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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1960년 4월의 민주주의 혁명,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다

1960년

4·19혁명 대표 이미지

4·19혁명 당시 서울 시내 대학 교수들의 시위

경향신문

1 개요

1960년 2월 28일 대구민주운동을 시작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1960년 4월 26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시위를 말한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 학원 통제와 3·15부정선거에 반발하는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되어, 이후 시민들이 합세한 대규모 시위로 확대되었고 끝내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다.

2 배경

정치적으로 이승만 정권은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부터 반공체제를 강화시키며 영구집권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 따른 발췌개헌과 1954년 사사오입개헌을 강행해 나갔다. 그러나 이승만의 권력 강화는 도시민의 비판에 직면했고, 이러한 반감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자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었다. 이에 따라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조봉암 후보의 득표율이 30%에 육박했고, 같은 날 치러진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 장면 민주당 후보가 이기붕 자유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58년 5월 2일 민의원 선거의 경우, 자유당 입장에서는 진보당을 견제하고 부통령 계승권을 없애기 위한 개헌선을 확보해야 하는 중요한 선거였다. 자유당은 무소속과 야당 후보자에 대한 테러와 불법적인 방해를 일삼았으며, 경찰과 공무원, 투개표 종사자들을 동원해 전방위적인 부정행위를 자행했다. 그럼에도 자유당은 개헌선의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고, 대도시에서 야당 의원들이 크게 선전하며 민주당은 개헌을 저지할 수 있는 의석을 확보하게 되었다.

사회경제적으로 국민들의 민주주의적 가치 지향은 점점 높아졌다. 교육 기회가 급속도로 확대되면서 학생 수는 1945년 약 150여만 명에서 1960년 450여만 명으로 증가했고, 문자 해득률은 1945년 22%에서 1959년 78%로 증가했다. 교육 수준이 상승하는 가운데 민주주의 교육은 국민학교부터 중등학교까지 지속적으로 실시되었고, 교과 내용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신과 이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한편, 1950년대에는 한국전쟁으로 집단 이주한 월남민이나 피난민이 그대로 도시지역에 정착하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어려움을 겪던 농어촌의 실업군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도시가 급성장했다. 교육의 확대와 도시화의 진전은 교육받은 인구 층이 도시 지역으로 집중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도시민들은 지방에 비해 대중매체를 쉽게 접할 수 있어, 이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쉽게 습득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일간지는 강한 당파성을 띠며 민주적 가치를 강조하고 이승만 정권에 매우 비판적인 성향을 드러냈기 때문에 도시민들의 반정부적 성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문제는 이렇게 교육 받은 인구가 늘어남에도 일자리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업 문제는 빈곤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심각한 실업 상황은 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심화시켰다.

한편, 이승만 정권 하에서 학원에 대한 통제는 점차 강화되었다. 1949년 9월 정부 주도로 창설된 학도호국단은 전국의 학교를 일사불란한 통제와 규율 아래 두기 위해 만들어진 학생조직으로, 정부의 어용단체로서 구실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대 내내 휴전회담 반대, 재일교포 북송 반대와 같은 각종 관제 시위에 학생들을 동원하면서 학원을 정치 도구로 빈번하게 활용했다. 이 때문에 학원의 중립성과 교육의 자주성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 자유민주주의와 현실 민주주의 사이의 간극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듯 불안정한 분위기 속에서 정권 유지에 심각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에 예정되어 있던 정・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대대적인 부정선거의 토대를 닦아나갔다.

3 원인 : 3·15부정선거

이승만 대통령은 1959년 3월 내무부장관에 최인규를 임명하며 본격적인 선거 대책을 세워나갔다. 최인규는 각급 경찰과 공무원들에 대한 인사를 단행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공공연하게 선거부정을 독려했다. 자유당은 6월 29일 대통령 후보에 이승만, 부통령 후보에 이기붕을 지명하며 이른 선거대비 태세에 나섰다. 1959년 9월에 조직된 자유당 기획위원회는 1960년 1월 초부터 선거자금 조달 및 부정선거 관련 대책을 확립시켜 나갔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의 계획적인 부정선거 방법은 1960년 3월 3일 민주당에 의해 폭로되었으나 자유당은 선거 방침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병으로 사망하면서 이승만의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자유당, 그리고 경찰은 이기붕의 확실한 부통령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 기간 내내 노골적으로 야당을 탄압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투표소에 나간 사람들은 온갖 부정선거의 실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은 오전 10시 30분 선거 무효를 선언했다. 민주당 경남도당과 민주당 중앙당도 선거 무효 성명을 발표했다.

선거 결과 이승만은 유효투표 수의 88.7%를, 이기붕은 79%를 득표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부정선거에 대한 저항의 움직임은 이미 전국적으로 들끓고 있었다.

