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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

고구려(高句麗), 당(唐)과 동북아 패권을 다투다

644년 ~ 668년

고구려·당 전쟁 대표 이미지

안시성

동북아역사넷(동북아역사재단)

1 개요

고구려를 침입했던 수(隋)가 멸망하고, 618년 당(唐)이 새롭게 건국되면서 고구려와 당 사이에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당은 대외팽창을 지속하였고, 고구려는 대당(對唐) 강경파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고구려와 당의 충돌은 644년부터 제한적으로 진행되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은 645년, 661~662년, 667~668년 3차례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고구려는 제1차 전쟁과 제2차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제3차 전쟁에서 신라와 연합한 당에게 패하고 말았다. 고구려·당 전쟁은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맞서 대등히 겨룰 수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당의 팽창과 고구려의 대응 - 높아지는 파고

618년(영류왕 1) 고구려·수 전쟁을 일으켰던 수 양제(隋 煬帝)가 사망하자, 태원유수 이연(太原留守 李淵)이 당(唐)을 건국하였다. 626년(영류왕 9) 당 고조(唐 高祖) 이연의 둘째 아들이었던 이세민(李世民)은 형과 아우를 죽이는 이른바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당 태종(唐 太宗) 이세민은 즉위 후 적극적으로 대외팽창에 나섰다.

630년(영류왕 13) 당 태종은 북쪽의 동돌궐(東突厥)을 제압하고 천가한(天可汗) 칭호를 얻었으며, 중앙아시아까지 영향력을 확장하였다. 631년(영류왕 14) 당 태종은 고구려의 경관(京觀)을 허물라고 강요하였다. 경관은 고구려가 고구려·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세운 기념물인데, 결국 당의 강요에 경관을 허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당의 위협을 감지한 고구려는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에 나서게 된다. 천리장성은 서남쪽 비사성(卑沙城)에서 동북쪽 부여성(扶餘城)에 이르는 장성으로 647년(보장왕 6)에 완공하였다.

635년(영류왕 18) 당은 서쪽의 토욕혼(吐谷渾)을 복속시켰으며, 640년(영류왕 23) 서북쪽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켰다. 당 태종은 당의 서쪽이 거의 평정되자, 다시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641년(영류왕 24) 직방낭중 진대덕(職方郎中 陳大德)을 고구려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허와 실을 정탐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당에 대해 유화책을 쓰며 관계 개선에 노력하고 있었다. 반면 연개소문은 군부를 중심으로 한 대당(對唐) 강경파였는데, 당시 고구려 정계에서는 날로 세력이 커지고 있던 연개소문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연개소문은 642년(보장왕 1) 군대 사열을 핑계로 대신들을 불러 모은 후 한꺼번에 죽여버렸다. 이어 영류왕(榮留王)을 시해하고 영류왕의 조카를 보장왕(寶藏王)으로 삼았으며, 자신은 막리지(莫離支)에 올라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른바 연개소문의 정변이다.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이 대외 강경책을 추진하면서, 당과의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당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644년(보장왕 3) 당은 사농승 상리현장(司農丞 相里玄獎)을 고구려로 보내 중재에 나섰다. 사실 상리현장은 “고구려가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당이 내년에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협박하였고, 연개소문은 당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644년 고구려는 서쪽으로 요하(遼河)를 건너 당의 동북방 거점인 영주(營州)를 선제공격하였다. 당의 장수 장검(張儉)이 고구려군의 공격을 막아내자, 당 태종은 장검을 영주도독(營州都督)으로 삼아 고구려를 공격케 하였다. 결국 고구려와 당은 대규모 전쟁이라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3 제1차 고구려·당 전쟁 - 당 태종의 침입을 막아내다

644년(보장왕 3) 11월 당 태종은 태자첨사 이적(太子詹事 李勣)을 요동도행군총관(遼東道行軍總管)으로 삼고, 형부상서 장량(刑部尙書 張亮)을 평양도행군총관(平壤道行軍總管)으로 삼아 고구려 공격을 준비하였다. 645년(보장왕 4) 이적은 10만 명을 거느리고 육로로 진군하고, 장량은 7만 명을 거느리고 해로로 진군하였다. 당 태종은 친히 6군(軍)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는데, 요동도행군의 병력수를 감안하면 최소 10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전쟁 준비와 실제 출정 과정에서 추가된 병력을 감안하면 30만 명 이상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된다.

645년 4월 요하(遼河)를 건넌 이적의 요동도행군은 현도성(玄菟城)와 개모성(蓋牟城)을 점령하고, 남쪽에 위치한 요동성(遼東城)으로 향하였다. 5월 당 태종이 이끄는 본대가 요택(遼澤)을 건너 요동성에 도착하자, 요동도행군은 본대와 합류하여 본격적으로 요동성 공략에 나섰다. 요동성은 요동 최대의 고구려 거점성이었지만, 평지에 위치해 당의 공성무기에 취약한 편이었다. 결국 요동성은 대규모 당군의 공세에 함락되고 말았다. 전사자는 1만여 명이었고, 포로도 1만여 명에 달했으며, 백성 4만 명과 곡식 50만석이 당군에게 넘어갔다.

