 철저하게 자신은 일본 사람이라고 속였지요. 누구도 자신을 조선 사람이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러나 그렇게 일본 사람으로 살수록 이봉창의 마음은 더욱 괴로웠어요. 일본 사람으로 살면 모든 게 다 편할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거든요. 당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제에 맞서 싸우고 있었어요. 이봉창은 자신이 부끄러웠어요. 그제야 자신이 일본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았어요. 자신이 왜 일본 사람의 반쪽 취급을 당해야 했는지, 왜 차별받고 살아야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모두 우리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이었어요.

‘그래, 사람답게 사는 건 내가 아니라 지금 일본놈들과 맞서 싸우는 조선 사람들이다.’

김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이루다

이봉창은 기노시타란 일본 이름을 버리고 다시 조선 사람 ‘이봉창’으로 되돌아왔어요. 그리고 이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기로 했어요. 하지만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우선 조선 독립에 힘쓰는 사람들을 찾아가기로 했어요.

‘그래, 중국의 상하이로 가자. 그곳에 가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야.’

1931년 1월 이봉창은 중국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어요. 이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어요. 그곳에 가면 조국을 위해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였어요.

하지만 이봉창이 방문했을 때 임시정부 사람들은 그를 일제의 염탐꾼 정도로 생각해 멀리했어요. 일본 옷을 입고, 일본 말도 유창하게 하는 이봉창이 누가 보기에도 꼭 일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어요.

이와 달리 김구는 이봉창을 알아보았어요. 오랜 독립운동의 경험 속에 김구는 사람 보는 눈이 밝았어요. 김구는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이 당당한 청년이 왠지 마음에 들었어요.

다른 날 이봉창은 김구에게 자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어요. 김구와의 역사적인 만남은 이봉창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어요.

“자네 만약 전에 한 말처럼 자네 손에 수류탄을 준다면 일본 왕을 단번에 죽일 수 있겠는가?”

“네, 저는 정말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선생님, 제가 조선 독립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김구는 이봉창의 커다란 손을 덥석 잡았어요. 그것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일본놈들의 차별과 매질을 견뎌내며 살아남기 위해 고된 노동에 시달려 온 조선 노동자의 손이었어요. 이봉창과 김구는 굳게 잡은 두 손을 오랫동안 놓을 줄 몰랐어요. 이봉창의 눈엔 어느덧 뜨거운 눈물이 고였어요.

일본 왕을 처단하기로 맹세하다

이봉창은 다시 일본 사람처럼 살기로 하였어요. 그러나 지금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은 예전과는 전혀 뜻이 달랐어요. 예전에는 진짜 일본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지만, 지금은 참 조선인이 되기 위해서였어요. 김구 선생의 지시로 일본으로 가려면 지금부터 일본 사람 행세를 해서 남을 속여야 했어요. 이봉창은 누가 보아도 완전한 일본 사람이었어요. 일본 형사들과도 친하게 지낼 정도였지요.

“이군, 모든 준비가 다 되었네. 수류탄은 두 개일세. 하나는 일본 왕을 없애는 데 쓸 것이고, 하나는 …”

“돈도 준비되었네. 동포들이 보낸 성금이라네.”

김구는 더는 말을 잇지 못했어요. 그리고 큰 숨을 내쉬며 김구는 품 안에서 보자기로 싼 조그만 뭉치를 꺼냈어요. 이봉창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수류탄과 성금을 받아들였어요.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일본 왕을 처단하러 가는 것이 자기 혼자만 하는 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봉창은 어금니를 꽉 물며 일본 왕을 꼭 처단할 것을 다짐했어요.

며칠 후 이봉창은 김구를 따라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는 집으로 갔어요. 오랜만에 커다란 태극기를 보니 가슴이 찡했어요. 그곳에서 이봉창은 선서문을 쓰고 그것을 목에 걸었어요. 그리고 수류탄을 손에 들고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지요. 김구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는 이봉창의 모습을 보며 믿음직스러워하였어요.

“선생님, 꼭 일본 왕을 제 손으로 죽여서 이렇게 돈과 수류탄을 준비해 준 동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이렇게 이봉창은 한인 애국단의 첫 단원이 되었어요. 한인 애국단은 일제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해 김구가 만든 비밀 단체였어요. 자기 목숨을 내건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지요.

<이봉창과 한인 애국단 선서문>   
국사편찬위원회,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왕을 향해 폭탄을 던지다

1931년 12월 22일 이봉창은 몸에 폭탄을 숨긴 채 일본에 도착했어요. 이봉창은 신문을 샅샅이 살펴보았어요. 생각대로 일본 왕이 1월 8일 요요기 연병장을 방문할 것이라는 기사가 있었어요.