4 혁명의 시작 : 2·28부터 4·18까지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4·19혁명의 시작을 상징하는 고등학생들의 첫 시위가 있었다. 이 2·28대구민주운동을 시작으로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가 거행되기 전까지 대전·서울·부산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으며, 이때의 시위는 주로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양상이었다. 학생들의 시위 과정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했던 구호는 ‘학원의 자유’였고 ‘부정선거 배격하자’, ‘공명선거 보장하라’와 같은 부정선거에 직접 항의하는 구호도 등장했다. 그러나 자유당 정권은 학생들이 ‘학원의 자유’와 더불어 외쳤던 ‘공명선거’에 대한 요구를 무시하고 3·15정부통령선거를 예정대로 강행해 나갔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는 부정선거 반대 시위가 열렸다. 오후 3시경 민주당 경남도의원 정남규를 선두로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가두 행진을 진행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진압했고, 민주당 간부 6명이 연행되었다. 오후 7시 선거 개표가 시작된 이후 1만 명의 시위대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다시금 마산시청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정전이 되면서 평화적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발포가 시작되었다. 실탄과 최루탄이 무차별적으로 발포되는 와중에, 김주열이 최루탄에 직격을 맞았다. 평화적 시위는 이제 민중 봉기로 발전했으며,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한 끝에 진압되었다.

4월 11일 오전 11시 마산시 신포동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마산 시민과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새벽까지 격렬한 시위를 진행했다. 시위는 며칠 간 이어졌고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4월 15일 마산 시위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이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하며 학생들을 더욱 격노하게 만들었다.

4월 18일 오후 1시경 시위를 결의한 고려대학교 학생 3천여 명이 교정 본관 앞에 운집했고, ‘4·18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시위대는 오후 2시경 국회의사당에 도착해 연좌농성을 감행했다. 문제는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종로4가로 접어드는 천일백화점 앞에서 오후 7시 20분경 대한반공청년단 동부 특별단 부단장 유지광이 이끌던 화랑동지회 소속 정치깡패 60~70명이 흉기를 들고 시위대를 덮쳤다. 이때의 피습으로 약 50명의 학생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학생들의 피습 소식은 이튿날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5 피의 화요일

4월 19일 오전부터 서울에서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국회의사당 및 경무대로 몰려들었다. 오후 1시경 시위대의 숫자는 10만 명을 넘어서 있었다. 30분 뒤 경찰은 경무대에 집결한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실탄 난사를 감행했고, 경무대 앞은 학생들의 피로 얼룩졌다. 경찰의 총격에 분노한 시위대는 서울시내 건물 곳곳을 방화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해 나갔다.

시위가 거세어지면서 서울 일대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계엄사령관에는 육군참모총장 송요찬 중장이 임명되었다. 계엄령은 오후 1시로 소급적용해 선포되었는데, 이는 오후 1시경에 이미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후 5시가 되자 무장경찰대는 경무대에서 중앙청, 세종로에 이르는 거리에 2대의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소탕 사격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날 시위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광주·인천·목포·청주 등 전국 각지에서 진행되었으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4월 20일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이승만은 19일의 시위에 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부정선거도 인정하지 않았고 사태에 대한 대책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시위가 그저 불평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치부했다. 자유당 또한 반성의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전과 명확하게 다른 입장을 취한 건 미국이었다. 미국은 19일의 시위가 규모 면이나 성격 면에서 이전과 크게 다르다고 판단했다. 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Walter Patrick McConaughy)는 19일에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는 요지의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21일 국무위원들과 자유당 당무위원들은 별다른 수습책을 제시하지 않은 채 일괄 사표를 제출했다. 23일 이기붕은 당선자 신분의 사퇴를 ‘고려’하고, 보수대연합을 위해 내각제 개헌을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명확한 사퇴가 아닌 ‘고려’라는 표현은 대중의 분노를 더욱 자아냈다. 같은 날 장면은 부통령직 사퇴를 발표했으며,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24일 이기붕은 비난 여론을 의식해 부통령 당선 사퇴 및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자유당을 탈당할 것이며, 국무위원들의 사직서를 수리해서 개각을 하겠다는 장문의 수습 방안이 담긴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모든 책임을 이기붕과 자유당, 국무위원에게 떠넘기고 자신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다. 결국 정국은 이 정도 수준에서 수습되고, 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체제는 그대로 유지되는 방향으로 정리되는 듯 보였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제시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방의 시위는 24일부터 차츰 거세어져 갔다.