요동성을 함락한 당군은 인근의 백암성(白巖城)까지 공격해 차지하였다. 이 무렵 해로로 이동한 장량의 평양도행군은 요동반도 남단에 위치한 비사성을 공격해 함락하였다. 5월을 전후하여 현도성,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이 당군에게 함락되면서 고구려의 천리장성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요동성과 비사성 사이에 위치한 안시성(安市城)과 건안성(建安城)이 건재하였기 때문에 당군의 평양성 진군은 차질을 빚게 되었다.

6월 당군은 요동성 남쪽에 위치한 안시성으로 향하였다. 당군의 공세에 대응해 고구려는 대군을 동원해 안시성 구원에 나섰다. 대대로 고정의(大對盧 高正義), 북부욕살 고연수(北部褥薩 高延壽), 남부욕살 고혜진(南部褥薩 高惠眞) 등이 이끄는 15만 대군이었다. 고구려군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에 도착하였고, 먼저 고연수와 고혜진이 이끄는 군사들이 안시성 8리까지 진군하였다.

당 태종은 4천명을 거느리고 인근 산으로 올라갔고, 이세적은 1만 5천명을 거느리고 서쪽에 진영을 편성하였으며, 장손무기(長孫無忌)는 1만 1천명을 거느리고 대기하였다. 고구려군은 이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공격해 기선을 제압하려 하였다. 고구려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장손무기의 부대가 나타났고 약정한 신호에 따라 당군은 총공세에 나섰다. 당군의 역습에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져 와해되었고, 전사자만 3만여 명이 발생하였다. 결국 고구려군은 당군에 포위되었고, 고연수와 고혜진은 당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고구려군 약 3만 7천명이 당군의 포로가 되었고, 말갈 군사 3천 3백명은 생매장되었다. 이 전투가 바로 주필산(駐蹕山) 전투이다.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한 당군은 7월 안시성 공략에 나섰다. 안시성은 이전의 고구려 성들과 달리 수십 일이 지나도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당군은 안시성 앞에 토산(土山)을 쌓아 성벽을 공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폭우로 인해 토산이 무너지면서 안시성의 성벽도 일부 훼손되었다. 이때 고구려군이 토산으로 진격해 당군을 몰아내고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당군이 토산을 탈환하고자 시도하였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안시성 전투가 벌어질 당시 북방유목민족이었던 설연타(薛延陀)는 내분에 휩싸이고 있었다. 진주가한(眞珠可汗)이 사망하자, 곧이어 발작(拔灼)이 이복형제와 추종세력을 제거하고 다미가한(多彌可汗)으로 즉위하였다. 당은 진주가한이 사망하더라도 두 아들 간 세력 다툼으로 한동안 설연타가 분열되어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설연타의 내분은 싱겁게 끝나버렸고, 설연타는 당에 적대감을 드러냈다. 북쪽의 설연타(薛延陀)가 세력을 확장해 당을 침입하였기 때문에, 당은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당 태종의 고구려 친정(親征)은 실패로 끝났다.

4 제2차 고구려·당 전쟁 - 수도 평양성을 지켜내다

645년(보장왕 4)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당은 646년(보장왕 5) 북쪽의 설연타를 공격해 멸망시켰다. 설연타가 멸망하자 철륵(鐵勒)을 비롯한 북방 유목세력들이 당에 복종하게 되었다. 당 태종은 고구려를 포기할 수 없었다. 647년(보장왕 6)부터 소규모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는 소모전을 전개하는 한편, 다시 대규모 고구려 원정을 준비해 나갔다. 하지만 649년(보장왕 8) 당 태종이 사망하고 고종이 즉위하면서 고구려·당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당 고종은 신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구려 공격 이전에 백제부터 멸망시키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660년(보장왕 19) 7월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였다. 백제가 멸망하자 당 고종은 661년(보장왕 20) 5월 소정방(蘇定方)의 평양도행군, 임아상(任雅相)의 패강도행군, 방효태(龐孝泰)의 옥저도행군, 계필하력(契苾何力)의 요동도행군, 정명진(程名振)의 누방도행군, 소사업(蕭嗣業)의 부여도행군 등을 편성해 고구려 공격에 나섰다.