“1월 8일에 꼭 상품이 팔릴 것.”

이봉창은 일본 왕이 지날 길을 미리 살펴 두었어요. 상하이로 1월 8일 일본 왕을 죽인다는 전보도 보냈어요. 혹시 몰라 일본 헌병대장의 명함도 얻어 두었어요. 이제 모든 준비는 다 끝났어요.

이봉창은 미리 봐 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거리엔 벌써 일본 왕을 보러 온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본 헌병과 경찰들의 감시가 너무도 삼엄했어요. 함부로 움직이다가는 경찰들에게 들킬 것이 틀림없었어요. 이곳은 어렵겠다고 판단했어요.

다음으로 봐 둔 곳으로 움직였어요. 그런데 그곳엔 일본 왕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이 별로 없었어요. 일본 왕이 궁으로 돌아가는 길을 바꾼 것이었어요. 아차 싶었어요. 다급한 마음이 들었어요.

이봉창은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마지막 장소로 서둘러 갔어요. 천황 궁 앞은 일본 왕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요. 헌병과 경찰들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검문하고 있었어요. 자칫하다가는 몸에 지닌 수류탄이 발각될 수 있는 난처한 상황이었어요.

이봉창은 어깨를 펴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어요. 곧 헌병들이 그에게 다가왔어요. 그러다 일전에 구해놓은 헌병대장 명함이 떠올랐어요. 헌병들이 그의 몸을 수색하려 하자 이봉창은 말없이 헌병대장 명함을 꺼내 보였어요. 헌병들은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지요. 이봉창은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 눈을 부릅떴어요. 깔끔한 옷차림에 예의 바른 말투는 누가 보아도 일본 신사였지요.

“아니, 대장님의 명함이잖아. 가시지요.”

이봉창은 사람들의 어깨를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갔어요. 큰 산을 넘은 기분이었어요. 드디어 눈앞에 천황 궁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였어요.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숨을 길게 들이마셨어요. 그리고 차분하게 기다렸지요.

잠시 뒤 사람들이 파도처럼 바닥에 엎드리기 시작했어요. 일본 왕이 나타난 것이지요. 이봉창도 다른 사람들처럼 머리를 숙였어요. 입술은 바짝 타들어 가고 등골을 타고 땀 줄기가 흘러내렸어요.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어요.

<이봉창의 일왕을 향한 의거>   

‘조금만 더 가까이. 조금만 더 가까이 와라. 이때다!’

이봉창은 일본 왕을 태운 마차를 향해 수류탄을 힘껏 던졌어요. 마차 바퀴가 부서지고 다친 말이 휘이잉거렸어요. 놀란 사람들은 우왕좌왕했어요. 헌병과 경찰들이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다녔어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수류탄의 화력이 약했어요. 더구나 일본 왕이 탄 첫 번째 마차는 지나간 뒤였어요.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고 했어요. 그때 다른 사내가 범인으로 지목받아 헌병들에게 끌려가고 있었어요. 순간 이봉창은 사람들 앞으로 나오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어요.

<이봉창 의사가 수류탄을 던진 곳>   
국사편찬위원회

“그 사람은 놔 주시오. 내가 일본 왕에게 수류탄을 던졌소.”

이내 헌병과 경찰들이 이봉창에게 달려들었어요. 이봉창은 그들을 거칠게 밀어내며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크게 외쳤어요.

“대한 독립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일본 왕을 처단하는데 실패했지만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어요. 이제 진짜 조선인이 되었다 생각하니 뜨거운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이봉창은 스스로 체포된 후 마지막까지 당당히 재판을 받았어요.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고, 1932년 10월 10일에 순국하였어요.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봉창과 재판정에 끌려가는 이봉창>   
국사편찬위원회

“난 일본 왕 개인을 미워하지 않소. 그러나 내 나라를 짓밟고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일본 왕을 증오하오. 그를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내 나라를 되찾는 길이고,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고 확신하오.”

이봉창의 의거는 비록 수류탄이 명중하지 못하여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어요. 또한 이후 국내외의 독립 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지요.

이봉창은 식민지 시대 청년으로 살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일본 왕을 처단하는 독립 운동을 선택하였어요. 중국 언론들까지 이봉창의 의거 소식을 전하면서 그를 ‘의사(義士)’로 표현하며 높이 평가하였어요. 만약 여러분이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시대에 살고 있었다면, 이봉창과 같은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요?

[집필자] 조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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