정국은 4월 25일 대학교수단 시위로 전기를 맞이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 나약하고 무기력한 태도를 보였던 교수들이 19일의 시위로 인한 학생들의 희생에 보답하고자 나선 것이었다. 25일 오후 3시, 258명에 달하는 교수들이 서울대 교수회관에 모여 만장일치로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부정선거와 4·19의거의 책임을 지고 물러서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항으로 된 시국선언문을 채택했다. 이윽고 교수단은 ‘재경각대학교수단(在京各大學敎授團)-학생(學生)의 피에 보답(報答)하라’고 적인 플래카드를 들고 본격적인 시위에 들어갔다. 종로에서 국회의사당까지 이어지는 질서정연한 교수단의 행진에 4, 5만 명에 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뒤따랐다. 이렇듯 대학교수단의 시위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 저녁부터 다시 학생과 시민들이 궐기했다. 4월 19일의 시위에서는 이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가 등장하지 않았지만, 25일 시위에서는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때부터의 시위는 정권타도 운동으로 전환되는 양상이 뚜렷했다.

25일 민주당은 이승만 하야 및 정부통령 재선거 실시안을 긴급동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이날 이승만 대통령은 외무부장관에 허정을 임명했다. 정국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6 승리의 화요일

25일 밤부터 26일 새벽까지 이어지던 시위는 통금 해제 시간인 오전 5시경부터 점차 다시 시작되었다. 8시 30분경이 되자 순식간에 7만 5천 명 가량의 군중이 동대문과 세종로 사이에 집결했다. 이들이 외치는 요구사항은 재선거와 이승만의 퇴진, 경찰의 정치적 간섭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10시 경, 시위군중은 10만 여명으로 불어났고, 세종로에서 중앙로까지 도로를 꽉 메웠다.

시위의 폭발적인 양상은 미국이 이승만의 사퇴를 촉구하기 위해 직접 개입하게끔 만들었다. 매카나기 주한미국대사는 김정렬 국방부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시급히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정부통령 재선거 문제와 이승만의 장래 역할에 대해 숙고할 것을 권고했다.

이윽고 김정렬이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전날 새롭게 외무부장관이 된 허정, 그리고 이승만과 하야 문제에 대해 깊게 논의했다. 이승만이 경무대에서 시위대표자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지금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을 권고했고, 이승만은 이에 ‘국민이 나가라고 하면 나가겠다’고 발언했다.

10시 30분, 중대 발표를 예고하던 라디오에서 이승만의 하야성명이 발표되었다. 이에 세종로 인파를 비롯한 도심지는 환호와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흥분한 군중들로 인해 서울시내의 법질서와 교통망은 완전 마비되었고, 주요 거리마다 꽉 차있는 약 30만 명의 군중은 그칠 새 없이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살인 경찰 잡아내라’고 외쳤다. 이날 서울 이외에도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김천, 목포 등 전국 곳곳에서 시위가 있었다. 주로 학생들의 주도 하에 시민들이 가세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부산의 경우 시위대가 수십만에 달했고, 권력에 대한 불만이 폭력적인 양상으로 표출되어 부산의 교통망과 치안이 일시적으로 마비되기도 했다.

26일 오후 2시부터 열린 국회 본회의에서는 이승만의 즉시 하야 등 4개 항으로 되어 있는 ‘시국수습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대통령은 27일 사임서에 서명을 거부하는 등 끝까지 버티고자 했으나 결국 굴복하고, ‘나 이승만은 국회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의 사임서를 발표했다. 이로써 제1공화국은 11년 8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7 혁명의 결과

이승만 사임 이후 외무부장관 허정이 수석 국무위원으로서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허정은 5월 3일 5개의 시정방침을 발표했는데, 제2항에서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겠다’고 언급하며 3·15부정선거에 대한 이승만 정권 관계자와 자유당 간부의 책임을 최대한 축소시키겠다는 의중을 드러냈다.

시민들은 부정선거 원흉 및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단을 요구했다. 최인규는 5월 3일 부정선거 총지휘 혐의로 구속되었고, 다음날엔 치안국장 이강학이, 7일에는 자유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한희석이 구속되었다. 기타 자유당 관계자 및 국무위원 등 3·15부정선거 및 4·19혁명기 발포명령자들 또한 구속되었다. 더불어 과도정부는 ‘부정축재 처리안’을 의결해 과거 부정을 자진신고하게 하고, 부정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도록 통고했다. 과도정부의 소극적 태도와 문제의 복합적 성격으로 인해 부정선거 원흉과 부정축재 처리는 다음 정부로 이월되었다.

4월 26일 통과된 시국수습결의안을 통해 기존 의원이 해산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내각책임제 개헌안은 6월 1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15일 재적의원 211명 중 찬성 208표, 반대 3표로 가결되었다. 이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합헌적인 개헌이었으며, 대통령은 국회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7월 29일에는 제5대 민의원 의원선거와 제1회 참의원 의원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국회의원 선거를 통해 민의원 전체 의석 233석 중 민주당이 175석을, 참의원 전체 의석 58석 중 민주당이 31석을 얻게 되었다. 이를 통해 제2공화국이 출범했고, 8월 8일 제2공화국의 첫 국회가 개원했다. 8월 12일 윤보선이 제2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다음날 정식 취임하였다. 이후 8월 19일 민의원 회의에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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