소정방·임아상·방효태 등은 평양성으로 향하고, 계필하력·정명진·소사업 등은 요동방면으로 진군하였다. 661년 8월 소정방·임아상·방효태의 행군은 대동강으로 들어가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계필하력의 행군은 압록강 하류에 상륙하여, 요동과 한반도의 고구려군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이 무렵 당에 복속했던 철륵이 반란을 일으키고 거란까지 움직임을 보이자, 요동방면으로 파견되었던 당군은 차례차례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군은 고구려 적지 속에서 고립되고 말았다.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은 신라에 군량 수송을 요청하였다. 662년(보장왕 21) 1월 신라는 김유신(金庾信)을 보내 군량 2만여 석을 평양으로 운반하였다. 위험한 임무였지만 김유신은 고구려군의 감시를 피해 무사히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할 수 있었다. 신라의 군량을 건네받은 당군은 평양성의 포위를 풀고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당군은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신라가 군량을 전달한 2월을 전후하여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당군을 공격하였다. 고구려군은 먼저 임아상의 행군을 공격하였고, 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임아상은 진중(陣中)에서 사망하였다. 이어 고구려군은 방효태의 행군을 공격하였는데, 방효태의 행군은 전멸하였다. 특히 방효태는 아들 13명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는데, 이들 모두 전사할 정도로 참패를 당하였다. 임아상과 방효태의 행군이 궤멸하자, 보다 후방에 있던 소정방의 행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구려가 당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면서 당과의 전쟁은 다시 소강기에 접어들었다.

5 제3차 고구려·당 전쟁 - 나당연합군의 공격과 고구려의 멸망

666년(보장왕 25) 무렵 고구려·당 전쟁을 지휘하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장남인 연남생(淵男生)이 막리지(莫離支)에 올랐다. 실권을 장악한 연남생이 지방 순시를 도는 사이, 연남생의 동생들인 연남산(淵男産)과 연남건(淵男建)이 평양성을 장악하는 정변이 발생하였다. 연남생은 국내성(國內城)을 중심으로 동생들에게 맞섰으나 역부족이었다. 연남생은 당에 여러 차례 구원을 요청하였고, 결국 당에 투항하였다.

666년 6월 연남생이 당에 투항하면서 국내성을 비롯한 북방의 여러 성들이 당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12월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가 12성 763호 3,543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고구려 서북방 전선은 연남생으로 인해 당에게, 남방 전선은 연정토로 인해 신라에게 뚫려버렸다. 최고위층의 내분과 투항 때문에 고구려의 고급 군사 정보가 고스란히 나당연합군의 손에 들어가고 말았다.

666년 12월 당 고종은 이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郝處俊)·계필하력·방동선(龐同善) 등을 보좌케 하여 고구려 원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667년(보장왕 26) 9월 당군은 고구려의 북서쪽 요새인 신성(新城)을 함락하였고, 주변 16성은 당군에 투항하였다. 고구려의 연남건은 신성 일대를 탈환하기 위해 대군을 보냈지만, 금산(金山)에서 당군에게 패하여 5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당군은 여세를 몰아 남소성(南蘇城)·목저성(木氐城)·창암성(蒼巖城)까지 함락하였다.

668년(보장왕 27) 1월 당 고종은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아 추가 병력을 투입시켰다. 2월 당군은 고구려 북쪽 요새인 부여성을 함락하였고, 주변 40여 성도 당군에 투항하였다. 당시 당 고종이 시어사 가언충(侍御史 賈言忠)에게 요동의 정세를 묻자, 가언충은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先帝)께서 죄를 물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오랑캐에게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언충의 말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연남건이 부여성을 탈환하기 위해 고구려군 5만 명을 보냈지만, 설하수(薛賀水)에서 당군에 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하였다. 승기를 탄 당군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대행성(大行城)을 함락하고, 압록책(鴨綠柵)도 돌파하였다. 압록강을 넘어선 당군은 9월 욕이성(辱夷城)을 함락하면서 청천강 일대도 장악하였다.

당군은 평양성으로 남진하였고, 이에 보조를 맞추어 신라군은 평양성으로 북진하였다. 668년 7월 문무왕은 한성주(漢城州)로 행차하여 여러 총관(摠管)들에게 교서를 내려 당군과 회합하도록 하였다. 신라군은 사천(蛇川)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고 당군과 합류하였고,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한 달 이상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연남산으로 하여금 백기를 들고 당군 이적에게 항복케 하였다. 하지만 연남건은 항복을 거부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농성하였다. 연남건은 승려 신성(信誠)에게 군사권을 위임했는데, 신성이 몰래 사람을 보내 이적에게 내응할 것을 약속하였다. 결국 신성이 성문을 열자, 나당연합군이 평양성 내로 밀려들어오면서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고구려는 당과 크게 3차례 전쟁을 벌였다. 제1차와 제2차는 승리하였지만, 제3차 전쟁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해 668년 멸망하고 말았다. 당은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해 당의 통치 하에 두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고구려 부흥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결국 698년 고구려 유민들이 중심이 되어 발해(渤海)를 건국해 고구려를 계승하였다.

고구려와 수·당 전쟁은 우리 민족이 중국 대륙과 대등하게 맞서 싸울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고구려는 멸망하였지만, 수·당 또한 대내외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 백제·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삼국은 동질감이 보다 공고해졌으며,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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